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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권리를 위해 기도하라“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18:1-8)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3.11.13 03:14
▲ 「The illustration at top is from a painting by the Pre-Raphaelite John Everett Millais」 ⓒhttps://www.psephizo.com/biblical-studies/does-god-respond-to-nagging-in-luke-18/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내 삶이 긍정적으로 이렇게 된다면, 저렇게 된다면 하는 상상을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어떤 이들은 내가 상상했거나 많은 이들이 상상했던 삶을, 이미 살고 있기도 합니다. 부유한 삶, 건강한 삶, 성공한 삶, 자녀 또는 손이 잘 되는 삶 등등 이런 상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삶에 행복과 평안이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저는 자녀를 먼저 키운 선배들에게 묻고 합니다. ‘자녀가 크면 걱정이 덜 할까요?’, ‘자녀들이 스스로 앞가림을 하게 되면 걱정이 덜 할까요?’

늘 듣는 대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평생 걱정해야 한다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평생 걱정거리입니다. 무엇을 갖고, 무엇을 누리느냐와 상관없이 끊임없는 불안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한다 하더라도 불안한 외부의 환경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성도는 평안은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내 안에 이미 있는 평안으로 시선을 돌릴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 안에 완전한 평안을 주셨습니다.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추수감사절 특별새벽기도회의 주제는 ‘기도’였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고,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또 작년부터 올해 3월까지 몇 달에 걸쳐서 수요예배 시간에 ‘기도’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기도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는 신앙생활에 기도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쉽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쉽고도 어려운 기도를 어떤 태도로 드려야 하는지, 어떤 내용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해 알려주시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자신이 왜 이런 비유로 설명하는지에 관한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1절입니다.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라.’ 예수님은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성도님들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성도는 기도의 내용과 상관없이 즉, 어떤 기도를 하던 낙심하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기도의 내용은 나와 있지 않고 ‘기도’라고만 말씀하셨지만 사실 어떤 기도를 드릴 때 낙심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관한 기도 내용이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앞 본문인 누가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0-22절입니다. “20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인자의 날들 가운데서 단 하루라도 보고 싶어 할 때가 오겠으나, 보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본문 예수님의 비유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옵니까?’에서 시작된 대답의 맥락에 있습니다.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해 기도하면서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흐르는 맥락을 잘 살피지 않으면 말씀을 오해하게 되고, 잘못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늘 성경의 내용을 나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초점을 맞추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시편 126편 말씀도 그렇습니다.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이 고백도 개인의 기도 제목이나 삶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포로로 끌려간 공동체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헌신하는 삶은, 기쁨으로 거둘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기에 이렇게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을까요? 본문에 나오는 두 단어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과부’ 그리고 ‘권리’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약자들에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어린아이, 과부, 고아, 죄인, 이방인, 병자, 가난한 자 등 당시 사회에서 존재만으로도 죄인으로 취급받는 사람들, 차별받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셨습니다. 약자의 권리 회복에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18 고아와 과부를 공정하게 재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신명기 10:18), “4 왕이 불쌍한 백성을 공정하게 판결하도록 해주시며, 가난한 백성을 구하게 해주시며 억압하는 자들을 꺾게 해주십시오.”(시편 72:4), “17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이사야 1:17)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은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여지없이 ‘과부’라는 차별받고, 소외된 존재를 비유에 넣어 설명하십니다. 본문 속에서도 그렇지만 당시 사회에서도 ‘과부’는 자신의 권리를 타인에 비해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약자이기에 곤경에 처하기 쉽고, 사회적으로 상처받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3절 “그 고을에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그 재판관에게 줄곧 찾아가서,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고 설명하시면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과부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내세우십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과부는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비록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줄곧 찾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재판관에게 찾아가도 과부의 권리가 회복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심지어 불의한 재판관에게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줄곧 찾아갑니다.

예수님은 전혀 소망 없는 경우이지만, 그럼에도 줄곧 찾아가면, 결국 권리를 회복하게 될 것이라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포기하지 않는 기도를 요청하십니다. 어떤 부분에서 그렇습니까?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일지라도 과부와 같은 권리를 잃은 자들이 권리를 찾을 수 있는 세상, 이런 정의와 공의가 흐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와 신앙적 실천을 포기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요청하십니다.

이사야 40장의 본문을 보면 권리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29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30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31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40:27-31)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찌 불평하느냐?, 내가 너의 억울한 상황, 잃어버린 권리를 모르는 줄 아느냐?’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이야기를 통해 불평과 포기가 아닌,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4 그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얼마 뒤에 이렇게 혼자 말하였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5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6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불의한 재판관은 어떻게 말했습니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이 비유를 드시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성도는 당시 과부와 같은, 이 땅의 불의와 차별 속에서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향한 기도를 멈춰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잃어버린 권리가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권리 회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집트에서 종으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권리, 자유를 위해 부르짖어 하나님을 움직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라고 비유의 끝에 말씀하셨습니다. 얼마쯤은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하는 ‘반신반의’로 권리 회복을 향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기도와 신앙적 실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과부와 같은 이들이 존재합니다. 약자들이 있습니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그렇고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그렇고 후쿠시마 핵 오염수가 흐르는 가운데서 아무런 대책 없이 피해를 봐야만 하는 어민들이 그렇습니다. 고스란히 절망의 미래를 맞이해야 하는 다음 세대, 자녀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한들 세상이 바뀌겠는가?’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정의와 권리,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또, 행하라는 독려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고 행하는 성도, 그 믿음을 하나님이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와 성도님들이 그 믿음의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42편 9-11절의 말씀으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9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께 호소한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를 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이 몸이 원수에게 짓눌려 슬픈 나날을 보내야만 합니까?” 10 원수들이 날마다 나를 보고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빈정대니, 그 조롱 소리가 나의 뼈를 부수는구나.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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