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사만으로는 가정 경제를 이루는 것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정아롬

농사의 시작은 매우 미약했다. 다행히 알음알음으로 빌린 밭 300평에서 농사의 걸음마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집에서 차로 15분 정도의 거리이지만 가족의 손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밭이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먹을거리는 자급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삽으로 밭이랑을 만들고 여러 가지 작물을 심었다. 거리는 멀지만 대신 밭에 가면 소풍을 온 듯 했다.

농사 첫 해, 초보 농부의 풀 관리 실패에다 가뭄까지 더해 손에 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농사짓는다는 낭만에서 오는 즐거움은 충분했지만 가정 경제까지 충만해지려면 한참 모자랐다. 밭에서 나오는 수확물은 팔 정도의 양이 전혀 되지 않았다. 농자재비, 아이 어린이집 보육비, 기름값, 생활비 등 돈이 들어갈 곳은 꽤 많았다. 농사 이외에 지갑을 채울 방도를 찾아야했다. 그래서 문을 두드렸던 곳은 가까운 인력사무소였다.

사무실에 모인 사람들의 연령은 평균 60대였다. 다양한 분들과 이야기하며 왜 일용직노동을 하게 되었는지, 전에는 어떤 일을 하였는지 알게 되었다. 공장을 운영했던 사장님이었다가 폐업하고 일하시는 분, 교도소를 퇴소하고 사회적응기에 인력으로 일하시는 분, 목회하시며 일하시는 분, 근로 비자를 얻어 들어온 몽골 분 등 다양했다.

작약 농사를 짓는 농민도 만났다. 작약은 한번 심으면 수확하기까지 최소 3년 정도는 걸린다고 한다. 그래서 풀 관리하는 시기 외에는 인력사무소로 출근 한다고 하셨다. 작약을 캐는 날, 우리 인력 사무소  사람들이 다 그 작약 작업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아저씨는 같은 사무소 사람들이 일을 한다고 특별히 더 잘 챙겨주셨다. 몇 년을 기다리다 드디어 수확하는 날이 온 것이라 그런지 매우 좋아하셨다.

작약 농민이 수확을 기다리는 동안 농사 외의 현장에서 돈을 버는 이런 일이 농민의 ‘다중경제활동’이라는 농촌경제용어와 연관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다중경제활동’은 농민이 농사를 지속하기 위해서 하는 농사 외의 경제적인 활동들을 말한다. 나는 일용직을 하며 작약농장이나 공장철거 같은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사무실분들이 가기 꺼려하는 전통기와를 만드는(제와) 곳을 가게 되었다. 그렇게 문화재 수리와 관련된 일을 4년 정도 계속하게 되었다. 제와장에서 함께 일한 분들 중에는 귀농하신 분들이 많았다. 농사를 짓기 위해 농촌으로 왔지만 생계를 위해서는 다른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농부라고 하면 농사만 짓는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 대부분의 직업이라는 게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형태다 보니 그렇다. 그렇지만 실제로 농촌에 와서 보면 이렇게 농사를 지으며 ‘다중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작약 농사를 지었던 아저씨처럼 농사 외에 건축, 축사운영, 공공근로 등 다른 일을 겸하기 일쑤다. 가장 간단한 이유는 농사로만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령, 벼농사를 짓는 환경을 보자. 쌀가격은 15년 전보다 못하다. 농지임대료와 농자재 가격은 해마다 오른다. 결국 쌀을 팔아도 손에 남는 게 거의 없다. 하지만 농부는 농사를 짓기 위해 농자재 비용을 줄이거나 다른 노동을 선택하여 메꾸면서 까지 노력한다. 이를 ‘이중 쥐어짜기’라고 한다. 쥐어짜면서 생계를 이어 나가기 위한 선택으로 다양한 경제활동을 농사와 겸하는 것이다. 이런 다중경제활동은 농민이 처한 상황이자 동시에 이런 상황을 타계하는 방도이기도 하다. 나는 제와 일을 하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내가 제와 일을 겸하여 농사를 지었던 것처럼 아내도 ‘다중경제활동’을 했다. 농사를 지으며 일주일에 이틀을 팝업 식당을 운영했었다. 식당을 열지 않을 때는 우리가 농사지은 밀로 빵을 구워 마을 가게와 장에서 팔았다. 이런 다양한 경제활동은 농가를 유지하기 위한 좋은 경제적 기반이 된다.

또한 이것은 농가 차원을 넘어 농촌사회 환경에도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아내가 연 식당에서는 이웃 소농들이 직접 생산한 농산물을 식재료로 사용했다. 식당에서는 좋은 재료를 얻을 수 있고 소농들은 판로가 생긴 것이다. 운치 있는 분위기의 고택을 빌려 운영했는데 이 지역에서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음식들을 믿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 방문한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농민들의 다양한 활동은 여러 형태의 시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여는 지역의 마을 가게와 대안 장터가 좋은 예다. 논밭에서 막 거둔 농작물 뿐 아니라 집에서 만든 빗자루, 반찬, 맥주, 막걸리, 두부 등 다양한 물건을 만날 수 있다. ‘둥지형 시장’이라고도 부르는 이런 시장에서는 상품의 가치와 가격도 스스로 정한다.

많은 돈을 버는 구조는 아니지만 적은 이익과 함께 즐거움과 관계가 언제나 형성된다. 시골에 정착할 때 꼭 필요한 빈집 현황이나 농지 매물 같은 정보를 공유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장흥읍의 마을가게, 용산면 마실장, 해남의 해방장, 벌교의 풀풀장, 완도의 장보고웃장, 광주의 한새봉 개굴장, 또 지구농 장터 등이 열린다. 멀리 서울의 마르쉐도 이런 공간이라고 들었다.

일본에서 시작된 반농반X라는 말이 있다. 농사의 규모와 방법은 자급을 위한 수준으로 짓고  남는 시간에는 다른 여러 활동들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농사를 짓는 것과 별개로 자신이 가진 재능과 끼를 지속하기도 하고 농사와 연결된 다양한 활동을 수반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농촌사회의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본다.

내가 사는 곳에 20대 청년이 귀농을 했다. 두레로 벼농사도 함께 지었었다. 그는 개인 음향 장비를 갖추고 있고 기술도 있다. 지역에는 음향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이 드물었고 행사가 있을 때 다른 지역에서 음향팀을 섭외하고 싶어도 큰 규모가 아니면 오지 않는다. 지역의 대안장터나 문화제, 영화 상영 등 음향이 필요한 작은 행사에서 이 청년을 발견했을 때 그 빛이 얼마나 귀했는지 모른다.

농촌사회는 농업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농사와 연결된 활동과 그 외의 다양한 활동은 농가의 경제를 유지하는 것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흐름을 풍성하게 만든다.

유대은(기장 총회사회선교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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