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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기도도 있다마음을 새롭게 하는 신앙 7(시편 131:1-3)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09.18 22:39
▲ 일방적으로 내뱉는 기도에서 차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로 필요하다. ⓒGetty Images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는 크신 위로와 평화를, 큰 고통당한 우리의 이웃에게는 자비와 은총을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듣는 기도도 있다’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으라’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말합니다.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지만, 제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으려면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제 마음으로 흠모해야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것 아니던가요? 그리스도를 제 마음 다해 사랑해야 그분의 마음을 닮아갈 수 있는 것 아니던가요?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을 닮게한다는 건 누구나 이미 경험하고 있는 진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마음 중심에 품어야 내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어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내 마음 중심에 품는 일, 이게 바로 기도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 되게 하는 일, 이게 바로 기도의 마지막입니다. 기도는 처음과 나중을 온전히 주님과 함께하기로 작정한 그리스도인의 기본 생활 양식입니다. 기도 그 자체가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가식이 아니라 실제임을, 허상이 아니라 실상임을 보여주는 핵심증거입니다. 대화 한 마디 오고 가지 않는 사람을 친구라 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 기도 한 마디 하지 않는데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 말할 순 없습니다.

기도는 항상 그리스도를 제 마음 중심에 품는 일로 시작됩니다. 기도는 허공에 내뱉는 빈말도 아니고 미사여구도 아니며 중언부언도 아닙니다. 기도에 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회상해 봅시다. 마태복음 6장 5-8절에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 남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중언부언하지도 말며,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기도에 빠진 건 무엇입니까?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진심어린 지향성입니다. 그 기도에는 남들 눈에 좋아 보이는 자기모습에 대한 도취감만 있을 뿐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빠진 건 무엇입니까?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깊은 지향성이 빠져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런 기도들은 하나님을 제 마음의 흠모의 대상으로 지향하지 않은채 내뱉는 빈말 잔치들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만큼 가까이 여기고 가까이 해야 비로소 기도가 시작된다는 의미이겠지요. 하나님을 가깝게 여기고 가까이한다는 건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알고 있고 온전히 받아들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 흔히 이런 말들 하지요. “아이들은 누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귀신 같이 알아챈다.” 가까이해도 될만한 사람인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가까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하나님 사랑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일로 시작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기도는 주님의 이 말씀에 대한 응답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을 의심하면서 기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잠시 우리의 기도생활을 되돌아봅시다. 기도가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도, 잘 안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도하는 법을 몰라서인가요? 바쁘고 피곤해서인가요? 딱히 기도할 꺼리가 없어서인가요? 아니면 기도해봐야 소용이 없어서인가요? 혹시 주님께 이런 것까지 구하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드시나요? 주님께서 이런 것까지 들어주실 리가 없다고 판단해 기도에서 손 떼는 것은 아닌가요?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는 건 아닐까요? 주님이 도무지 그렇게 편하고 가깝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요? 한 마디로 주님과 친하다는 생각과 느낌이 없어서 아닌가요?

