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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자기만족이 아니다“너희가 나 하나님 알기를 원한다”(호세아 6:1-6)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3.09.11 00:08
▲ 예언자 호세아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또한 감사하게도 평안은 외부의 조건으로 얻어지거나 누릴 수 있지 않습니다. 평안은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 안, 내면에 거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평안은 누구나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누릴 수 있지는 않습니다. 외부의 조건, 상황에서 평안을 찾으려 하는 사람은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선이 외부가 아닌 안, 내면으로 향할 때 평안은 찾을 수 있고, 선택할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참되지 않은 것을 위해 애쓰지 않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허망하고 허탄한 것을 좇으며 살지 않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중에 목장 모임을 3년 6개월여 만에 다시 갖게 되었습니다. 감격스러운 시간이었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평소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자세히 나누면서 더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참여한 성도님들도 목장 모임을 통해 ‘아, 이분이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또는 ‘아, 이분에게 이런 아픔이 있구나, 걱정이 있구나.’ 하며 서로를 더 알게 된 시간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말씀으로 구성원 간에 신앙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천천히 이런 나눔의 시간도 늘려갈 예정입니다.

타인의 사정을 알게 된다는 건, 피곤한 일입니다. 타인의 사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를 알아가는 성도의 교제는 기독교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네 가지 활동으로 유지되고 성장한다고 여겼습니다. 바로, 케리그마(말씀), 디다케(교육), 디아코니아(봉사), 코이노니아(교제)입니다.

교회마다 강조하는 방향은 다를 수 있어도 이 중 한 가지라도 빠지면 그 교회는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하지 않게 됩니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고 이제 코로나 이전처럼 회복이 된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이 허물어졌고, 또 무엇을 다시 세워야 하는지 점검해야만 합니다.

이런 면에서 목장 모임을 오랜만에 갖게 되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 점심을 먹으며 별다른 교제 없이 빠르게 밥 먹고 흩어지는 우리 공동체의 모습을 보면서 ‘한 달에 한 번 겨우 공동체가 식사하는데, 이 소중한 시간에 이렇게 모여 밥을 먹는 게 무슨 의미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밥 한번 모여서 먹는 게 힘들었던 지난 한 달이 생각나면서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코로나가 끝나고 성도님들의 삶을 보면 모든 게 회복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교회들만 멈췄거나 후퇴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를까?’ 생각해 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목사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이상중 목사에게 있습니다. 목사가 게을러서 그렇고, 성도님들에게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아서도 그렇습니다.

만약 코로나가 끝나는 시점에서 매주 점심을 먹자고 목사가 강권했다면 성도님들은 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도 주일 오후 예배를 몇 년간 쉬면서 다시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이 매주 밥해 먹기가 힘들다고 했을 때 응했습니다.

밥 먹는 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요? 네, 중요합니다.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성도가 함께 모여 식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 자리를 통해 교제와 섬김과 봉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가 확인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목은 본문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너희가 나 하나님 알기를 원한다.” 그런데 목사는 지금까지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안다.’ 이 안다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말합니다.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고 말입니다. “1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2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이렇게 선포하며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3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4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 5 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보내어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 위에서 번개처럼 빛났다. 6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우리가 주님을 알자,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모스 4장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4 ‘너희는 베델로 몰려가서 죄를 지어라. 길갈로 들어가서 더욱더 죄를 지어라.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바치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쳐 보아라. 5 또 누룩 넣은 빵을 감사제물로 불살라 바치고, 큰소리로 알리면서 자원예물을 드려 보아라. 이스라엘 자손아, 바로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 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바치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치고, 감사제물로 불살라 바치고, 큰소리로 알리며 자원예물을 정성스럽게 드립니다. 그리곤 ‘바로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드리는 예배와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들 스스로를 만족키실 뿐 그런 예배와 제사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혹여나 우리도 이런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레미야 22장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13 불의로 궁전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으며, 동족을 고용하고도, 품삯을 주지 않는 너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14 ‘내가 살 집을 넓게 지어야지. 누각도 크게 만들어야지’ 하면서, 집에 창문을 만들어 달고, 백향목 판자로 그 집을 단장하고, 붉은 색을 칠한다. 15 네가 남보다 백향목을 더 많이 써서, 집 짓기를 경쟁한다고 해서, 네가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다. 16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네 아버지가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은지가 하나님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한 기준이 아닙니다. 삶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지가 하나님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한 기준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복음 7:21)

성경을 필사하고, 암송하고, 새벽예배를 드리고, 주일예배를 드림이 그저 우리 자신을 만족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행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행위입니까? 성경을 필사하고, 새벽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주일예배를 드리는 이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개인의 만족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나를 넘어서서 타인을 향해,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창세기 4장에서 자신의 동생을 죽인 가인은 하나님이 가인에게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하나님께 반문했습니다. 가인은 아우를 죽이는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지키는 사람이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인은 지키는 자, 보호하는 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가인이 언제 동생을 죽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까?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였습니다. 창세기 4:5-7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스스로를 만족하게 하는 예배를 가인은 드리려 했습니다. 온전한 예배자였다면 어떻습니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살피고 다시 하나님께 나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통해 가인의 삶은 달라져야 했습니다. 불의에서 의에 삶으로, 죽이는 자에서 살리는 자로 바뀌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변하지 않으려 했고, 불의한 그 자리에 계속 머물렀고 더 악해졌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매주 밥해 먹읍시다!”를 말하기 위한 설교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게을러진 우리를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

주님께로 돌아간다는 건 주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무엇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까? 사랑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작게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 가정에서 더 넓게는 지역과 세상을 향한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나 알기를 원한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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