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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원하는 건 따로 있다마음을 새롭게 하는 신앙 6(마가복음 10:46-52)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09.11 23:14
▲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Jesus heals the blind Bartimaeus」 (1877) ⓒWikimediaCommons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를 가득 부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여섯 번째 시간으로 ‘진짜 원하는 건 따로 있다’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마음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욕망의 문제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욕망하면 탐욕과 욕심과 같은 부정적인 인상을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욕망은 욕동, 욕구, 필요, 바람, 소망, 목표 등의 의미를 다 포괄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핵심은 무엇 무엇을 원하고 지향하는 마음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욕망은 한 마디로 우리 삶을 추동하는 원료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차도 기름 없이는 1미터도 움직일 수 없는 법이죠. 욕망 없는 삶은 사실 형용불가입니다. 우리 삶이 영위되는 동안 비록 그 욕망의 유형과 대상과 그걸 다루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지만, 욕망 그 자체가 멈추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정의할 때, 욕망하는 존재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우리 삶은 갖가지 욕구들의 충족과정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 매슬로우는 사람의 기본 욕구를 생존의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감의 욕구, 자기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로 분류합니다. 윌리엄 글래서는 생존의 욕구, 사랑과 소속감의 욕구, 힘의 욕구, 자유의 욕구, 즐거움의 욕구로 분류합니다. 로널드 페어베언은 사람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를 대상관계의 욕구라 말합니다. 헤겔은 삶의 가장 중요한 추동원리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꼽습니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꼽습니다. 바딤 젤라드는 삶을 자기 뜻과 바람대로 통제하고 지배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사람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로 꼽습니다. 어떻게 말하든 그 다양한 욕구들이 우리 삶에 한시도 쉼없이 작용하고 있다는 건 매우 분명해 보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흔히 직업을 이야기하거나 성격 유형을 이야기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은 우리의 욕망과 바람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우리를 가장 잘 말해줍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그것이 우리를 오늘에 이르게 했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그것이 앞으로의 우리를 만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이 그 중요성 만큼이나 위험성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우리 무의식에서 역동하는 욕동에는 삶에 대한 충동도 있지만 죽음에 대한 충동도 있음을 피력했습니다. 신앙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죄의 법에 지배당한 욕망도 있습니다. 욕망은 우리 삶의 추동 원료이지만 그 강도와 정도에 따라, 그 유형과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걸 다루는 방식에 따라 우리 삶을 참되고 아름답고 만족스런 삶으로 이끌 수도 있고, 정반대로 우리 삶을 거짓과 파멸과 결핍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욕망은 사랑으로 승화되기도 하지만, 집착으로 퇴행하기도 합니다. 욕망의 대상은 가시적인 것에 매일 수도 있지만, 비시가적인 것으로 승화될 수도 있습니다. 욕망은 채워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근원적인 것을 위해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욕망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삶의 성숙한 변화를 논할 수는 없습니다. 이 욕망의 문제와 관련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영적 교훈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눈먼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사렛 예수가 그 길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든지 주변 많은 사람이 조용히 좀 하라고 핀잔을 줄 정도였습니다. 바디매오가 목이 터져라 외친 건 그만큼 예수님의 관심과 도움이 절실했다는 의미이겠지요. 이것은 그가 지금 예수님이 아니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에 봉착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들은 모두 주님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욕망의 문제가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게 된 근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자아를 하나님의 자리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그 근원적인 욕망 때문에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 큰 간극과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이 욕망을 극복하고 넘어서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진대 이것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가능했던가요?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이 결국 수많은 형태의 우상숭배로 이어졌음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이끄시고 주도하실 때, 우리가 그 영에 순복할 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확언하고 있습니다.

