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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에 맞서다‘다윗, 한계를 딪고 주를 보다’ 1(사무엘상 17:45)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11.21 03:16
▲ Gerard van Honthorst, 「King David, the King of Israel」 (1622) ⓒWikipedia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큰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앞으로 7주간 ‘다윗, 한계를 딪고 주를 보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해 드리려 합니다. 다윗 이야기로 우리 삶의 이야기를 반추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열등감에 맞서다’ 이런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다윗 이야기, 익숙한 이야기이지만, 여전히 영감 넘치는 이야기이자,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도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고, 낯선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다윗의 영성을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이라 정의했습니다. 다윗의 신앙은 마주하는 현실의 한복판에서 그 빛을 발휘했습니다. 예배당에서나 잠시 확인하는 정도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신앙은 삶의 원리이자 방식이었습니다. 온전하고 충만한 삶을 위한 기본 토대였습니다.

다윗은 현실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대면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예배당에서나 잠시 생각하는 대상이 아니라 어떤 삶의 자리에서나 최우선적으로 접속해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지평 위에서 삶의 현실을 마주대했고 그 현실 너머로부터 현실을 다시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인정하고 기다리는 자세로 위태롭고 위협적인 현실을 견뎠고 그 현실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는 현실을 왜곡하고 부정하고 도피하려는 내적 장애물들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로 허용하면서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극복해냈습니다. 한마디로 다윗에게 신앙은 현실을 훌륭하게 살아내는 힘과 지혜의 원천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그가 누구였느냐가 아닙니다. 그가 누구와 함께했느냐입니다. 우리는 그가 자신을 누구로 생각했느냐보다 그가 누구를 통해서 자신을 보았느냐를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대체로 어떤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을 평가합니다. 어떤 대상과 결부된 자기를 자기로 인식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소유, 지위, 업적, 외모, 사회적 이미지를 중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가장 앞선 대상관계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다윗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어떤 관계보다 앞세우고자 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윗은 한 두 가지로 요약하기 어려울만큼 대단한 이력과 업적을 자랑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같은 왕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에 대한 평가기준은 단연코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위대함과 특별함은 결코 그의 인간성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간성은 우리만큼이나 모순적이고 이중적이었습니다. 그의 밝은 면만 보려하는 편협함을 내려놓고 그의 어둔 면을 함께 본다면, 그는 일평생 영웅과 소인의 행태를 오락가락했습니다. 그의 자아는 분명 다중적이었습니다. 같은 사람 맞아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누구나 그렇듯 그의 내면에도 선과 악이 공존했습니다. 그의 행보에는 강인함과 소심함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선 긍정적 정서와 상처가 함께 역동했습니다. 그는 한편으로 순진한 듯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산적이었습니다. 얼핏 보기엔 이상주의자인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자기 실속을 챙기는 데도 능숙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평범한 우리의 인간성과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다윗의 위대함과 특별함은 그의 인간성에 있지 않습니다. 그 위대함과 특별함은 모순적이고 양가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인간성의 한계를 딛고 주를 바라보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삶도 분명 좌충우돌하는 삶이었지만 그의 삶에 하나님이 늘 함께 계셨다는 데 있습니다. 세속적 성공이 곧 삶의 성공이라는 거짓말에 속지 않고 보아야 다윗의 삶의 위대함과 특별함이 제대로 보입니다. 세속적 형통함이 곧 삶의 온전함과 충만함이라는 거짓말에 휘둘리지 않아야 다윗의 삶의 매력적 요소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다윗의 그 평범한 인간성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얼마든지 다윗 이야기에 우리의 이야기를 합류시킬 수 있습니다. 다윗 이야기로 우리 곁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역사에 얼마든지 우리 삶을 합류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 이야기에서 때로 대견하지만 때로 위태롭고, 때로 자신감으로 충만하지만 때로 한없이 작아지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이지만 우리도 다윗처럼 예측 불가하고 모호하며 복잡다단하고 위험천만한 우리 삶의 현실을 은혜와 기쁨과 신비와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으로 채워갈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결이 신앙의 지혜와 신앙에 기초한 삶의 방식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 이야기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 시기 다윗은 무엇보다 평범한 소시민들, 환난 당한 자들, 마음이 원통한 자들, 사회적 약자들, 주변인들, 의지할 것이라곤 오직 신앙밖에 없는 사람들을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포장된 이미지를 떼어 놓을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이 시기 다윗에게 충분히 감정이입할 수 있습니다. 혹시 이 사회의 주변인으로 밀려나지 않을까, 소외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우리 자신을 직시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이 시기 다윗에게 자신을 등치시킬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사무엘상 16장에서 시작됩니다. 