친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떠올려 보십시오. 쓸모 있는 말들만 오고 가던가요? 말을 가려하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시나요? 말해 봐야 소용없는 것들은 아예 꺼내놓지도 않으시나요? 들어줄만한 말만 골라 하시나요? 무시당할까 봐 불안해하며 말 하시나요? 아니지요. 친한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닙니다. 그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진심어린 마음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그 대화는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믿어주고, 서로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확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날 향한 그의 사랑을 신뢰하는 그 마음 하나 의지해서 그저 아무 말이나 그에게 건네면 그는 그 아무 말에 고개도 끄덕여주고 호응도 해줍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그의 사랑을 재확인합니다. 그렇게 대화 중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하면서 나와 그의 관계는 한 차원 더 깊어지고 나와 그의 대화도 한 차원 더 깊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회피하는 이런저런 이유는 사실 하나님과 그리 편한 사이는 아니라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관계를 회피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기도는 날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진심을 알아주고 그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 사랑을 신뢰하고 그 사랑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 사랑을 바라보는 데서 기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두실 리가 있나,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실 리가 있나 의심하는 한 앞으로도 기도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라도 사랑하시는 게 하나님이시지라고 믿어야 기도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가 문제해결과 개인적 성취를 위해서만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도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잘 안 되면, 무슨 내용으로 기도할까에 너무 관심을 두지 마시고, 무슨 내용이든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기도를 시작해 보십시오. 시도 때도 없이, 이유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대 보세요. 제 두 아들이 그렇게 엄마를 불러댑니다. 두 아들이 번갈아 가면서 쉴 틈 없이 귀가 따갑도록 엄마를 불러댑니다. 제 아내가 어떤 때는 힘들어 이렇게 대꾸합니다. “왜 엄마만 불러 아빠도 옆에 있잖아.” 제가 그 아이들 엄마를 왜 그렇게 불러대나 가만히 지켜보면 그냥 자기 이야기 들어달라고, 나 좀 봐 달라고 불러대는 것입니다. 사실은 엄마의 사랑을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기도의 본질을 꿰뚫은 비유를 전해 줍니다. 기도는 젖 뗀 아이가 그의 엄마 품에 있음 같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엄마의 사랑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아이가 엄마와 눈이 마주치길 기대하면서 엄마를 바라보며 엄마를 불러댑니다. 젖 뗀 아이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겠어요? 별로 할 말도 없고 할 줄 아는 말도 없지만 적어도 ‘엄마’는 부를 줄 알거든요. 그리고 그 한 마디면 엄마의 뜨거운 사랑의 반응을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거든요. 엄마는 ‘엄마’ 하고 부르는 그 한 마디로 때문에 곧장 반응하시거든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대는 일입니다. 별 내용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유치해도 괜찮습니다. 속물적이어도 괜찮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들어줄 리가 없는 말이라도 괜찮습니다. 일단 무슨 말을 해도 사랑으로 응해 주실 분이라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이름을 자꾸 불러 보십시오. 그게 기도의 시작입니다.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내게 가까이 계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느끼고 경험하고 확인하는 일에 집중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사랑이 재차 확인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는 나도 모르는 사이 더 친밀해집니다. 그만큼 기도는 더 쉬워집니다. 기도의 횟수도 증가할 뿐만 아니라 기도의 깊이도 깊어집니다.

한창 신학공부에 에너지를 집중했던 20대에 제가 제일 자주 드렸던 기도는 이 한 마디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죄인인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이 기도를 하나님께 깨어 있는 마음가짐으로, 주의를 기울여 하나님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반복하여 드렸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당시 제게 신학공부는 양면적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보와 생각들이 확장되면서 오히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피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머리는 커지는데 가슴은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신학책은 많이 읽는데 오히려 하나님은 더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하나님의 사랑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랬는지 돌이켜보니, 과거 어린 시절, 엄마를 찾듯 그렇게 하나님을 찾았던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제게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었던 생생한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엄마의 사랑 하나만 믿고 그 사랑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심정으로 엄마를 부르듯 그렇게 저도 주님 이름 부르는 것을 기도줄로 삼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죄인인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홀로 길을 걸을 때에도, 홀로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탈 때에도, 생각이 복잡할 때에도, 마음이 불안할 때에도 그냥 엄마 불러대듯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물론 응답을 기대하면서요.

