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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법을 지키다하나님 나라를 살다 3(마태복음 5:19-20)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10.17 01:52
▲ Ernst Zimmerman, 「Christ and Pharisees」 ⓒhttps://www.bystudyandfaith.com/subjects/gospel-study/the-story-of-christ/week-24-the-story-of-christ/ernst_zimmerman_christ-and-the-pharisees_700/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부어주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다’ 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사랑의 법을 지키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되 우리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십니다. 산상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됨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팔복 선언을 통해 온전한 사람의 마음의 속성과 그 행위의 특성을 밝히셨습니다. 연이어 마태복음 5장 13절 이하에서 제자들을 가리켜, 곧 예수님 닮은 온전한 사람됨을 지향하는 그들을 가리켜 소금과 빛으로 칭하셨습니다. 소금은 그 짠맛을 드러내야 소금이고, 빛은 그 빛을 밝히 드러내야 빛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닮은 온전한 사람됨은 이 세상에서의 착한 행실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장 17절,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우리의 유의미한 행동의 동기를 크게 둘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외재적 동기와 내재적 동기가 그것입니다. 외재적 동기는 한마디로 칭찬과 인정, 급여와 인센티브와 같은 외적 보상을 행동의 이유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재적 동기는 자기 자신의 갈망과 지향, 자기 결정과 목표를 행동의 이유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 사회적 인정과 칭찬과 명예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온유함과 자비로운 마음과 같은 우리의 내적 성품의 자연스런 외적 표현에서 기인한 것이라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착한 행실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은 소금과 빛 비유에 연이어 율법에 관해 언급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선언하십니다. 18절에서는 율법의 그 본질적 의미와 가치는 결코 훼손될 수 없고, 완전히 구현될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려면 율법의 본질적 의미와 가치를 구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소금과 빛 비유에서 강조하신 착한 행실이란 율법을 지켜 행하되 율법의 전문가임을 자처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이루기 위해 지켜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착한 행실은 한마디로 예수님의 방식대로 율법을 행하여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율법을 어떻게 완성한다는 말인가요? 바울은 로마서 13장 8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0절에서는 이렇게도 선포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을 지키는 궁극적 목적이 사랑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 40절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사랑하는 일이라면 율법은 더 이상 개의치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율법의 실천은 반드시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사랑은 반드시 율법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목적이 사랑에 있고, 율법이 곧 사랑의 법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율법에 의해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간과하기 쉽습니다. 사랑은 결코 무법적 행위가 아닙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무형식적 행위도 아닙니다. 사랑에도 법이 필요합니다. 사랑에는 지혜도 필요하고 지혜로운 행위도 필요합니다. 사랑이 그저 마음속 상태나 에너지로 머물지 않고 나와 다른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실체가 되게 하려면 반드시 지혜로운 행위가 필요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자기 딴에는 정말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헌신했는데, 정작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오히려 불편함이나 불행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무조건적 희생과 헌신이라고만 생각할 뿐, 사랑에도 형식과 기술이 필요함을 간과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사랑이 사랑일 수 있으려면 상대방이 사랑이라고 자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주어져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상대방이 성장에 이를 수 있는 방식으로 주어져야 합니다.

