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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물어야 생각이 바르다마음을 새롭게 하는 신앙 5(누가복음 10:29, 36)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09.05 01:40
▲ Jacopo Bassano, 「The Good Samaritan」 ⓒhttps://www.nationalgallery.org.uk/paintings/jacopo-bassano-the-good-samaritan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우리 있는 곳에 함께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참된 안식과 평화와 기쁨을 가득 부어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다섯 번째 시간으로 ‘제대로 물어야 생각이 바르다’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우리 마음의 활동에서 생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는 재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연 생각과 무관한 활동이 있을까 싶습니다. 인식, 기억, 상상, 의문, 평가, 판단, 해석, 결정 모두 생각을 매개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때도 생각해야 하고, 뭔가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할 때도 생각해야 합니다. 뭔가를 추구하고 행동해야 할 때도 생각해야 합니다.

얼핏 보기에 생각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감정에는 생각이 작용하지 않던가요? 아닙니다. 사실 우리의 감정을 부추기는 것도 생각이고, 우리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도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거야?’라고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면 그 화가 누그러지는 법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이제 감기처럼 흔하다고 여겨지는 우울감도 생각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이제 내게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나는 그저 늘 혼자일 뿐이야.’ 자기 자신에 관해, 자기 처한 상황에 대해, 자기 미래에 대해 품은 이런 비관적인 생각이 우울감을 부추긴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 생각들을 긍정적으로 전환할 수만 있다면 우울감이 감소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욕망에는 생각이 없던가요? 있습니다. 우리 욕망을 부추기는 것도 생각이고, 우리 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것도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저게 꼭 있어야 행복하지’라고 생각하면 그걸 가지려 하는 욕망은 커지겠지요. ‘저게 없다고 큰 일 나는 건 아니야’라고 생각하면 그걸 가지려 하는 욕망은 상쇄되겠지요.

우리 욕망의 이면에는 좋은 삶에 대한 무의식적 관념이 자리잡고 있기 마련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것처럼, 물질적 풍요를 무엇이라 생각하는지에 따라 물질적 부에 대한 욕망의 정도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무엇을 행복이라고 여기느냐에 따라 그 욕망하는 바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을 달리해야 삶이 달라진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달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각과 관련해 우리는 명사로서의 ‘생각’과 동사로서의 ‘생각하기’를 구별해야 합니다. 명사로서의 생각은 특정 상황에서 대개 무의식적으로, 자동반응적으로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는 생각의 조각들, 단편들을 말합니다. 굳어져 잘 변하지 않는 이런 저런 상념들을 말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동사로서의 ‘생각하기’는 기존의 생각의 조각들과 단편들을 다른 각도와 관점에서 점검하고 폐기할 건 폐기하고 바로잡을 건 바라잡아 그것들을 의미 있게 또는 가치 있게 재구성하여 새로운 형태의 생각을 산출하는 정신 활동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는 사고, 사유, 성찰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달리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뭔가를 의식적으로 지혜롭게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을 이렇게 둘로 분류했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관심은 당연히 머릿속에 저장된 갖가지 다양한 주제들에 관련된 생각의 조각들이나 단편들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의식적 사유 활동으로서의 생각에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신앙적인 사고, 즉 기독교 신앙에 기초해 생각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오늘 시대는 더욱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과 관련된 정보들을 그저 믿기만 한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몇몇 핵심 교리들을 그저 사실로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진리 탐구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의 산물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당대의 사회, 경제, 문화적 맥락 속에서 기독교 신앙이 갖고 있는 본질적 의미와 가치를 재평가하고 재해석하고 재표현하는 과정이 지속되어 왔습니다.

예수님도 유대교 신앙을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개혁하신 분이십니다. 당시 유대교도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독하는 자로 취급한 것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 에 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를 보십시오. 율법의 불변의 진리성을 전제하면서도 그 율법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새로운 해석과 실천 방향을 제시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통해 형제에 대한 인격 살해를 금하고, 형제에 대한 폭력적 언사를 금하는 새로운 실천 윤리를 제시하셨습니다.

