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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감을 마주하다다윗, 한계를 딪고 주를 보다’ 3(사무엘상 21:1-2)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12.05 03:04
▲ Aert de Gelder, 「Ahimelech giving the sword of Goliath to David」 (c. 1680) ⓒWikipedia
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은혜와 평화 내려주시길 기원합니다. ‘다윗, 한계를 딛고 주를 보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고립감을 마주하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적대 행위에 책임적으로 대응했습니다. 마냥 두려워한 것도 아니고 마냥 원망한 것도 아닙니다. 사울을 탓하면서 그에 대한 적대감에 사로잡히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보복심에 지배당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폭력에 폭력으로 응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떻게든 사울의 곁을 지키려 했습니다. 원수 같은 사울의 딸 미갈의 사랑을 받아주었고,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는 깊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적대적 감정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의 편에 서서 선을 지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적대 행위에 위축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길을 긍정했고 그 길에 자기 자신을 내어맡겼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왜곡된 인식과 거짓된 믿음에 눈이 가리워져 다윗을 두려워했습니다. 다윗이 두려워 다윗을 적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심을 알았습니다. 다윗에 대한 편협한 시각 중에도 이 사실 하나만큼은 정확하게 직관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을 신뢰하는 게 훨씬 유리할텐데 오히려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 두려움이 그의 내면을 잠식하였습니다. 두려움을 적대감으로 전환해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셔도 적대 행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수용하고 하나님 앞에 순복했다면 다윗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 대한 사울의 적대감은 하나님께 대한 적대감의 한 표현이었습니다.

사울의 적대감은 날로 커져 급기야 그는 아들 요나단과 모든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 공표했습니다(삼상19:1).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던 요나단은 다윗을 옹호했고 다윗에 대한 명을 거두어줄 것을 사울에게 청했습니다.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삼상19:4) 사울은 요나단의 말에 ‘그를 죽이지 않겠다’ 하나님 앞에 맹세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 맹세는 헛맹세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곧이어 밝혀집니다. 애초에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는데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게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물론 요나단이 다윗에 관해 한 말은 모두 반박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습니다. 사울이 만약 합리적으로 사고했다면 그 말에 토를 달 순 없었을 터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마음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열등감, 두려움, 적대감과 같은 부정적 감정에 만들어낸 왜곡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느끼는 대로 지각하고 판단하고 확신하는 일종의 감정적 추리 오류에 빠져 있었습니다. 감정적 추리 오류란 이런 식의 메커니즘을 의미합니다. “다윗 저놈, 왠지 나몰래 음모를 꾸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런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저놈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어.” 기분이 진실을 외면하면 거짓된 생각과 헛된 상상에 좌우되기 쉽습니다.