부모 사랑을 예로 들어 볼까요?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고, 자기 자식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에 때로 불만을 갖습니다. 그런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부모님 사랑이 아니라 구속이자 강요로 느껴진다는 게 그 핵심 이유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부모들이 사랑을 명분으로 오히려 자식의 인격과 인성을 망가뜨리는 경우도 적지 않게 목도합니다. 예를 들면, 자식의 편을 드느라 자식의 잘못을 눈감아 버리는 그런 경우 말입니다. 또 어떤 부모들은 내 자식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기고 생활비의 삼십 퍼센트 이상을 자녀 교육비에 쏟아붓습니다. 그러러면 얼마나 아끼고 알뜰하게 생활해야 할까요? 그 노력과 정성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결과가 자녀에게 마냥 다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부모의 헌신적 사랑은 분명 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랑입니다. 자식에게 한 몫 잡으려고 투자하듯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게 부모 사랑입니다. 정말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서 발생합니까? 그 사랑에 지혜와 성숙한 원칙이 빠져 있을 때 발생합니다. 자식의 필요를 헌신적으로 채워주는 것으로만 그치는 사랑에 문제의 원인이 있습니다. 부모에게서 더 이상 자기 필요를 구하지 않아도 될만큼 성장하도록 돕는 게 진짜 사랑인데, 이런 지혜가 결여된 사랑에 문제의 원인이 있습니다. C. 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이 되어 버린 사랑은 악마가 되어 버린다.” 헌신적 사랑은 동시에 성숙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저 우리에게 ‘사랑하라’ 라고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하라’ 라고 그 구체적 행위 준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산상설교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행위 준칙들로 가득합니다. 율법도 그 행위 준칙입니다. 사랑하려면 당연히 율법과 계명과 규율을 지켜야 합니다. 다만 그것을 문자적으로 지킬 게 아니라 그 본질적 의미를 헤아려 지키고, 그 원리를 알아 지켜야 할 뿐입니다. 마음으로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사랑, 경험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이 아닙니다. 지켜야 할 사랑의 법이 없는 사랑도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사랑의 법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계명들 속에 담긴 사랑의 원리, 사랑의 지혜를 드러내셔서, 그 원리와 지혜에 입각하여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게 하심으로써 율법을 사랑의 법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실천하라 하신 말씀은 율법을 지키되 그들처럼 자기의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의를 드러내기 위해 지키는 율법과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 지키는 율법은 엄연히 다릅니다. 극명한 차이를 예수님은 십계명에 대한 가르침 속에서 드러내십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예수님은 우선, 그 계명에서 사랑의 원리와 지혜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원리와 지혜에 더욱 충실하여 계명을 지키도록 그 계명을 확장하고 심화시켜 표현하십니다.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 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마태복음 5장 22절입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살인하지 말라’ 라는 명령을 그저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는 소극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명령을 사랑의 법으로 받아들이고 지키려면, 인격 살인, 곧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일, 그 사람의 고유한 가치를 폄훼하고 깎아내리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그의 인격과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가 누구든, 사회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사랑은 사랑할만한 대상에게 주는 행위가 아니라 모든 대상이 사랑받을 자격과 권리가 있기 때문에 주는 행위입니다.

십계명의 일곱 번째 계명인 ‘간음하지 말라’ 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 첨언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28절입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라는 명령을 그저 네 이웃의 가정을 파괴하지 말라는 소극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명령을 사랑의 법으로 받아들이고 지키려면, 인격을 수단이나 자기 탐욕의 도구로 삼을 것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깊이 숙고해 보면 명확해 집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려면, 사람에 대한 인식,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마음가짐, 사람을 대하는 태도, 사람에게 건네는 말과 행동 전체가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동기로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은 과정에서도 사랑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9절에서 여자를 성적 탐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그런 눈은 빼내어 버리라고까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눈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눈이 아니라, 사람을 한낱 탐욕의 도구로 보는 눈이니까, 사랑하는 일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하나님 나라를 사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 빼내어 버리라는 말씀이실 것입니다. 탐욕에 멀어버린 눈, 자기 관심사에 치우친 눈, 편견과 선입견으로 얼룩진 눈, 차별의 눈은 오히려 사랑을 가로막을 뿐이니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선 차라리 빼내어 버리는 게 맞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사랑은 인식을 달리하는 행위입니다. 자식을 제대로 사랑하려면, 자식에 대한 인식부터 달리해야 합니다. 그저 내 자식일 뿐이라는 인식 속에서 하는 사랑과 내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이 세상에 보내진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인식 속에서 하는 사랑은 엄연히 다릅니다.