다윗이 등장하게 된 배경부터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이스라엘이 사사시대를 끝내고 왕정체제로 전환될 때 첫 번째 왕으로 선택된 이는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었고 이름 없는 가문에 속해 했지만 자기 지파와 가문의 왜소함에 주눅들 필요 없을 만큼 그 외모가 준수하고 키가 컸으며 동시에 겸손했습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후 그는 그 지위와 권력의 황홀함에 도취되어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변변한 사회적 배경이 없던 그가 왕위를 배경으로 얻게 되었으니 그럴 법도 할만합니다. 이것은 열등감의 부정적 발로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0장 17절 이하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선택받고 온 이스라엘 앞에 공표되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여 세운 왕이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확인시켜주고자 각 지파에서 천 명씩을 불러 모읍니다. 제비뽑기 방식으로 열두 지파들 사이에서 베냐민 지파를 골라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여러 가문들 중에서 사울의 가문이 뽑혔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가문에서 사울이 뽑혔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 자리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부끄러워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매우 소심한 행동이지요. 이 소심함의 이면에 아마도 열등감이 가로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열등감은 건강한 의미에서 완전해지고자 하는 욕구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타인과의 지나친 비교의식, 경쟁의식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열등감으로 인해 나타난 비교의식, 경쟁의식은 한마디로 사람 눈치 보기, 사람 시선 의식하기에 몰두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삶의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들을 스스로 걷어차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이스라엘의 진짜 왕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분의 대리자일 뿐이기에 모든 통치행위는 하나님의 뜻과 법에 근거해야 한다는 확고한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기 시작면서, 이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마음에 합한 새로운 인물을 택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사무엘상 16장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다윗을 택하여 부르시고 그를 기름 부어 세우시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상 16장 1절에서 사울의 폭정과 하나님께 대한 반역적 통치행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풀이 죽어 주저앉아 있던 사무엘을 뒤흔들어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뿔에 기름을 채워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새의 아들에게서 한 왕을 보았다 말씀하셨습니다. 가만 보니, 다윗의 이야기는 다윗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놀라운 행보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보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우리보다 앞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그 하나님에게서 우리 삶의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찾고 개진해 갈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선택되는 과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보시며, 우리를 어떻게 이끄시고 우리를 통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말해줍니다. 사무엘은 베들레헴 작은 마을 이새의 집을 방문합니다. 영문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대선지자의 방문에 불안했을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인가?” 사회적 주변인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불안한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이것 역시 열등감의 부정적 발로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제사를 핑계로 그들의 불안을 달래주고 이새의 아들들을 불러오게 합니다. 

이새는 아들들을 불러 모아 큰 아들부터 차례대로 사무엘에게 소개했습니다. 장자 중심의 사회에서 당연한 수순이었지요. 사무엘은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첫눈에 반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6절에서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여호와가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이렇게 경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들어할 그때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16장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엘리압은 사실 사울을 연상시킵니다. 사울도 엘리압처럼 용모가 준수하고 키가 컸으니까요. 우리는 이미 사울에게서 확인했습니다. 용모와 키를 선택의 근거로 삼는 일, 곧 그의 신체적 조건, 외현적 자질과 재능을 선택의 근거로 삼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용모와 키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겠다고 합니다. 중심은 우리 내면 깊은 곳의 지향성, 의지, 의도를 상징합니다. 갖가지 사회적 외피를 초월하여 있는 자아 깊은 곳, 곧 신앙이 움트고 자라며 신앙으로 역동하는 내적 공간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고, 하나님을 지향하는가를 보시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누구인지보다 우리가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내면에 무엇이 있는가보다 우리 내면의 중심이 어디를 향해 있으냐가 더 중요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새의 다른 아들들을 차례로 살핍니다. 현장에 있던 일곱 아들들을 전부 살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곱 아들 모두를 그냥 지나치셨습니다.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은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겠지요. 그래서 이새에게 여기 남아 있는 이 아들들이 전부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막내아들이 또 있었습니다. 막내는 이 중요한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막내아들은 양을 치러 들에 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막내아들은 사실 아버지의 안중에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나이가 어리기도 했거니와, 특별히 어디 내놓을 만한 구석도 없다는 것이 아버지의 판단이었겠지요. 막내는 별 볼 일 없으니 아버지의 안중에 없었을 터입니다.

