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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감을 뛰어넘다다윗, 한계를 딪고 주를 보다’ 2(사무엘상 18:28-29)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11.28 02:52
▲ Ernst Josephson, 「David and Saul」 (oil on canvas, 1878) ⓒPhoto: Erik Cornelius (public domain)
28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29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나 자신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부어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다윗, 한계를 딛고 주를 보다’ 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적대감을 뛰어넘다’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다윗은 한계를 딛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시골뜨기 양치기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을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아버지 사랑의 결핍과 형제들 사이에서의 소외로 열등감에 취약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을 내면의 토대로 삼았습니다. 그의 중심은 하나님을 향해 개방되어 있었고, 그는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지향했습니다. 그래서 내로라하는 장수들도 벌벌 떨었던 골리앗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습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은 그저 골리앗으로부터 승리한 게 아닙니다. 그는 골리앗으로 상징되는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승리한 것입니다. 다윗이라고 왜 두려움과 공포가 없었겠습니까? 믿음이 있다고 그게 사라질리 만무합니다.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승리했다는 건 두려움과 공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지배당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려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선택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다윗의 이런 면모에 요나단이 매료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8장 1절은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마음을 같이했였습니다. 그와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자기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자기 지위와 권리를 그에게 양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아니라 다윗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확신했고 또 그걸 기꺼이 수용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다윗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내어맡길 만큼 그를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울도 사실 처음에는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다윗을 자기 무기를 드는 자로 삼았습니다(삼상 16:21). 이건 그를 믿을 만한 최측근으로 삼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는 그를 더 의지했습니다. 다윗이 집에 돌아가길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삼상 18:2). 뿐만 아니라 사울은 다윗을 군대의 장으로 삼았습니다(삼상 18:5). 후에는 천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오늘로 말하자면, 대대장으로 임명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마음이 적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이 마음과 요나단의 마음은 엄연히 다릅니다. 사울도 요나단 못지 않게 다윗을 중시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안위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그리했을 뿐입니다. 자기 행복과 안녕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판단에 그에게 큰 가치를 부여했을 뿐입니다. 다윗을 향한 그의 마음은 한마디로 자기애적 동기가 전부인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에게 베푼 호의는 다윗을 위한 게 아니라 다윗을 이용하려는 자기를 위한 것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요나단의 마음은 다윗의 마음에 닿아 있었습니다. 18장 1절은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단이 다윗을 하나의 고유한 인격으로 대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진심으로 궁금했고, 그와 진솔하게 소통하길 원했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나단은 다윗에게서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 아닐까요?  다윗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 눈에 띄었기 때문에 그가 궁금하지 않았을까요? 다윗도 그런 요나단의 마음을 간파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 둘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언약의 체결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들에게 언약은 의리의 표식 정도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맹세와 같은 것입니다. 이들의 우정은 분명 신앙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참된 우정은 신앙을 필요로 합니다. 참된 우정은 관계 사이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데 있습니다. 반대로 우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사울에게 다윗은 그저 자기애적 도구, 자기중심적 애착 대상에 가까웠습니다. 그 관계의 파국을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윗을 향한 사울의 마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변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투에 대승을 거두고 돌아올 때의 일입니다.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 춤추고 노래하면서 사울 왕과 다윗의 개선행렬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여인들이 이렇게 외쳐 노랬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직관적으로 이 노랫말이 사울에게 문제가 되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측대로 그 노랫말에 사울은 몹시 불쾌했고 심히 화가 났습니다. 사실 누구라도 사울의 입장이라면 그런 감정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경우 그저 불쾌와 분노로 그친 게 아니었습니다. 18장 8절에서 사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여인들의 태도가 쾌씸하고 불쾌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얼씨구, 이제 다윗에게 나라라도 바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 과한 면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오버센스고 분명 확대의미해석의 오류입니다. 여인들에게 왕은 여전히 사울이었고, 다윗도 사울 왕의 자리를 강제로 찬탈할 맘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아무튼 사울은 그 사건을 불쾌해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다윗을 향한 사울의 마음과 눈빛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다윗이 자기에게 전적으로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가까이 두면 손해날 게 없는 사람이었고,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울에게 다윗은 전적으로 나쁜 사람이 돼버렸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전적으로 좋은 사람, 전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분류하는 행태는 사울의 자아가 얼마나 위태롭고 빈곤했는지를 다시 한 번 더 드러냅니다. 정신장애 진단에 따르면 이것은 경계선적 성격장애와 유사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적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8장 10, 11절에서 그는 여느 때처럼,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자기를 위해 정성을 다해 수금을 연주하고 있는 다윗을 향해 별안간 창을 던졌습니다. 죽으라는 것이죠. 이후에도 그는 다섯 차례나 연속적으로 다윗을 죽으려 시도했습니다.