5장 30절에서 예수님은 실족하게 만드는 손이라면 차라리 찍어 내버리라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손이 아니라, 사람을 그저 자기 힘을 행사할 대상과 도구로 대하는 손이라면, 그 손은 오히려 사랑하는 일에 방해가 될 뿐이고, 하나님 나라를 사는 데도 유해할 뿐이니 찍어 내버리라는 말씀이실 것입니다. 자기 식대로 움켜쥐려고 내민 손으로 과연 성숙한 사랑을 행할 수 있습니까? 그럴 땐 차라리 그 손을 거두어야 사랑이지 않겠습니까? 내어주기 위해 내민 손이긴 하지만 돌려받을 것을 챙기려는 손이라면 그 손으로 과연 성숙한 사랑을 행할 수 있습니까? 그럴 땐 차라리 그 손을 움켜쥐어야 사랑이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5장 38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라는 율법은 사랑의 법과 또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있어서 이 율법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 조항을 이렇게 바꾸어 표현하셨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라는 율법 조항은 본래 악행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규율이자 동시에 피해자에 대한 가혹하고 지나친 보복을 금하는 규율이었습니다. 이 계명을 사랑의 법으로서 지키려면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게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입니다. 사랑에 보복과 적대와 폭력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건 건강한 의미의 자기 사랑이기도 합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음으로써 내 악행의 가능성을 차단하면 악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와 보복심과 적대감이 나를 해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것은 분명 건강한 의미의 자기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 사랑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명하신 예수님은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때 몇 가지 구체적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행하다 박해를 받을 경우,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 명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그런 수준에 머물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사랑은 그 본질상 좋아하는 마음도 아니고, 끼리끼리의 사랑도 아니며, 보상행위도 아니고, 교환행위도 아니니까요. 예수님은 원수 사랑이 모든 피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본원적 사랑과 관련된 것임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차별없이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구별없이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같이 온전하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원수 사랑, 곧 경계 없는 무차별적 사랑에 사로잡혀 우리의 모든 행위에 이런 사랑이 배어 나오는 것일 터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율법을 사랑의 법으로 다시 새롭게 확장 심화하여 제시한 계명들을 종합해 볼까요? 예수님이 제시하신 이 계명들은 우리의 사랑이 과연 어디에서 기원한 것이고, 어떤 유형의 것인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 사랑이 진정 하나님 사랑의 수준으로 자라가려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우리 사랑에 어떤 기술과 훈련이 필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우리의 사랑은 주로 어떤 사랑입니까?

C. 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 이라는 책에서 사랑을 필요의 사랑, 선물의 사랑, 감상의 사랑으로 분류한 적이 있습니다. 필요의 사랑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필요해서 너를 사랑해.” 필요의 사랑은 서로를 의지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취하는 사랑의 유형입니다. 결핍과 갈망을 기초로한 사랑입니다. 선물의 사랑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사랑해서 네가 필요해.” 선물의 사랑은 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랑입니다.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만한 것을 내어주기 위해 하는 사랑입니다. 자기 필요를 망각할만큼 타인의 필요에 집중하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상의 사랑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게 기뻐.” 감상의 사랑은 그가 그렇게 나와 마주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 그의 존재 그 자체를 감탄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필요의 사랑에서 선물의 사랑, 감상의 사랑으로 성숙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선물의 사랑과 감상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사랑에서 기인해야 하고, 하나님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러면 우리 사랑의 한계와 실체와 그림자를 자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추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만큼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 활동으로 재표현하는 훈련도 필요합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성숙한 사랑에는 네 가지 요소가 함유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돌봄, 책임, 존중, 지식이 그것입니다. 돌봄은 사랑하는 대상의 내적, 외적 형편과 처지에 관한 적극적 관심과 자기 내어줌을 의미합니다. 돌봄은 자기관심사를 보류하는 태도, 사랑하는 대상을 자비롭고 주의깊게 바라보는 태도를 필요로 합니다. 돌봄은 자기를 내어주어도 불안하지 않을 만큼의 내적 충만함과 자기를 내어주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의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성숙한 사랑의 두 번째 요소인 책임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일종의 반응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내가 경험하는 갖가지 감정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줘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 줬는데 도리어 화를 내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반응하는 게 책임적 사랑입니다. 책임은 사랑 때문에 발생한 괴로움들을 그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그 괴로움들을 견디고 수용하고 지혜롭게 대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숙한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중은 사랑하는 대상과의 근원적 동일성에 대한 의식을 의미합니다. 부족한 사람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준다는 식의 마음은 우월의식일 수 있습니다. 마땅히 사람답게 살아야 할 사람에게 마땅히 줄 것을 준다는 식의 마음이어야 성숙한 사랑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내 몸이나 내 이웃의 몸이나 본래 하나님에게서 온 한 몸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게 존중이고 이 존중을 바탕으로만 성숙한 사랑이 가능합니다.

성숙한 사랑의 네 번째 요소인 지식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공감을 의미합니다. 선물을 하나 하더라도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를 알아야 그에게 적합한 선물을 고르고 줄 수 있는 법입니다. 성숙한 사랑은 내가 주고 싶은 사랑이 아니라 그에게 적합한 사랑을 베푸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줄 수 있는 사랑과 그가 받아야 하는 사랑을 분별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산다는 것은 온전한 사람이신 예수님이 일깨워주시고 직접 보여주신 사랑의 법을 지키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깊이가 곧 하나님 나라 삶의 깊이입니다. 사랑은 사랑의 법의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사랑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랑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인식의 전환과 태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려면, 우리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과 삶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사랑을 우리 사랑의 궁극적 지향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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