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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됨을 이루어 가다하나님 나라를 살다 2(마태복음 5:3)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10.10 03:33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부어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다’ 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사람됨을 이루어 가다’ 이런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받았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우선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의하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이자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입니다. 이건 우리 스스로도 정체성을 달리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무개의 아들딸로 태어났으니 아무개의 아들딸로만 알고 살았지만, 우리 자신을 그저 생물학적 유전자의 산물로, 우리가 속한 사회문화적 산물로만 여겼지만,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된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의 피조성을 전제로 합니다. 사람이 이것을 망각하거나 부정하는 순간 타락이 일어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할 때, 그걸 부추기고 유혹하려고 뱀이 했던 말을 상기해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는 사실 선악과를 취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말에 현혹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의 위치에 서고자 했던 것이 원죄입니다. 원죄는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망각하거나 부정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데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호흡을 지속하고 의식의 빛을 밝혀 사는 내내 하나님의 은혜가 쉼없이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존재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존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가 여기 이렇게 있다. 나는 나다’ 라고 자기 존재를 의식하고 그것을 신비롭게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순간 순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속에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온전한 자기가 되며 참되고 좋은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인식하고, 부모의 공감적 반응 속에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듯, 우리는 하나님을 마주대하는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겉으로 드러난 개별적 특성을 넘어서 우리 자신의 본질적 특성을 발견하고 그에 부합되는 참되고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살맛나는 삶이 참된 자기에 대한 인식, 실현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건 두 말할 필요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는 내가 너와 외형적으로, 사회적 시선을 기준으로 어떻게 다른가를 중시하는 시대입니다. 외형적 독특성, 차별화된 이미지, 개성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동시에 누가 더 우월하고 탁월한가를 평가하는 시대입니다. 차이를 강조하면서 차별을 정당화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간과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나와 너 모두가 사람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덕과 성품이 그것입니다. 이 시대는 이제 탁월한 재능에는 열광하지만 양심과 선의지에는 무덤덤하기 쉽습니다. 학습 능력과 기술력에는 심혈을 기울이지만 성찰 능력과 공감 능력에는 무심합니다. 사회적 이미지에는 예민하지만 영혼에는 무감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다는 이 메시지가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에는 또한 우리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지향하도록 지은 바 되었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 속에서 마침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가도록 정향되어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부여하신 창조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물건 하나를 만들어도 거기에는 용도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 물건의 모든 기능은 결국 그 제작 목적을 위한 것이자 그 목적에 부합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이상 우리에게도 창조의 목적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의 본질에 새겨져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제껏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시고 새겨 넣으신 이 창조의 목적과 유리되어 살아왔을 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실 때 의도하시는 바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온전히 구현하게 하십니다. 그 구체적 모델과 샘플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곧 가시적으로 실현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가시적이고 경험가능한 실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자라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의 나라를 산다는 것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성취되고 실현된 온전한 사람됨을 이루어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 관심을 두고 계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성공했든 실패했든, 사회적 주류에 편입됐든 낙오됐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러난 그 영적 충만함, 그 자유와 기쁨, 그 품성과 품위, 그 덕과 내적 역량, 그 지혜와 권능이 우리에게도 드러나게 하는 데 관심을 두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기까지 우리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깨어 있음, 우리와의 소통, 우리의 자발적 순응을 기다리며 우리를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본문은 팔복 선언의 첫 부분인데 이 팔복 선언은 산상설교라 불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서문에 해당합니다. 여기에서 팔복 선언이란 칭호는 여덟 가지 복에 관한 선언이라 해서 붙여진 것이고, 산상설교란 칭호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치셨다 하여 붙여진 것입니다.