제가 즐겨 드렸던 그 기도는 정리되지 못한 복잡한 생각으로부터 내적으로 제가 거리를 둘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동시에 불안하고 정돈되지 못한 마음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심리적 효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도가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하게 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이 변함없는 사실에 더 집중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기도 중에 어떻게 제게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셨냐 하면, 평온한 마음으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의 고백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 아이는 영혼의 고요함과 평온함을 깊게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영혼의 고요함과 평온함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의 신호로 인식됩니다. 제 체험이기도 합니다. 영혼의 고요함과 평온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재확인하면 할수록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이 가슴 깊이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노리치의 줄리안이 한 말입니다. “주의 사랑에 거할 때 결국 모든 것이 모든 면에서 다 잘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 허락하시는 영혼의 고요함과 평온함은 내가 하나님과 뗄래야 뗄 수 없게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 들게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안전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안심이 된다’는 정서적 안녕감을 경험하게 합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함은 초연한 마음가짐을 갖게 합니다. 초연함은 무슨 일에도 쉽게 동요하거나 휩쓸리지 않고 차분히 중심을 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서적 안녕감과 초연한 마음가짐이 생긴다는 건 하나님께서 기도 중에 우리에게 임재하시어 역사하신다는 분명한 사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사람을 대면하여 보는 것과 같은 그런 경험이 아니라 영혼의 고요함과 평온함으로 이어지는 체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한 오라기라도 남아 있다면 그 믿음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지향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면, 하나님은 반드시 반응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한 내용 그대로를 이루어주셨느냐 그렇지 않느냐에만 관심을 두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도하는 우리의 존재와 심령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기도의 내용의 성취 여부만 따지고 들자면 하나님은 때로 거절의 형식을 취하실 수도 있고, 무응답의 형식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야속하고 회의가 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사랑으로 반응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을 깊이 신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방식으로 반응하십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소원과 바람대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셔도 계속 기도하게 되는 역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나님은 내 모든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고백도 가능하겠지요. 어떻게 입증하냐구요?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게 결코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체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기도가 깊어진다는 것은 사실 기도의 내용이 성숙해지는 데 방점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더 잘 알아차라는 데 방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랑의 방법으로 내게 응답하시는지를 잘 알아차리는 데 방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알아차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를 드린 후에 하나님의 반응을 알아차리며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한 방편으로 받아들이는 게 듣는 기도입니다.

듣는 기도와 관련해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를 내 소원 성취의 도구로만 활용하는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소원과 계획 그대로 성취해 주시길 바라는 건 이해할만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그래야 된다고 고집을 피우는 건 경계해야 합니다. 혹시 그 고집스러움에 내 소원과 계획 그대로 이루어주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날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겠습니다 하는 교만한 생각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왜 그런 가정이 교만한 생각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제 뜻대로 통제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통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를 더 깊이 알고 수용하는 통로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시편 기자는 교만을 경계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참된 기도에는 교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원을 아뢰되, 그것이 하나님을 제 뜻대로 통제하려는 교만이 되지 않게 하려면, 그 소원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시든,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모든 방식을 수용하게 해달라는 기도도 함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해달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런 기도는 평소에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초점으로 하는 기도에 충실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만 드리는 기도에도 충실해야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소원 기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신뢰하는 마음으로 드린 기도라면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거절하실지라도 하나님 사랑은 거절할 수 없도록 관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듣는 기도와 관련해 꼭 참고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1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기도는 멈추는 과정을 수반합니다. 하던 일을 온전히 멈추어야 합니다. 하던 일에 열심인 것은 좋은데, 그 일이 내 인생을 결정짓는 핵심이라고 여기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교만일 수 있습니다. ‘내 행동과 노력이 내 인생을 좌우한다.’ 이 생각이 작용하고 있는 것일 수 있으니까요. 이런 생각 없이 어떻게 최선을 다해 라고 되물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이 결국 나를 교만하게도 하고,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게도 한다는 진실도 함께 고려해 보아야겠지요.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할 때 만큼은 일체의 교만을 경계해야 하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심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이 뜻과 주님이 행하시는 일에 달려 있습니다’라는 심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이나 방법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느냐, 그 사랑에 나도 사랑으로 응수하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거하기로 선택하며 기도를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우리의 처지와 상황에 맞도록 최적화된 방식으로 변형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보다 집중한다면, 기도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가 우리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다면, 하나님과의 사랑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의 마음과 성품을 더 닮아 있을 것입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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