목이 터져라 외친 바디매오의 소리에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욕망의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인정해야 할 매우 중요한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욕망이 떠들어대는 소리만 들을 뿐 주님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의 욕망만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욕망만 작동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갈망과 사랑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작용하는 수많은 욕망들 이면에는 하나님을 알고 찾고 구하고자 하는 영적 갈망,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과 사랑하고자하는 영적 갈망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저 물을 찾게 하는 목마름만 있는 게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에 대한 갈망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저 밥을 찾게 하는 배고픔만 있는 게 아니라 영원히 배부르게 하는 생명의 빵에 대한 갈망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저 집을 구하게 하는 안전 욕구만 있는 게 아니라 영원한 안식처에 대한 갈망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저 살아남고자 하는 생존의 욕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숭고한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갈망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저 자기 존중의 욕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면서 자기 죄를 시인하고자 하는 갈망도 있습니다. 이 영적 갈망들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이자 주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이 부르심을 알아차리는 게 우리가 가진 모든 욕망의 문제를 다루는 시작입니다.

눈먼 바디매오는 주님의 부르심에 뛸 듯이 기뻤습니다. 겉옷을 내버리고 일어나 뛰쳐 나갔습니다. 스스로를 패배자로 낙오자로 인식하면서 주저앉은 채로 그저 자신을 감추고 살았던 그가 처음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당당히 자기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저 우리 욕망만 있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불러 일으켜 주시는 영적 갈망도 있음을 깨닫고 그 영적 갈망에 반응하기 시작하면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는 자기 욕망의 좌절을 더 이상 자기 실패나 자기 불행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영적 갈망이 여타의 모든 욕망을 상대화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욕망의 일부가 좌절되었다고 해서 나라고 하는 존재의 본질이 훼손된 것은 아니라는 명확한 자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욕망에 솔직해지기 시작합니다. 욕망의 좌절보다 더 큰 문제는 욕망의 왜곡된 성취입니다. 자기 욕망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어야 그 욕망의 한계와 위험성을 경계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며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욕망을 훤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눈먼 바디매오에게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는 확고하게 대답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눈먼 사람이 눈 뜨기 원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를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질문을 던지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던지신 이 질문은 실은 영적으로 눈먼 우리에게 던지신 질문입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 욕망을 못 알아채고 있는 우리, 하나님도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떠받들며 마음을 다 준 채 우상숭배하는 우리에게 던지신 질문입니다.

자기 욕망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바디매오 이야기 바로 앞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두 이야기는 사실상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간청합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이 다시 대답합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다시 대꾸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원하는 것은 주님이 장차 오르게 될 영예롭고 명예로운 자리였습니다. 그들의 속내는 한 마디로 이렇습니다. ‘장차 주님이 왕위에 오르시면, 그 좌우편에 저희가 있게 해주세요.’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주님과 함께 있길 원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자기 영예와 명예를 원한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숨은 욕망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주님이 장차 오르실 길에 대해서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장차 오르실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곳은 지배와 군림의 자리가 아니라 섬김과 희생의 자리였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만약 주님이 오르실 자리를 제대로 알았다면 주님께 그런 요구를 했을리가 없습니다. 주님 곁에 붙어 있기나 했을까 모르겠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이름으로 영예, 명예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러므로 이들에게 중요한 영적 과제는 두 가지 중요한 진실에 눈을 뜨는 일이었습니다. 첫 번째 진실은 ‘나를 주도하고 있는 욕망은 무엇인가? 내 욕망은 무엇을 향해 있는가?’ 입니다. 두 번째 진실은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주님이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더 깊은 갈망은 무엇인가?’ 입니다. 이 두 가지 진실에 눈을 떠야 하는 상황 속에서 눈먼 바디매오 이야기가 등장한 것입니다.

바디매오에게 던진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 던진 질문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렇게 재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나에게 찾아와 영예로운 자리를 구했는데, 너희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너희는 과연 너희가 간절히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느냐” “그것이 너희 삶을 어떤 모습으로 이끌고 있는지 아느냐”

예수님께서 던지신 이 질문에 선명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만큼 우리 자신의 욕망의 문제에 둔감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욕망이 우리 삶의 갖가지 문제의 핵심이라는 진실에 눈을 뜨게 된다면, 우리는 눈먼 바디매오가 그랬듯 절실하게 주님의 자비를 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욕망을 채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문제임을 알게 되었을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사회 문화 풍토에서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질과 자격을 갖추는 일, 이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에 자신을 맞추고 사는 일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욕망을 드러내 추구하는 건 어색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잘 길들여진 욕망 이외의 욕망은 억압되거나 간과되기 일쑤였습니다.