매태복음 기자는, 예수님께서 왜 하필 산에서 가르치셨다 표현하고 있을까요? 산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모세는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에게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산은 그 하나님께 속한 거룩함과 온전함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가 일생에 걸쳐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5장 48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하셨던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말씀은 레위기 19장 2절의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심이니라” 하신 말씀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치셨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온전함, 곧 참 사람됨이라는 정상에 이르는 데 필요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산상설교의 서문에 해당하는 팔복 선언 역시 사람됨을 이루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강일상 목사님의 산상설교 연구에 의하면, 팔복 선언은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의 사람됨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덟 가지 복에 관한 선언 하나 하나가 사람됨을 주제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팔복 선언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우리 안을 침투하시는 하나님의 영과의 관계에서, 영적 시각으로 보니, 내가 얼마나 영적으로 곤핍하고 궁핍한 상황과 처지에 있는지를 뼈아프게 자각하게 되었다는 말을 뜻입니다. 그래서 영적 갈망과 영적 지향을 기초로 한 삶으로 돌아설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영적 갈망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간 내 마음에 품고 있었던 모든 욕망이 이제는 모두 상대화되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욕망이 모두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양한 욕망들이 여전히 우리 내면 이곳 저곳을 파고들면서 우리를 현혹하겠지만 이제 영적 갈망 때문에 더 이상 그 욕망들에 붙들려 매여 있진 않게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욕망은 계속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 욕망에 목을 매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욕망의 결핍과 좌절 때문에 더 이상 절망하진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다양한 욕망으로부터 거리두기가 가능해졌다는 소리입니다.

욕망으로부터 거리두기가 가능해야 욕망에 대한 성찰이 가능합니다. 욕망이 탐욕이 되지 않도록 경계할 수도 있습니다. 그 탐욕 때문에 자기 영혼을 망가뜨리고 남에게 해를 가하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욕망의 이면에 작용하는 갖가지 환상과 거짓 생각을 꿰뚫어 볼 수도 있게 됩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언어철학자인 자크 라캉에 의하면, 생물학적 또는 생리적 욕구와 욕망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그 이면에 무의식적 관념이 작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욕망하는 이유는 돈에 대한 갖가지 환상과 신념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돈이 곧 행복이다, 가진만큼 행복하다’ 이런 신념들 말입니다. 이런 환상과 신념이 없는 아이들은 돈을 필요로할 순 있지만 돈을 욕망하진 않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욕망은 잘못된 신념을 기초로한 욕망이자 그 욕망이 감각적 즐거움과 만나 부정적으로 강화된 탐욕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곧 영적 갈망에 사로잡히게 된 사람에게 예수님은 ‘복이 있다’ 선언하십니다. 이건 앞으로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복이 그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심령의 가난 그 자체가 복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천국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언급하고 계신 복이 흔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대하는 복과는 차원이 다른 것임이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이 복은 소유할 수 있는 물질적 복이 아닙니다. 복 그 자체이신 하나님과의 만남과 소통과 그 결과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궁핍한 자기를 알아차려 영적 갈망에 사로잡힌 그의 내적 상태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니 그 상태 자체가 복되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 개념은 행복이 이 세상살이에 유용한 무엇인가를, 내 바깥의 무엇인가를 움켜쥐었을 때 찾아온다는 인식을 전복시킨 개념입니다.

