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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초대에 응하다하나님 나라를 살다 1(마태복음 4:23-24)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09.26 00:41
▲ 예루살렘 성의 좁은 문 ⓒGetty Images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부터 7주간 ‘하나님 나라를 살다’라는 주제로 말씀 증언하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 나라 초대에 응하다’ 이런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좋은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그 좋은 삶에 대한 전망이 누구에게나 다 그렇게 또렷한 건 아닙니다. 좋은 삶을 원하긴 하는데 그 좋은 삶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나는 도대체 어떤 삶을 원하는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에 대한 비전과 청사진이 불분명하면 우리 삶은 어떤 한 지점에 표류하거나 제자리를 빙빙 맴돌 수 있겠지요. 그냥 ‘남들이 좋다’ 하는 삶을 좇아가느라 분주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삶의 겉모습을 흉내내기 하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면과 내면에 대해선 제대로 알 수 없으니 흉내내기 전략은 더 큰 불만과 좌절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불행하다 여기는 이유 중 상당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삶의 겉모습에 매료되어 그 겉모습과 자기 삶을 비교하고 부정하고 심지어는 저주하기 때문에 우리가 괴롭고 불행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치렀고  치르고 있는지, 그들이 실제로 내적으로 느끼는 바가 무엇인지, 그들이 기울인 노력이 무엇인지, 그들이 터득한 삶의 지혜와 철학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이해는 결여한 채, 진짜로 취해야 할 실천들은 간과한 채 그들 삶의 겉모습으로만 내 삶을 비추어 보기 때문에 우리가 불행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삶에 대한 또렷한 청사진이 없으면 순간 순간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급급하거나 그 문제들이 초래한 삶의 고통과 괴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일에만 힘쓰고 살 수 있습니다. 이 문제 하나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 채 다 해결하기 전에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게 인생인데, 문제해결식 삶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으면 문제 없는 삶이 곧 좋은 삶이라 여기고 갖가지 문제들에 치여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잘하고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있기 마련인데, 그 문제들 때문에 내 삶은 불행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좋은 삶은 과연 어떤 삶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삶으로 부르셨고, 어떤 삶으로 이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시고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의 안에 거하여 살라 명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게 가장 좋은 삶이라 확언합니다.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무엇보다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시고 이끌어 주신 은혜입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입니다. 여기에서 천국은 하늘나라의 한자식 표현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를 뜻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그래서 동일한 메시지를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태복음은 하나님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것을 꺼리는 당시 유대인의 관례를 따라 ‘하나님’ 을 그저 ‘하늘’ 로 바꿔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바꿔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서 하늘은 고대 왕국들의 왕의 보좌와 같이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시기 위해 머물러 계시는 곳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땅을 거닐기도 하십니다. 창세기 3장 8절을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벗은 몸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던 그 순간 하나님께서 등장하실 때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거니셨습니다. 물론 불순종으로 인해 사람은 에덴동산에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특별한 공간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성막 또는 성전입니다. 성막은 출애굽 광야시절에 만들어진 성소를 말하고, 성전은 그 성막을 토대로 예루살렘에 건축한 성소를 말합니다. 성막 또는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입니다. 곧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자 이 땅에서 하나님이 거니시는 구별된 장소입니다. 지성소에 위치한 법궤의 뚜껑 역할을 하고 있는 속죄소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 속죄소로 임재하십니다. 성소에 위치한 촛대는 하나님의 임재의 빛을 상징하고, 떡상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인도하심의 빛 아래에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이 성막 또는 성전이 이제는 예수 믿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정리하자면, 천국 곧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 또는 죽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다스리시는 나라를 가리킵니다. 이때 ‘나라’ 도 특정한 물리적 공간, 또는 초월적 공간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미치는 모든 영역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미치지 못할 영역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도 땅도, 삶도 죽음도, 형이상학적 세계도 물리적 세계도, 우리의 몸도 마음도, 모두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늘나라를 자꾸 죽어서 들어가는 초월적 세계로서의 하늘에 있는 나라로만 제한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를 예수님은 ‘낙원’이라고 구분지어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열혈당원 한 사람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던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외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포하신 하늘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 하늘에 계시지만 이 땅, 이 땅에 사는 우리를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방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이 땅을 친히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확인되는 바대로 하나님은 율법을 매개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려 하셨고, 율법에 순종하는 왕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려 하셨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이 불순종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아 통치를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 이 땅을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 복음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을 말합니다. 메시아를 고대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과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보게 되었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나라로 초대받았습니다. 이제 그 초대에 응하여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 나라를 살면 직접 살면 될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 성취하시고 보여주신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했던 모습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다윗 왕국의 영예를 되살리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취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그와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현실정치체제로서의 국가와는 차원이 다른 나라를 구현하시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현실정치체제로서의 국가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하나님과 단절된 채 어둠 속에 살지만 앞으로는 당신의 인격과 가르침과 삶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여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참된 삶, 좋은 삶을 누리게 될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로 오신 것도 아니고 로마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로 오셨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회복될 하나님의 나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거룩한 나라가 되게 하시려고 그 사람에게로 오셨습니다. 곧 우리에게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통치에 주목해야지, 로마제국의 흥망성쇠,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국가의 흥망성쇠에 주목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통치는 어떻습니까? 