성경은 이천년 전의 산물입니다. 이 성경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참 생명의 진리라는 것을 오늘 이 시대의 언어로 표현하고 때로 변증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기독교 신앙이 오늘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과연 이 시대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대답해 줄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이 모든 게 신앙적 사유와 관련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기초해 생각하려면,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자동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기존의 자기 생각들에 항상 합리적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진리의 말씀과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주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자세뿐만 아니라 그것을 내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직접 실천하기 위한 방향으로 깊이 숙고하고 성찰하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해 봅시다. 기독교 신앙적으로 사유한다는 것,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매우 깊은 신앙적 사유를 유발하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 질문을 던진 율법교사는 신앙적 사유에는 관심 없어 보입니다. 자기가 이미 정해 놓은 답이 있는데, 예수님이 그 답과 일치하는 대답을 내놓을 것인지 아닌지에만 관심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의도를 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역질문을 던지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너는 진정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냐? 네가 알고 있는 그 답을 한 번 내놓아 보아라.’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사실 매우 기막힌 대응이십니다. 율법교사의 그 의도를 무력화시키면서 동시에 율법교사의 왜곡된 생각을 전환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그 질문을 던지신 것이니까요.

공수가 전환되었습니다. 이제 율법교사가 예수님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감탄해 마지 않는 대답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는 교과서적인 전형적인 답을 내놓았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것은 별도의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은 대답입니다. 평소 기억하고 있던 것을 회상하여 그대로 말하면 그만인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들으시고 이렇게 대꾸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영생을 얻는 비결은 영생을 얻는 비결을 아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비결을 실천하는 데 있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서야 비로소 신앙적 사유를 시작합니다. 그저 아는 것과 아는대로 행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 이상 자기 대답 이상의 것을 덧붙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율법교사는 ‘나도 이웃을 실제로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어떻게든 인정 받아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나름 세련되고 고상한 방식으로 새로운 질문을 제기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이니이까?” 이 질문의 맹점이 무엇인지 잘 판단해 봅시다. 이 질문은 분명 실천의 중요성을 담지하고 있긴 합니다. 이웃이 누구인지 알아야 이웃을 사랑하니까요. 그러나 이 질문은 실천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알기 전까지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을 테니까요. 율법교사는 이웃에 대한 생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고생해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 율법교사의 마음속에서 이뤄지는 생각이란 따지고보면 ‘무엇이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데 유리한가?’, ‘예수님에게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어찌 해야 하나?’ 라는 이면의 감춰진 질문을 따라 작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존엄한 명령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과 무관한 생각일 뿐입니다. 질문이 달라져야 생각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생각의 방향이 달라져야 생각이 달라집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바른 생각의 중요한 특성 하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바른 생각은 지식을 지향하지 않고 실천을 지향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 지식의 확장을 지향하지 않고 변화된 삶을 지향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바른 생각은 자기 이익을 지향하지 않고 진리를 따라 사는 일을 지향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가 이웃에 대한 생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셨습니다. 우리도 고상해 보이는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진리로 변화된 삶을 회피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는 주된 생각이라는 건, 그저 무엇이 나에게 유리한지, 무엇이 나에게 이익인지, 무엇이 나에게 더 나은지만을 좇아 하는 생각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늘상 하는 생각이라는 게 과연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변화된 삶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생각의 방향과 방식을 바꾸시기 위해 비유 하나를 들려 주십니다. 이것은 생각의 내용을 바꾸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율법교사가 품고 있는 생각의 내용,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생각이야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생각의 방향과 방식에 있지요. 그 생각을 주도하는 근본 물음에 있지요. 율법교사는 어떻게 하면 자기를 더 돋보이게 할 수 있을까를 물으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를 물으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생각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기독교 신앙에 관련된 고상한 용어와 말들을 많이 입에 오르내린다고 해서, 실제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성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개념 중에 ‘영적 우회’ 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중요한 사안과 정보들을 지적으로 잘 알고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이유로 실제로는 영적 성숙의 과정과 노력을 회피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기도란 무엇인지 성서적으로 매우 정확하게 알고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적확한 말로, 고상한 언어로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도취되어 있긴 하지만 정작 하루에 10분도 채 기도하지 않는 모습을 가리켜 ‘영적 우회’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 가운데에, 교회생활에 정말 빠삭하신 분들 가운데에는 안타깝게도 실제로는 초신자보다도 그리스도와 가깝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가깝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착각이고,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너무 낯선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 뿐이고 그저 생각 뿐인 그리스도인이 곧 나는 아닌지 진실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말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까? 정말 나는 그리스도와 가까운 사람입니까?