사무엘은 막내 아들을 불러들였습니다. 드디어 다윗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상 16장 12절은 다윗을 가리켜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다 소개합니다. 얼핏 보면 이것은 외모에 대한 묘사 같습니다. 용모와 키를 보시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묘사는 그의 내면의 중심에서 뿜어져나오는 빛과 아름다움이 그의 눈과 얼굴로 나타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실제로도 초롱초롱한 눈빛과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중심의 빛남과 아름다움에 비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다윗을 가리켜며 내가 택한 이가 그니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 명하십니다. 다윗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핵심은 사회적 통념 상 선택받아 마땅한 인물은 오히려 버림받고 사회적 통념 상 보잘 것 없고 별 볼 일 없는 인물이 선택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다윗을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그는 왜소한 체구에, 시골뜨기이자 양치기 소년이었습니다. 평소 아버지의 안중에 없었으니 좋은 교육을 받았을 리도 만무합니다. 형들에게 그 기회를 다 빼앗겼을 터입니다. 그렇다고 가문의 배경이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장자 중심의 사회에서 막내로 태어났기에 아버지 사랑의 결핍, 형제들의 무시가 그에게 일상화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그의 현실이 그렇다면, 그의 내면에는 분노, 피해의식, 상처, 우울감, 열등감, 무력감이 깃들었을 게 분명합니다. 형제 많은 집안 막내들이 그런 정서에 취약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건 그 모든 부정적 정서가 파고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다윗을 압도하거나 장악하진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부정적 정서를 틈타 그의 내면에서 속삭이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소리들이 그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오히려 다윗의 눈빛은 밝고 그 얼굴은 환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윗은 시편 27편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다윗의 중심이 하나님께 개방되어 있었고 늘상 하나님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데 그 비결이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분명 내놓을만한 사회적 배경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자기 삶의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분명 갖가지 부정적 정서와 상처와 파괴적 목소리들이 잔존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자기 내면의 토대로 삼았습니다. 그의 앞에 펼쳐진 현실은 누가 보더라도 단조롭고 지루하고 변변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현실의 한계를 딛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사나운 들짐승이 출몰하는 빈들에 그저 양들과 함께 홀로 섰으나, 그는 사나운 들짐승으로부터 연약한 양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통해 제 눈 앞의 현실을 달리 보았습니다. 단조로운 현실을 신비로운 현실로, 지루한 현실을 지루할 틈이 없이 섬세하고 변화무쌍한 현실로, 변변찮은 현실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기대와 가능성이 가득한 현실로 다시 보았습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빈들에, 그 텅 빈 공간에 그는 신앙의 상상력을 기초로, 보이진 않지만 쉬임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새로운 삶의 비전을 미리 보고 그것을 자기 삶의 공간에 그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을 묵상하며 새로운 미래를 자기 앞으로 당겨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다윗의 이런 중심을 보시고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통해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기름부음은 택함을 받았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일을 자기 일로 삼아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기름부음은 결코 다윗에게만 국한된 은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가 기름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중심이 하나님께 개방되어 있고,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지향하는 우리를 하나님은 다윗처럼 기름부어 세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의 일을 찾고 행하도록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무한한 가능성과 기회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음성, ‘바로 이게 네 길이고 네 일이야’ 하는 이 음성을 좇아 사는 데 우리 삶의 희망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 속에서 자기 일을 찾고 그 일에 매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첫 번째로 주어진 임무는 그가 평소 연마해 왔던 수금 연주로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이었습니다. 분열적 증상에 시달리는 사울의 마음에 영적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장차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해야할 일의 예표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한편으로는 사울의 폭정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블레셋의 위협 속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의 위협 앞에 무능했고 무기력했습니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은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히 강했습니다. 사울과 이스라엘은 두려움과 공포에 압도되어 그들과 싸워보지도 않고 이미 패배한 사람들처럼 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그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일, 모든 상황을 하나님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자 결단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철저히 신뢰하면서 그 신뢰의 기초 위에서 행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다들 꽁무니만 빼고 있던 골리앗 앞에 당당하게 맞서려 했습니다. 겁을 먹기는커녕 그의 조롱을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물론 곁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윗을 무시하거나 비웃었습니다. 다윗의 형 엘리압이 그랬고, 사울도 그랬습니다. 물론 골리앗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무시하는 소리가 자기 내면을 헤집어 놓았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 아는대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쓰러 넘어뜨렸습니다.

칼과 창을 사용한 게 아닙니다. 그저 양치기 소년들에게 익숙한 물맷돌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무슨 배짱으로 그리 했습니까? 물맷돌이라도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시면 그 어떤 크고 강한 세력이라도 굴복될 수 있음을 알았고 믿었고 수용했고 의지했기 때문이겠지요. 솔직히 무모한 일로 보입니다. 골리앗에 비하면 한없이 열등한 자기 한계 내에서 보자면 그렇습니다. 그저 나 홀로다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무모함을 하나님을 선택하는 모험으로 인식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무모함 속으로 모험적으로 우리 자신을 던져넣는 일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준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이 신앙이 열등한 우리 삶, 열악한 우리 현실에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숨막히는 현실 앞에 주저앉아 안 되는 이유, 못 하는 이유만 찾을 때가 많습니다. 두려워할 이유, 불안해할 이유만 찾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찾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어떤 삶의 현실에 직면해 있든 우리 곁을 한결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은 그 하나님을 향해 우리 중심을 개방하고 우리 중심으로부터 그 하나님을 지향하는 일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가슴에 속삭이시는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그 하나님을 통해서 현실을 달리보고 우리 삶의 빈 공간에 하나님을 통해 전개될 새로운 미래를 그려나가는 일입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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