제국의 현실정치체제에 만연해 있는 힘과 권력과 폭력을 통한 통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역행하는 통치였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주요 활동 무대를 봅시다. 유대의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갈릴리 지역입니다. 그렇다고 갈릴리 지역을 대표하는 셉포리스와 티베리아스와 같은 큰 도시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주요 활동 무대는 한 마디로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의 중심이 아니라 유대의 바깥, 세속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 유대의 중심 예루살렘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온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난 때문에, 질병 때문에, 장애 때문에, 절망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율법을 범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죄인이라 낙인 찍혔고 유대 바깥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배척하신 게 아니라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치유가 있고 회복이 있고 좋은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잘 정비된 도로를 따라 무역업으로 부유했던 도시들이 즐비했던 세속의 중심 역시 하나님의 나라와는 먼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세속의 이데올로기와 풍습, 유행에 가장 깊게 물들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부와 사치와 쾌락이 미덕인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가난은 저주였고, 질병과 장애를 안고 있다는 건 사용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으며, 실패는 무능과 자격없음을 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저런 이유들로 세속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난 채 사람다움과 살맛나는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로 오셨습니다. 그들을 밀쳐내신 게 아니라 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유대의 중심, 세속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변방이고, 유대의 바깥, 세속의 변두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중심입니다. 그래서 유대의 중심, 세속의 중심은 그 나라를 오히려 거부했습니다. 유대의 바깥, 세속의 변두리가 그 나라를 오히려 환영했습니다. 당대의 엘리트, 지도자들, 상류계급,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하였지만, 당대의 죄인들, 소외된 자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은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님 나라를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제자들에게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역설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어부였습니다. 혁명적 전사도 아니었고, 정치가도 아니었습니다. 대단한 지식인들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세속적으로 별로 움켜쥔 것도, 집착하고 있었던 것도, 깊이 빠져있던 이데올로기도 없었던 사람들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 전적으로 예수님을 좇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응답할 차례입니다. 예수님의 선포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가까이에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삶을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전향하려는 결단과 의지와 행동을 보이면 그 나라는 이미 그에게 있습니다. 그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그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실 때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소재들을 사용해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셨습니다. 빵 장수 야곱이라는 책을 쓴 노아 벤샤는 기적은 일상을 비범하게 바라보고 경험하는 것이라 정의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 일상을 뛰어넘는 것들이 있음을 인식하는 순간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3절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런 의미일 터입니다. “주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게 쉽지 않은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 물음에 무엇이라 대답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3장 24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초대에 응하는 일을 좁은 문을 통과하는 일로 비유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선 찾는 이가 적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심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찾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에 대한 최우선적 관심이 그 나라를 사는 기초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와 함께 회개를 요청하신 것입니다.

회개는 죄책 고백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왕국으로의 총체적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함으로 내가 이룬 왕국에서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삶으로부터 왕 되신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순응하는 삶으로 그 관심과 방향을 전환하는 게 회개입니다. 세상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만든 자기 왕국에 적합한 정체성, 마음가짐, 삶의 태도, 삶의 방식이 있고,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정체성, 마음가짐, 삶의 태도, 삶의 방식이 있으니, 회개는 단번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훈련과 실천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 비유는 들어가기도 쉽지 않다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큰 문은 의식하지 않고도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좁은 문은 문 틀의 규모와 모양을 의식하면서 주의를 기울여 통과해야 합니다. 좁은 문은 사실 까다로운 출입조건을 상징합니다. 공항처럼 보안이 철저한 곳에 출입한 경험을 떠올려 보십시오. 준비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신분증을 챙기지 못하면 애써 찾아온 걸음을 다시 되돌려야 합니다. 내 소지품들을 점검해야 합니다.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방문 목적도 명확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의 초대에 응하려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관심의 초점을 모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떻게 평가받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나라로 들어가려면 내가 막연하게 동경하던 세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게 어떤 세계를 보여주셨는지에 더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이력서, 학위증명서, 자격증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사랑,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갈구, 예수님의 삶에 대한 열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로 향한 문을 통과하려면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심은 불필요하지만 진정으로 좋은 삶이 무엇일까에 대한 탐구심은 필수적입니다. 욕망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집착은 불필요하지만, 진정으로 욕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성찰심은 필수적입니다. 돈, 권력, 지위, 명성과 같은 삶의 수단에 대한 탐심은 불필요하지만, 감사와 기쁨, 자유와 평화, 친밀한 관계와 자비와 같은 삶의 진정한 만족에 대한 갈망은 필수적입니다.

좁은 문 비유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향한 문이 여기 내게 가까이 있음이 깨달아질 때, 즉시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그 문이 여기 내게 가까이 있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갑자기 마음속에 떠오를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나의 한계를 자각할 때, 내가 택한 삶의 전략들이 무용하다는 생각이 들 때,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 뭔가 변화의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 뭔가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때, 도무지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올 때, 혼자라고 느껴질 때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하는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로 통하는 문이 거기 있음을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즉시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즉시 기도의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경청의 마음가짐을 취해야 합니다. 순종의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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