사울의 마음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다윗을 향한 이 강한 적대감은 어찌 된 영문입니까? 이 적대감은 사실 불안과 공포의 산물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다윗이 무엇을 어찌했길래요? 다윗이 사울에게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습니까? 사울에게 피해 하나라도 입혔습니까? 아니면 사울에 대한 다윗의 마음이 달라졌습니까? 그가 전과는 다르게 사울을 대했던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저 다윗에 대한 사울의 인식과 생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백성들이 다윗을 칭송하고 환호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순간, 사울은 다윗에게 질투가 났고 그를 시기했던 게 분명합니다. 이건 열등감의 발로였을 터입니다. 안 그래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기도 자기가 항상 못마땅했는데, 자기에게 왕 자리 같은 건 어울리지 않다고 늘 의심하고 있었던 참인데, 다윗을 환호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런 생각들이 그의 내면을 파고들어 헤집어 놓치 않았을까요? “다윗 때문에 내 무능이, 내 실체가 다 들통나는 것 아니야? 백성들이 다윗이 나보다 더 왕 같다고 여기는 것 아니야? 틀림없어. 이러다 저놈에게 내 자리 빼앗기는 것 아니야? 이미 저놈이 내 자리 빼앗으려는 계략을 세웠는지도 몰라? 그러고도 남을 놈 아니야?”

이런 생각이 짙어질수록 그에게 두려움이 폭풍처럼 몰려 왔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사울의 눈을 굴절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두려움이 그의 눈을 반쯤 가려버렸을지 모릅니다. 사울은 다윗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다윗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대로 보았겠지요. 다윗의 전체를 보려 하지 않고 의심되는 부분만 확대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없는 사실이 아닌 생각을 진실처럼 믿어버렸을지 모릅니다. “저놈이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지금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어.”

사울은 그 터무니없는 생각들이 만들어낸 두려움을 다윗에게 투사했을 것입니다. 두려움은 그 자체로 괴로운 것이기에 자기속에 담아둘 순 없으니까요. 사울에게 다윗은 이제 위협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다윗이 자기에게 아무리 좋은 일을 해주어도 곱게 보일리 없습니다. 작은 실수라도 보이면 다윗이 자기를 공격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다윗이 더 두려웠겠지요. 다윗에 대한 이 두려움을 처리하기 위해 사울은 어떤 전략을 취했습니까? 다윗을 전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일찌감치 결론을 내려버리고 그를 공격하고 적대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적대감은 다윗 때문에 생긴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편향된 인식과 판단, 왜곡되고 일그러진 생각과 믿음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찌 사울에게만 일어납니까? 우리에게도 종종 아니 흔히 일어나지 않습니까? 타인에 대한 우리의 강한 분노, 공격성, 적대감, 증오심, 혐오감, 그것들 모두를 우리는 매우 진지하고 진중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방치하면 그 모든 파괴적 감정들은 언제라도 폭력으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그런 사례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목도하고 있습니다. 평소 착한 사람이라도 적대감과 혐오감 앞에서는 얼마든지 잔혹한 사람으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사울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에게 찾아온 그 적대감을 타인의 탓으로 돌릴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한 듯 그리할 때가 많습니다. 만약 우리가 타인에 대한 적개심을 그저 타인의 탓으로만 돌리는 행태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런 행태를 멈추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는 타인에게 잔혹하게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그 폭력을 정당화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할 수 있습니다. 이유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자기 나름의 합당한 이유로 가지고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들 모두 이유가 있다는 이유로, 그 이유를 구실로 명백히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폭력 아닌 것으로 둔갑시켜 버릴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폭력의 메커니즘입니다. 그래서 적대감이 더욱 위험합니다.

타인에 대한 증오심이나 적대감은 타인을 통해 유발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타인의 탓이 아닙니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적대감이 다윗의 탓이 아니듯 말입니다. 그렇다고 타인에 대한 적대감이 전적으로 내 탓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를 여러 차례 죽이려 했던 사울에 대해 다윗이 적대감을 품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때 사울에 대한 다윗의 적대감이 다윗 그 자신의 탓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지요.

그렇다면 누구 탓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탓으로 돌리는 건 적대감을 뛰어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적대감이 폭력으로 이어지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타인에 대한 적대감을 내 책임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처리할 수는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책임은 탓하는 일과는 다릅니다. 책임은 대응능력을 말합니다. 적대감이라도 내 안에서 일어난 내 감정이니 내 안에서 내가 건강하고 지혜롭게 대응하는 일을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적대감을 내 책임의 영역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적대감이 폭력으로 돌변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사울의 경우에서 본 것처럼, 적대감 이면에 작용하는 내 지각과 판단과 평가와 생각과 믿음에 오류는 없는지, 편향은 없는지, 왜곡은 없는지, 거짓은 없는지를 성찰해 보라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증오심, 적대감 같은 것을 자기 책임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주로 다음과 같은 이유와 생각들 때문입니다. “내가 왜 그런 노력을 해야 해? 원인 제공자인 그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잘못은 그 사람이 다 했는데, 내가 왜 내 마음을 바꿔야 해? 내가 당한 것을 어떻게 아무 표시도 안 해? 어떻게든 갚아 줘야지. 그 사람이 얼마나 못됐는데? 그걸 가만 둬?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얕보겠어? 못된 놈이 의기양양하게 구는 꼴을 내가 어떻게 봐?” 이런 이유와 생각들로 인해 우리는 증오심이나 적대감을 풀고 싶어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냥 풀기 싫은 거죠.