사울의 연이은 행동을 보면 이런 추론이 무리는 아닙니다. 다윗을 해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맹세해 놓고선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윗을 향해 또 단창을 던졌습니다(삼상19:9-10). 흥미로운 점은 이에 대한 사무엘상 19장 9절의 묘사입니다. 이 구절은 단창을 던지던 그 순간 사울의 마음을 장악했던 것이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라는 표현 속에 함축된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울이 만약 그 중심을 하나님께 개방하고, 그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지향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범했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된 상황에서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부정적 감정은 때로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마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부정적 감정을 방치하면 그것이 우리의 지각을 어둡게 하고, 우리의 생각을 거짓으로 물들어 버릴 수 있다는 의미를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단창이 자신을 스쳐 벽에 꽂히자 다윗은 속히 자리를 피해 귀가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전령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에게 밤새 다윗을 지켰다가 아침에 다윗을 죽이라 명했습니다. 다윗의 아내 미갈이 이를 알차렸습니다. 그래서 그 밤 즉시 창을 통해 다윗을 피신시켰습니다. 미갈은 전령들을 속이려고 우상을 가져다가 사람인듯 꾸며 다윗의 잠자리에 누였습니다. 이튿날 다윗이 도망한 사실을 듣고 사울은 미갈을 나무랐습니다. 미갈은 놓아주지 않으면 다윗에게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대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사울은 이렇게 점차 스스로를 고립시켰습니다. 다윗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반감을 샀을 것은 불보듯 뻔합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가장 가까운 이들, 곧 아들, 딸과도 담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다윗을 적대하면서부터 그랬습니다. 사실 달리보면, 다윗은 얼마든지 자기 곁을 든든히 지켜줄 후원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적으로 대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고립은 분명 그가 자초한 것입니다. 반복하여 말하지만 누구도 먼저 그를 밀어내어나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모든 이들이 다윗과 나를 비교하면서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닌가? 왕으로서의 내 자격을 의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붙들려 주변의 친밀한 관계로부터 철수하면서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그의 고립은 따지고 보면 그의 내면의 고립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내면의 고립감이 현실에서의 고립 상황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주변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항상 사람이 있어도, 우리는 고립될 수 있습니다. 내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면 그렇습니다. 고립감에 잠식되어 있으면 그렇습니다. 이 고립감은 관계를 철회시키는 생각에 고착되어 있을 때 나타나고 강화됩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는데 누구한테 내 이야기를 꺼내 놓겠어. 누가 내 맘을 다 알겠어. 다 자기 살기 바쁜데 누가 나를 신경써. 약한 모습이라도 보이면 다들 나를 얕보겠지. 힘든 일 있다 그러면 다를 속으로 ‘내 그걸 줄 알았다’ 즐거워들 하겠지.” 이런 생각들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정말 진실입니까? 거짓말 아닌가요? 고립감은 거짓말에 둘러 싸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거짓말로 쌓은 성에 갇혀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다윗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는 의도한 적도 없고, 예상해 본적도 없는 고립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집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도 더 이상 교감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친구인 요나단을 마음 놓고 의지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다윗은 고립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충분히 고립감에 빠질 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돌이켜 보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원치 않게 홀로 남겨지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홀로 있게 되면 혼자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생각이 고립감을 부추깁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요? 아닙니다. 홀로 남겨졌다고 버림받은 건 아닙니다. 홀로 남겨졌다고 홀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홀로 있다고 혼자라 말해서도 안됩니다. 다윗의 생각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에서 기원한 생각입니다.

다윗은 고립 상황에서도 고립감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싶은 순간에 그저 또 다른 사람하나를 찾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판단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한다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첫 도피처로 사무엘 선지자를 택했습니다. 다윗에게 사무엘은 그저 의지할만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 사무엘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끌어 줄 영적 동반자였습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피함으로 하나님께 피한 것입니다. 시편 16편 1, 2절, 다윗의 고백을 회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당시 사무엘은 라마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과의 교류 중단을 선언한 상태였습니다.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사울과의 소통이 하나님과의 소통에 오히려 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불통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라마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데 집중했던 사무엘을 다윗이 찾았습니다. 사무엘은 그간 다윗에게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사무엘이 판단하기에, 다윗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어설픈 동조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편에 서 줄 사람들을 재빠르게 불러 모으는 게 아니었습니다. 고립 상황이 그의 내면을 장악하지 않도록, 그의 내면이 고립되지 않도록, 그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그를 데리고 나욧이라는 시골 마을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나욧은 양들의 목초지이자 목자들의 거주지였습니다. 이곳은 양치기 소년 다윗에게는 매우 친숙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가장 친밀하게 만났고, 하나님과 가장 깊이 소통했던 곳이었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옛 추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추억을 수놓았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광활한 텅 빈 공간에 덩그러니 홀로 남아 있던 그때 그와 함께 계셨고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그를 지켜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였을 것입니다. 혹 시편 23편의 고백이 이때의 고백은 아니었을까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2) 다윗은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새겼을 것입니다. 고립감은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을 때나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고립감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적절한 고립 상황과 고립감은 하나님과의 분리와 단절을 의식하게 하고, 하나님께로 향한 지향성을 강화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음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라마 나욧에서의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진 못했습니다. 사울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전령들을 보내며 다윗을 잡아 오라 명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전령들이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알고 보니 전령들이 라마 나욧에 들어서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이 그들의 심령을 사로잡아서 그들은 그저 예언만 하다 돌아왔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무려 세 차례나 반복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다윗에 대한 저주가 다윗에 대한 축복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사울이 직접 나섰습니다. 그러나 사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도 다윗을 잡으러 갔다 하루 밤낮 예언만 하다 돌아왔습니다. 다만 앞선 전령들의 사례와는 한 가지 다른 게 있었습니다. 사울은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누운 채 예언을 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께서 사울의 외투를 벗겨 그의 실체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외투는 자신을 위장하고자, 자신의 고립된 내면을 가리고자 취했던 것들을 상징합니다.

