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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두워져만 가는가세상의 빛(예레미야 10,6-11; 요한복음 1,8-14)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3.09.14 02:08
▲ Detail on stained glass depicting Jesus: 「I am the light of the world」, Bantry, Ireland ⓒWikipedia

근래에 종교의식과 관련하여 두 개의 조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종교에 대한 호감도 조사였고, 다른 하나는 종교에 대한 관심 조사였습니다. 결과는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개신교에 대한 호감은 6%대로 무속을 제외하면 다른 종교들과 현격한 차이로 꼴찌였고, 종교에 대한 관심은 무관심이 60%를 넘습니다.

이들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개신교는 60년대 이후 오랫동안 계속되고 반복된 그들의 반사회적인 행태들과 권력과의 야합이 사람들을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종교를 갖지 않게 된 것은 초월에 대한 무관심과 그로 인한 종교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입니다. 여기에는 종교인들의 반사회적 행위들도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시대적 문제에 소홀한 종교는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고, 반사회적 행태를 보이는 종교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제 길을 제대로 가지 않는 종교가 사람들의 호감을 살 리가 없습니다. 제 길이란 종교 자체와 사람들이 모두 마땅하다고 공통으로 인식하는 길입니다.

삶과 사회에 바른 길과 미래에 대한 비젼을 제시하는 것이 종교에 부과된 최소한의 과제입니다. 그 과제에 충실하다면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종교 특히 개신교에 대한 혐오로 전개되지는 않고 오히려 종교는 그래야지 하는 인정과 아울러 일정 정도의 역할을 기대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에 대한 무관심에 기여하는 것은 종교의 무책임하고 반사회적인 태도만은 아닙니다. 과학의 진전도 큰 몫을 차지합니다. 초월적 신비와 활동이 과학적 탐구로 바뀌고 이로 인한 신비의 해체가 초월적 세계에 대한 무관심 내지 부정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현상과 일들이 인간에 의해 설명된다 해도 존재 자체는 여전히 인간의 경험 밖의 일입니다.

그리고 되어가는 일들의 미래는 많은 경우 인간의 예상과 계산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은 그 사이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해도 여전히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이 인간의 존재 의미를 약화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과학이 그러한 인간의 존재 의미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그의 성취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는 그의 존재 자체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 자신이 그 의미의  토대일 수는 없습니다. 그 의미는 창조에서 비롯됩니다.

한계 속의 인간은 그 한계를 인식하면 이를 넘어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에덴 동산 이야기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됩니다. 창조된 인간은 인식과 생명 두 차원에서 제한된 존재입니다. 인식의 한계를 알게 된 순간 사람은 금지 명령으로 설정된 경계를 넘어섰고, 생명을 포함한 자연적 지리적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해왔고, 그 노력의 자취가 지금까지의 역사이고 과학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점에서는 문제였고 걸림돌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어떤 분일까요? 인간의 삶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하나님, 인간의 역사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가시려는 하나님, 인간의 선택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축복과 저주가 그 앞에 있음을 보여주시는 하나님, 인간에게 거부당하고 부정되기도 하면서 인간과 그가 사는 세계를 긍정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는 어떤 하나님인가요?

예레미야는 하나님에 대해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면 비록 신적 존재일지라도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만들고 꾸미고 형상화하는 우상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창조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이시고 모든 것들의 끝이 되시는 이가 창조주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사람은, 창조주와 관계를 계속 갖지 않는다면, 그와 세계를 있게 한 창조주를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부모와 관계를 계속 갖지 않는다면, 그가 자기 부모들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시고 세계를 보존하며 세계가 생명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이 삶과 역사의 근원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부분적이나 인식할 수 있는 ‘숨은 감각’(冥感)을 주셨습니다(전 3,11).

이 능력으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을지라도 세계에서 하나님의 자취와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에 감동하고 하나님을 외경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 신비를 설명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이 노력으로 쌓인 결과가 현재의 과학과 기술입니다.

그러면 이로써 하나님의 신비가 사라지는 것일까요? 유명화가의 그림을 평론가들은 구석까지 하나하나 다 설명할 수 있고 화법 하나하나를 다 밝혀내고 또 AI를 이용해 그 그림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재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그림의 가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그 그림을 그린 이의 이름도 결코 훼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비인 이 세계에 대한 설명도 그 결과의 이용도 이와 다르지 않을텐데, 실상은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는 존재인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게 하며 동시에 그 한계를 궁극적으로 돌파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해방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을 역사적 자연적 한계에 가둬두고 그것에 만족하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모든 굴레를 부수고 정의와 자유와 평화의  땅으로 이끌어내시고 인간의 존재 의미를 인정하고 높이시며 존재론적 한계 마저 넘어서게 하시려는 하나님입니다.

한계 속에 갇힌 사람들, 사회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굴레 속에 갇힌 사람들, 영적 멍에에 짓눌린 사람들, 그들을 품고 신음하는 자연, 이렇게 사중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어둠 속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빛이 있을까요? 인간 스스로 자신의 빛이 되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그렇다고 대답할 지 모르겠습니다. 과학이 그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겠습니다. 초월세계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지금을 결코 어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처럼 이러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세상은 어둠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사람이 되게 하심으로 어둠에 빛을 비추고자 하셨습니다. 세상이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해도 그 빛은 어둠 속에서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빛이 어둠에 삼킨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그 빛을 다시 살리셨고 그 빛은 빛의 영역을 확대하며 오늘 우리에게까지 비치고 있습니다.

그 빛이 통계자료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들의 잘못과 허물로 가려지지 않기를 빕니다. 창조의 빛이 미래에서 비쳐오도록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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