가만히 보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두려움보다 적대감이 우리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위축시키지만 적대감은 우리를 단단하게 하고 대범하게 만드니까요. 두려움은 에너지를 안으로 소진시키지만, 적대감은 에너지를 밖으로 발산시킵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초라하게 보이게 하지만, 적대감은 우리를 강하게 보이게 합니다. 정치지도자들은 자기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적을 만들어냅니다. 그를 적으로 대해야 할 이유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 적들을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도록 유도합니다. 이런 메커니즘이 우리 내면에서도 흔히 일어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적대감의 이런 효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적대감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친밀하고 인격적인 사랑과 평화의 관계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적대감이 아니라 인격적 사랑의 관계입니다. 적대감은 우리를 적대의 대상에 붙들려 있게 만들고 분노와 혐오와 폭력의 노예가 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적대감을 자기 책임의 영역으로 다뤄야 합니다. 적대감으로 자기를 지킨다는 건 자기를 지키기 위해 몸에 폭탄을 달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대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다윗은 이 적대감을 어떻게 뛰어넘었습니까? 다윗이라고 적대감이 일지 않았겠어요? 자기를 집요하게 죽이려 했던 사울에 대해 일말의 적대감도 품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었겠지요. 다만 다윗은 그 적대감에 지배당하거나 굴복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적대감에 휘둘려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자기 책임의 영역으로 받아들여 그것이 부정적으로 발현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그것에 의연하게 대응했을 뿐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적대감을 자기 책임의 영역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뛰어넘었기에 사울의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그의 곁을 지키려 했습니다. 도망갈 생각부터 한 게 아닙니다. 사무엘상 19장 1절에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라’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공식적으로 천명하기 전까지 도망할 계획조차 세우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보복할 생각은 꿈에도 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의 딸 미갈의 사랑을 받아들여 그를 품에 안았습니다. 사울의 친 아들인 요나단과는 아무런 편견 없이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꼴보기 싫은 사람은 그의 가족들, 친구들도 다 꼴보기 싫을텐데 말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미갈, 사울과 요나단을 분리시켜 바라보았고, 분리시켜 관계 맺었습니다. 적대감에 지배당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다윗은 어떻게 적대감을 처리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적대감을 뛰어넘은 다윗의 비결을 시편 37편, 그의 고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 그들의 의기양양함을 시기하지도 말라. 다만 여호와를 의뢰하라 오직 여호와의 편에 서서 선을 행하는 데 집중하라. 여호와를 기뻐하라. 적대자들로 인해 위축될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통해 네 길을 긍정하라. 네 앞 길을 오직 여호와께 맡기라. 잘 안 보이면, 막막하게 느껴지만 언제라도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다윗은 적대자에게서 그의 적대적 행위만 보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적대자의 적대 행위로 결코 가려질 수 없는 하나님, 적대자의 적대 행위를 넘어선 곳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적대자에게서조차 역사하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렸습니다. 그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맡겼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태도와 자세를 기초로 적대자를 다시 보았습니다. 그래야 비록 나를 적대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전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윗의 눈에 사울은 전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아 자기 열등감과 거짓된 생각과 두려움에 압도된 채 병적으로 돌발 행동을 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고, 그저 구원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일 뿐입니다. 다윗은 이런 방식으로 사울을 향한 적대감정에서 그 힘을 빼앗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적대감을 뛰어넘는 다윗의 신앙의 요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괴롭게 만드는 사람, 우리에 대해 험담하고 비난하고 적대하는 사람에게서 단지 그저 그 못된 행위, 그 적대 행위만 본다면, 우리는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 시각으로는 적대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일평생 사울과 같은 사람을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어쩌다 나에게는 나쁜 사람일지 몰라도 누군가에는 여전히 사랑받는 사람이고, 누군가에게는 또 천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에게 나쁘게 군다고 해서 그가 전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악마도 사탄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 불완전하고 약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충분히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분리와 단절 속에서 순간 순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와 어리석은 판단과 생각과 잘못된 믿음에 붙들려서 중심을 잃어버릴 뿐입니다. 믿음 좋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대감을 내 책임의 영역으로 받아들여 하나님 신앙을 기초로 그 적대감을 뛰어넘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친밀한 사랑의 인격적 관계를 시도하고 훈련하는 일입니다. 다윗처럼 말입니다. 다윗의 이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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