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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이 형제와 자매라면 나는 무엇인가요(성)소수자와 그리스도교 23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 승인 2023.11.10 03:28
▲ 전통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한다면 그 전통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Getty Images

1.

작년에 나온 성소수자 교인 목회 및 선교 안내서인 ⟪차별없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서두에 실린 만화 중에 이런 만화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이성애자 여성, 이성애자 남성, 그리고 트랜스젠더 여성이 새로 왔습니다. 새로 온 사람을 소개하는데 “한 형제님과 두 분의 자매님이 오셨다”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당황합니다.

그러자 소개하는 사람이 급히 “아니 형제님이…”라고 말을 바꿉니다. 이번에도 듣는 사람들이 당황하는 건 마찬가지고 ‘자매’에서 ‘형제’로 바뀐 사람도 당황합니다. 그러자 다시 말을 고친다고 고친 것이 “아니 자매같은 형제님이…”

‘자매’에서 ‘형제’로, ‘형제’에서 ‘자매같은 형제’가 되어 버린 당사자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한숨을 내쉬고 맙니다.

2.

지난 10월 31일부터 2023 새길포럼 “차별금지법과 성소수자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열리고 있습니다. 10월 31일에 열린 첫 강의의 제목은 “성소수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이었는데요. 성소수자 활동가인 홀릭님이 성소수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이 강의의 질의 응답 중에 어김없어 저 ‘형제’와 ‘자매’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성소수자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남성으로 패싱되는 사람이면 무조건 ‘형제’, 여성으로 패싱되는 사람이면 무조건 ‘자매’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 자체가 성소수자 차별의 근본 원인이 되는 이성애적 남녀이분법의 또다른 사례에 지나지 않게 되니 이 호칭이 불편할 수밖에 없지요. 이 글의 제목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당신들이 ‘형제’와 ‘자매’라면 성소수자인 나는 도대체 무슨 호칭을 받아야 합니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3.

사실 교회에서 ‘형제’와 ‘자매’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는 이유 내지 효과는 이런 것들이 있을 겁니다. 우선 구성원 서로의 관계를 가능한 한 친근하게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있겠죠. 또한 참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호칭이 결정되지 않은 사람들을 부르기 위한 호칭이기도 할 테구요. 한편으로는, 특히 목사/장로 등의 교회 내의 위계가 낳는 폐해에서 벗어나고 싶어 교회 공동체 내부의 평등을 추구하는 경우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부르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형제’와 ‘자매’라는 호칭이 나오게 된 원래의 이유나 효과는 꽤 긍정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물론 요즘은 이 호칭 자체가 또다른 격식으로 굳어진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소수자들이 “당신들이 형제와 자매라면 나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순간, 이 ‘형제’와 ‘자매’라는 호칭은 앞에서 이야기한 이성애적 남녀이분법과 그 이분법을 따르는 정상가족에 대한 환상-이 환상 때문에 이 호칭들이 ‘친근한’ 호칭으로 사용가능한 것이겠죠-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4.

그런데 이런 순간이 오면 꼭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형제’와 ‘자매’라는 호칭을 당신들이 불편해 한다는 건 알겠는데, 원래는 좋은 의미로 쓰인 말이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계속 써 왔으니 당신들이 너무 나쁘게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그렇게 써 온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어차피 당신들의 주장이 인정을 받으려면 ‘형제’와 ‘자매’라는 말을 쓰는 대다수의 ‘대중’들을 설득해야 하니까 말이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렇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형제’와 ‘자매’라는 호칭을 불편해 하는 ‘성소수자’는 소위 ‘한 사람’과 ‘열 사람’ 중에 어디에 들어가냐고 말입니다. 비성소수자만 ‘대중’이고 성소수자는 ‘대중’이 아닌게 아니라면, 성소수자가 지금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고 있고 ‘형제’와 ‘자매’라는 호칭에 대한 불편함은 그 살아나감의 일부라면, 성소수자 역시 ‘한 사람’이 아니라 ‘열 사람’에 들어가야 할 테지요.

그렇다면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중요하다는 ‘열 사람의 한 걸음’, 그 한 걸음에 ‘성소수자의 한 걸음’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당신들이 너무 나쁘게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은, ‘성소수자의 한 걸음’은 포기하라는 이야기 아닐까요.

5.

이 연재난의 지난 달 칼럼에서도 다루었던, 기장 교단의 제7문서 채택 안건에서 성평등, 성적 지향 등의 말이 들어간 것에 대해 총회 현장에서 시비가 걸려 결국 임원회로 수정 안건이 넘어갔던 사건이 어제 결론을 보았습니다. 결론은 이 성평등과 성적 지향 등의 말을 성적인 쟁점이 있다는 식으로 수정하고, 그 수정한 부분에 각주로 원래의 문안은 이러했다는 식으로 성평등, 성적 지향 등의 용어를 넣기로 했다고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성소수자의 한 걸음’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 결정은 분명히 원안보다 후퇴한 결정일 것입니다. ‘성소수자와 함께 한 걸음’을 내딛는 데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라고 묻는다면 실패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수정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도 30% 정도의 반대가 있었고, 그 반대를 한다는 의견 중에서 차별이란 말이 없다고 차별을 한다는 건 아니고 다만 차별이 아니라 분별은 해야 된다는 헛소리까지 나왔다고 하니, 해당 용어들이 각주에라도 살아남고, 그에 따라 이런 한심한 시비가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남게 된 것만도 의미가 있다는 의견도 가능하겠습니다.

앞 문단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의견 중 어느 쪽 의견을 따르든 간에, 중요한 것은 이 문서 채택 이후에도 ‘성소수자의 한 걸음’, ‘성소수자와 함께 한 걸음’이라는 원칙 하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일 테지요.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독자분들이 ‘성소수자의 한 걸음’, ‘성소수자와 함께 한 걸음’을 걸으시기를 기원합니다.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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