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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이후의 삶믿음은 빛의 희망을 갖는 것(에스겔 18,21-24; 요한복음 12,44-47)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3.10.19 02:27
▲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길을 세상에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Getty Images

우리는 믿음이란 말을 늘 사용하는데 그 말에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밝히지 않아도 공통된 무엇인가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내용 문제와 함께 이야기되는 또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믿음은 자주 의심과 대비해서 사용되고, 때로는 있다 없다, 많다 적다, 또는 크다 작다는 등의 말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다는 말은 약간 다르기는 해도 그 말이 ‘의심 없이’를 함축한다면 이 범주에서 벗어나는 말이 아닙니다. 순수한, 순전한, 온전한 등처럼 질적인 표현도 부분적으로는 의심과 대비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의심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의심은 믿음의 내용을 살피고 생각하고 묻고 연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의심은 알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대체로 믿음의 대상에 대한 신뢰와 연관됩니다.

일상에서 들을 수 있는 신뢰에 대한 최고의 표현은 아마도 ‘그 사람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어’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의심은 상대와 그의 말과 듣는 우리의 관계를 포함합니다. 비약이 될 수 있겠지만 이를 우리나라 기독교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때 ‘그의 말’을 고린도후서 3,3에 따라 이해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섬김으로 된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이는 현재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 수신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이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의 내용입니다. 수신자들은 성서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수 기독교인들의 삶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조악스럽습니다.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멀리하게 만듭니다.

비극적이지만 가짜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진짜 그리스도의 편지인 얼마 안되는 사람들 속에 있기를 빕니다. 그렇게 되는 한 가지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제사장이었던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망하기 10년쯤 전에 바빌론 포로가 되었고, 그때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거기서 하나님으로부터 보고 들은 것은 이스라엘이 망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갈 희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역사는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거기서 이스라엘의 멸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캄캄한 포로의 현실입니다. 빛이 전혀 비치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막막했을 것입니다. 친일매국노들처럼 포로생활에 적응해서 잘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없는 삶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디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지요?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강대국에 포로로 넘겨주었다고 항변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어떻게 희망의 하나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을 힘이 없어서 포로가 되게 한 것일까요? 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계약관계였음을 깨닫고 계약에 대해 성찰한다면, 자신들이 포로가 된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자신들의 책임임을 알게 되지 않을까요? 적어도 자신들에게 더 책임이 있다고 하게 되지 않을까요? 적어도 제2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사람들은 그러한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

에스겔 18장은 33장과 의인과 악인에 대한 거의 같은 주제를 같은 방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민족 전체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비록 악인일지라도 악인이 그 악 때문에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악인일지라도 돌이켜 법을 지키고 공의와 정의를 행한다면 살 것입니다. 의인에게는 자기 길을 끝까지 가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의인이 그 길을 돌이켜 악인의 길을 간다면, 그는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의인의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18,5-9는 그 삶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5 만일 어떤 사람이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고 6 산에 (올라 우상제물을) 먹지 않고,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들을 향해 눈을 들지 않고, 이웃의 아내를 범하지 않고, 월경하는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고, 7 사람을 억압하지 않고, 그가 빚 담보로 잡은 것을 돌려 주며, (남의 것을) 강탈하지 않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8 이자를 븥여 빌려주지 않고, 이자를 (더) 받지 않고, 악한 일에서 손을 떼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공정하게 판결하고, 9 나의 모든 규정들대로 살고, 나의 모든 법들을 지켜 진실하게 행동하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다. 반드시 살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이를 간략하게 말하면 우상 거부, 여자존중, 인권존중, 공정, 자비/사랑, 악 거부, 이익 욕구 절제, 법을 지킴 등으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삶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핵심적인 내용이고 형식임은 분명합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졌다고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의인에게 요구되는 정의와 공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성령의 열매를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의인의 삶이고 그 결과입니다. 삶없는 의인은 의롭다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짜 하나님의 편지요 가짜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포로된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사는 것이 살아날 희망의 근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로 새예루살렘과 새나라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체가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이 그렇게 살 때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포로생활의 어둠 속을 비추는 말씀으로 들립니까? 그렇기를 빕니다.

포로생활이나 해방과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들리는 말씀이지만, 이것은 포로 이후에도 유지되어야 하는 해방된 삶입니다. 포로생활을 하지만 포로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해서 망한 이스라엘이고 심판을 당한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삶을 바꿀 때 희망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심판을 구원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때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러한 삶으로 실현되고 우리 삶에서 사람들이 희망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에게 향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어둠 속 세상에 빛을 비추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빛을 그 눈에 두기 위함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의로운 자의 삶을 거부하는 어둠 속에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포로된 이스라엘 앞에 내놓은 해방의 길이 의로운 자의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 구원은 믿음으로 그가 제시한 삶을 사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셨기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의로운 삶을 사는 믿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넘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의인이 의인의 길을 떠나지 않고 악인이 돌이켜 의인의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입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으며, 마음은 허공을 향하지 않고 우리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의인의 삶으로 드러나 참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를 빕니다. 그 삶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며 용기를 주시고 빛의 희망을 가슴에 새겨주시며 빛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로 사람들에게 기쁨과 함께 평화의 희망을 전할 것입니다. 그 삶을 하나님의 은총가운데 살아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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