또 하나, 우리는 수단으로서의 욕구의 대상과 목적으로서의 욕구 그 자체를 혼돈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돈을 원합니다. 돈이 필요하니까요. 실제로 돈을 쓸데가 많으니까요. 돈을 원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돈을 수단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데 있겠지요. 처음에 우리는 돈으로 삶에 필요한 무엇인가를 사고, 돈을 이용해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돈을 이용해 어떤 가치를 이루고 싶어 돈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벌고 소유하는 데 힘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돈을 수단으로 충족시키려 했던 본래적 욕구, 그 돈을 수단으로 궁극적으로 성취하려는 목적은 상실되고 돈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게 과연 진짜 돈인가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취한 욕망의 대상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돈을 예로 들었으니 돈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돈이 목적이 되어 버리면서 돈의 속성을 닮은 사람들이 출현했습니다. 모든 사물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비싼 물건은 값진 것이고 싼 물건은 볼품 없는 것으로 취급합니다. 또 돈을 닮은 사람들은 모든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임금 노동은 값진 것이고 저임금 노동은 그저 그런 것으로 취급합니다. 또 돈을 닮은 사람들은 모든 사람의 가치를 돈벌이 수준으로 환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부자에게는 허리를 숙이고 가난한 자에게는 허리를 세웁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조금만 솔직해지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욕망하는 그것의 속성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사람은 자기가 숭배하는 우상을 닮아간다’ 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간절히 바라고 무엇을 숭배했기에 오늘의 우리가 되었나요? 오늘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삶에 대한 주된 태도, 사람에 대한 주된 태도,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주된 태도는 무엇을 닮아 있습니까? 어떤 우상이 반영되어 있나요?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욕망하는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망각하게 만들 때입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사람이 돈 그 자체를 욕망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진짜로 원했던 가족의 행복은 어느새 멀어지고 가족을 불행으로 몰고갈 수 있지 않습니까? 자식의 행복을 원해서 자식에게 좋은 대학 진학을 요구했던 부모가 좋은 대학 진학 그 자체를 욕망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자식의 행복은 어느새 멀어지고 자식을 불행으로 몰고갈 수 있지 않습니까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택했던 그 욕망의 대상들이 도리어 우리를 큰 함정에 빠뜨린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택했던 그 욕망의 대상들이 도리어 우리에게 더 큰 결핍감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라는 소설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돈과 물질을 예배한다면, 즉 거기에 삶의 참 의미를 둔다면 당신은 절대로 충분히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절대로 충분히 가졌다고 느끼지 못할 겁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여러분의 몸과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예배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언제나 추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보다 더 궁극적인 문제가 또 있습니다. 우리가 욕망하고 우상숭배하는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원하는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나요? 하나님을 불필요하게 만드나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만드나요? 멀어지게 만드나요? 하나님으로 만족하게 하나요? 하나님에 대해 불만족스럽게 만드나요?

우리 이제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볼까요? 우리는 무엇을 원합니까? 혹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눈먼 바디매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욕망의 문제로부터 자유하려면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신 주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도 아닌 것을 숭배하는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그걸 숭배하는 삶의 습관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욕망은 사실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가 속한 이 세상으로부터 길들여진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망은 돈버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는 삶의 전략을 반복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을 전향하려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습관이 되고 체질이 되고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배를 비롯한 각종 영적 의례와 영적 실천을 반복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욕망의 충족이나 성취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원합니다. 욕망에 매어 있지 않을 자유, 욕망의 대상을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전향할 자유, 욕망의 대상을 우상숭배하지 않을 자유, 욕망을 충족하기도 할 줄 알고, 내려놓기도 할 줄 아는 자유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시는 영적 갈망에 눈을 뜨고 주님을 예배함으로부터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우리 삶의 갖가지 욕망들을 더욱 참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의 동력으로 삼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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