심령의 가난함, 곧 영적 갈망에 사로잡힘에서 누리는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과 사귐에서 찾아오는 영적 만족이 그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고백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겠지요.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인도하심을 내적으로 깊이 인식하고 체험하고 보니 이 세상 욕망 채우지 못해도 그 결핍감이 더 이상 저를 괴롭게 하진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괴로움이라는 게 대부분 욕망의 결핍과 관련되어 있는데, 욕망의 결핍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앤소니 드 멜로라는 분은 행복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찾아온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영적 만족을 누리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더 겪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 곤궁함을 알고, 영적 갈망에 사로잡힐수록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우리 자신의 오래된 마음의 습관, 생활습관, 완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욕망의 대상들로 인해, 한 마디로 실망스런 우리의 모습 때문에, 들통난 우리의 실체 때문에 애통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극복했다 싶은 것들이 다시 또 마음을 괴롭히고, 내려놓았다 싶은 것들에 대한 미련이 또 생기고, 그래서 그것들이 다시 마음을 유혹하고, 그러다 솔직히 하나님 신앙에 전념하는 게 맞나 싶은 회의도 들고 하는 등등의 자기 모습에 애통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애통함은 회개의 몸부림이지 절망적 쇠퇴가 아닙니다. 이건 오히려 희망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남의 흠과 티에 흥분하고, 세상의 갖가지 문제들을 남 탓으로 돌리며 불평하는 삶의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과정에서 자기 문제로 애통해하며 자기 문제로 씨름하는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그의 사람됨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위로는 마치 하나님의 이런 메시지와 같습니다. “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애통해하는 것만으로 잘하었다. 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그 문제를 이제는 내가 너를 취하여 해결할 것이고 그 문제로부터 내가 너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경각심을 가지고 그 문제로 고심하며 애통해하는 사람들은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변화시키심을 경험합니다. 이 경험이 곧 위로입니다. 이 위로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모든 내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나 자신을 더욱 내어 맡기는 데 힘쓰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채워가시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이 깊어지고 깊어지면 우리는 온유함의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 번째 복에 대한 선언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함은 예수님께서 친히 밝히신 당신의 성품 중 하나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은 서로 통해 있습니다. 온유함은 문제를 안고 있는 나나 남에 대한 관용적 태도,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겸손함을 겸비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습니다. 스스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굴지 않고 하나님께 겸손하게 자기를 내어 맡길 줄 아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온유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온유함은 그저 여러 유형의 성격 중 하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겸손함을 바탕으로 하는 관용적이고 친절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온유함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한 본질적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에게 땅이 상속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땅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고 이루어지는 자리를 가리킵니다. 가나안 땅을 생각해 보세요. 가나안 땅은 그저 거주할 터전을 위해 마련된 곳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마련된 곳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그저 이스라엘의 소망이 투영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에게 땅이 상속될 것이란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온유한 사람들을 통해 이땅에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는 뜻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 뜻을 하나님의 의로 표현하십니다. 의는 하나님의 나라를 관통하여 흐르는 정신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실현할 사명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가 복되다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자라갑니다. 온유함을 넘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때로 강인합니다. 때로 부드럽습니다. 의를 가로막는 것들에는 강하고, 의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부드럽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데 필요한 또 다른 내적 원천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곧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굶주린 자를 먹이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며, 병든 자를 고치는 일에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곧 자비는 예수님의 마음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마음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일 때 우리는 예수님과 마음이 마음이 통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청결해집니다. 우리를 향한 그 놀라운 사랑과 그 놀라운 은혜 속에서 그분의 자비하심을 보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곧 자비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함께 아파하는 일이자, 그 아픔을 덜어내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이 증거됩니다. 누군가 하나님이 계신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게 가장 빠른 대답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품어야 우리는 서로 진정으로 화해하고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품는 순간 폭력은 사라집니다. 이기적 욕망도 그 자취를 감춥니다. 탐욕은 물러갑니다. 죄가 틈탈 기회가 없어집니다. 마음은 투명해지고 사람이 귀하게 보입니다. 사람을 보는데 자꾸 그 사람 너머의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와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 연이어 마음이 청결한 사람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본다 하셨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 곧 화평케 하는 자라 부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보는 사람에 연이어 화평하게 하는 사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평화를 만들어가는 일에 참여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그 산 증인입니다. 그분의 인격과 삶과 죽으심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해를 가져왔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평화는 폭력과 힘으로 약자들을 짓눌러 얻은 가짜 평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열어 주신 진짜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위해 예수님은 모든 고난과 박해를 견디셨습니다. 감수하셨습니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팔복 선언은 당신 자신을 통해서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나타난 사람됨을 우리에게 재현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예수님의 사람되심에 주목하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온전한 사람됨을 지향해야 마땅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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