기독교 신앙에 관해, 그리스도에 관해 바르고 정확한 생각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그 생각이 내게 어떤 효력을 미치고 있는지, 무슨 이유로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 생각으로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묻는 건 더 중요합니다.

이제 정말 예수님이 이웃에 대한 고상한 생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피하고 있는 율법교사를 깨우치시려고 들려주신 비유에 주목해 볼까요? 예수님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났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길가에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때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냥 지나쳤습니다. 제사장의 머릿속에는 율법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가득했겠지요. 제사장은 그저 제사만 집례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요.

그에게는 율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의 내용을 누구보다 적확한 언어로 잘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도울 생각은커녕 그냥 피하여 갔습니다. 이유는 뻔합니다. 정결법에 따르면 피 흘린 사람과 접촉하면 부정한 사람이 되니까요. 하지만 그 순간에 도대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의 메시지는 그 순간에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을까요?

부정에 관한 율법의 메시지와 이웃 사랑에 관한 율법의 메시지가 서로 충돌하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때 제사장이 취해야 하는 일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생각에 그냥 자기를 내어맡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생각을 전환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아무 생각이 없던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될 것이고, 제사장인 내가 부정할 순 없으니 나를 지켜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생각만 앞섰을 게 뻔합니다. 이런 메커니즘은 레위 사람에게도 똑같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거론하는 자체가 율법교사에게는 불쾌한 일일 테지요.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니까요. 쓸데 없는 편견에 지나지 않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사마리아 사람의 등장이 불쾌할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극진하게 돌봅니다. 33절을 보니 강도를 바라보는 순간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속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비의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마음속에는 이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머릿속에 자리한 율법에 대한 지식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그 쓸모 없는 생각이 자비심을 내좇았을 게 틀림 없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만약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시 묻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방식 그대로의 율법의 참된 실천에 대해 다시 숙고했다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그들 마음속 자비심에 불을 붙이는 일이 벌어져 그들이 전혀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만약 그들 마음속 사랑과 자비심을 토대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면 강도 만난 사람을 기꺼이 돕지 않았을까요? 생각이 달라지려면 생각의 토대가 달라져야 합니다. 사랑에 의해 고무된 생각이라야 차원이 다른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마무리하시며 율법교사에게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를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은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한 바른 생각을 이끌어내는 물음입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관해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지 않으시고 내가 어떻게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줄 수 있는가를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대한 개념에 관심이 있으셨던 게 아니라 하나님 명하신 이웃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진리를 얼마나 잘 아는가보다 진리를 따라 얼마나 제대로 사는가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셨습니다.

생각을 달리한다는 것은 그저 생각의 내용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의 방향을 달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의 방향을 달리하려면 일단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생각, 나도 모르게 붙잡혀 매여 있는 그 생각을 알아차리고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은 불연속적인 것입니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는 틈이 있습니다. 이 틈이 생각에 대응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 생각을 향해 ‘넌 그저 생각일 뿐이야. 사실도 진실도 진리도 아니야’ 선언하는 순간, 우리의 의식은 생각 그 자체로부터 분리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생각의 틈은 더욱 확장됩니다.

이 틈이 바로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물음과 성찰의 공간입니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는 지금 이 순간 내게 무엇을 원하실까를 물을 수 있습니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과연 그분의 말씀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길인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음은 놀랍게도 그리스도로부터 다가오는 통찰, 변화된 삶을 이끌어내는 살아있는 지혜의 통로가 됩니다.

생각의 틈 사이에서 던진 물음과 그리스도를 향한 내적 경청이 있어야 생각을 달리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진리에 기초해 온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각하고 사유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길 소망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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