사울의 체포 작전은 실패했지만, 사울에게 거주지가 발각된 이상 다윗은 그곳에 더 머무를 수는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번에는 요나단을 찾았습니다. 그는 요나단에게 억울함을 토로했습니다. “내가 도대체 자네 아버지에게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나를 이렇게 집요하게 죽이려 한단 말인가?”(삼상20:1) 하나님이면 족할 것 같은 마음으로 안정을 되찾았던 다윗이 요나단 앞에 다시 무너졌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우선, 한가지 분명히 해야할 게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람과의 관계가 불필요해진다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입니다. 진실은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소통은 사람과의 소통을 오히려 투명하고 진솔하게 만듭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소통과 친밀감 때문에 굳이 강한 척 할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요나단에게 마음껏 자신의 약한 모습을 토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만 토로했던 것을 이제는 사람에게도 허심탄회하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심지어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라고까지 한탄합니다. ‘죽고 싶다’ 그런 뜻이지요. ‘하나님께 가까운 다윗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할 수 있나’ 싶습니다. ‘네’, 그런 생각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생각을 없애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이겨내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믿음 좋은 다윗이 우리보다 조금 나은 점이 있다면, 하나님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감정을 직시하고 그것을 신뢰할만한 다른 누군가에게 명료화해서 표현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전방위적 섭리를 신뢰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자기 감정을 토로하며 도피생활을 이제 끝내고 싶어 했습니다. 요나단도 어떻게든 다윗을 돕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둘은 매월 초하루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명분으로 사울의 속내를 재확인해보기로 계략을 세웠습니다. 요나단은 중요한 날 자리를 비운 다윗의 연유를 묻는 사울에게 “제사 드리는 날에 맞추어 다윗이 자기 고향 베들레헴에 가기를 청해 보내주었다” 말했습니다(삼상20:28-29). 예상대로 사울은 격분했습니다. 그를 데려와 죽여라 명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에게 항변했습니다. “도대체 다윗이 무슨 죽을 일이 저질렀다는 말입니까?”(삼상20:32) 그러자 사울은 요나단마저 죽이려 들었습니다. 요나단은 왕궁 근처에 숨어 있던 다윗에게 사전에 약속된 신호화살로 도망치라는 사인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그 사랑의 진심을 알았기에 한편으로는 애통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큰 위로와 힘을 얻고 도피의 길에 다시 나섰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잃었으나 요나단을 얻었습니다. 관계의 실패를 관계의 무용함으로 받아들일 순 없음이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관계에서 받은 상처는 관계를 통해 회복될 수 있음도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다윗의 다음 도피처는 오늘 본문의 놉이었습니다. 놉을 택한 것은 그곳에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엘리 제사장의 증손자였습니다. 사무엘이 어린 시절부터 엘리 제사장에게서 영적 훈련을 받았던 것을 상기해 볼 때 아히멜렉은 사무엘과 연이 닿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의 귀뜸으로 이곳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의 그간의 속사정을 못 들은 것인지 그를 맞이하며 대뜸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다윗의 처지가 안쓰러워 한 질문인지, 그를 시험하는 도발적 질문인지 모를 다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 질문에 어떻게 응수했습니까? 그는 거짓을 말했습니다. 사무엘상 21장 2절을 보십시오. 왕의 비밀 특령을 받고 이동 중에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그저 거짓말에 불과했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의 맘속에 진정한 왕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다윗은 입으로 내뱉는 이 거짓말에 속으로는 참말을 얹었습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의 말속에서 사울 왕을 연상했을지 모르지만 다윗은 왕중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시선을 두며 말했을 게 분명합니다. “제가 비록 지금은 사울왕에게 쫓겨 도망자 신세를 못 면하고 있지만, 이 모든 과정은 나와 함께하시며, 나로 시련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성장케 하시며, 마침내 승리케 하실 하나님께서 친히 내게 부여하신 특령이라 믿습니다.”

시편 16편 8, 11절, 다윗의 고백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73편 23-25절의 고백도 보십시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이 고백은 고립 상황 속에 홀로 내던저져 고립감을 마주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토로했던 진정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의 고백이 그가 고립 상황을 돌파하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 신앙고백을 기초로 내적 고립감을 넘어서서 진실하고 따뜻한 인간관계, 친절하고 공감적인 인간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영적 힘을 하나님에게서 공급받았을 것입니다. 다윗의 이 신앙고백이 우리의 신앙고백되시길 소망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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