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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불가능한 미래역사를 잇는 두 출생(창세기 18,9-15; 누가복음 1,5-20)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3.12.07 01:48
▲ Schnorr von Carolsfeld, 「Drei Engel bei Abraham, Ankündigung der Geburt Isaaks」 (1860) ⓒWikimediaCommons

창조와 홍수 이후 하나님의 새역사는 아브라함의 선택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를 통해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였습니다. 사라의 불임을 전제로 하는 이 계획은 그 때문에 결코 순탄한 것일 수 없었습니다. 불임에서 비롯된 롯에 대한 아브라함의 애착이 첫번째 장애였다면(12-13장), 불임이라는 인간적 한계는 아브라함과 사라로 하여금 친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오해하게 하였고 이에 따라 이스마엘이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며(15-16장), 그것은 세월이라는 또 하나의 자연적 한계와 결합하여 하나님의 구체적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허탈감과 이스마엘에 대한 고집을 낳았습니다(17장).

불임의 영향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브라함은 위기 앞에서 사라를 두 차례나 쉽게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12; 20장), 이것은 하나님에게도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 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서 자손 약속을 받은 후였으니 불임으로 인한 그의 불신이 불임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강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몇 차례의 우여곡절과 위기를 겪었지만, 하나님은 그 뜻을 접지 않으십니다.

위의 본문이 전하는 사라 이야기는 불임과 나이라는 이중의 한계 앞에서 사람이 하나님과 부딪히는 마지막 사건입니다(18장). 사라 이야기라고 했지만 여기서 사라가 직접 나오는 것은 이야기 끝부분에 한 번뿐입니다. 거기 나오는 하나님과 사라의 대화도 약간은 모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외에 사라가 대화의 주도권을 갖고 나오는 경우는 16장입니다.)

18장은 환대와 관련하여 자주 거론됩니다만 이를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출생예고입니다. 하나님은 사라가 아닌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내년 이맘때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어렵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 그 다음에 이어집니다,

성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도 많고 사라는 생리도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평생의 소원이었다고 해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연적 조건 때문에 아이를 갖는 것은 둘 다 포기한지 이미 오래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말씀은 앞의 구절들과 연관해서 읽으면 새로운 면이 발견됩니다.

11장 30절은 사라를 임신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했고, 16장에서는 하나님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신다고 사라가 말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에 성서 기자가 자연적 한계를 지적합니다. 불임-불허-허락-불가의 순서는 하나님의 활동이 사람의 시선에 갇힌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런데 불임과 불가의 문학적 틀을 파괴하는 동기가 바로 사라의 웃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어디 있냐고 물으셨죠. 장막 안에 있는 사라가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일부러 들을 수 있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라는 어땠을까요? 먼저 속으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웃음도 비웃음도 아닌 허탈한 웃음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이 입 밖으로 나옵니다. 나도 아브라함도 늙었는데, 무슨 즐거운 일이 생길 수 있겠냐? 이런 반응이 당연하겠지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누가 들어도 말도 되지 않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속웃음과 그 말을 들으시고 무척 속이 상하신 듯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라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바꿔 ‘내가 정말 애를 낳는다고? 내가 늙었는데’라고 하시며, 야훼에게 할 수 없는 일이 있냐고 덧붙이십니다. 그리고는 내년에 내가 아브라함에게 다시 올 때 사라에게 아이가 있을 것이라고 확언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브라함을 사이에 두고 사라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들었을까요?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두려웠습니다. 화를 낸 것은 아닐지라도 자존심이 상한 듯한 소리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안 그랬다 하자 하나님은 그랬다고 응수하십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삭은 이렇게 태어납니다. 크게 웃다는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새역사가 인간의 한계와 불신과 절망을 넘어 유쾌하게(?!) 이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과정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길고 너무나 견디기 힘든 고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선택한 역사를 왜 그렇게 어렵게 이끌어가시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우리를 떠난 적이 없고 우리를 그 과정 끝까지 이끌어가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영웅적인 삶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의 믿음을 높이 기리지만 그의 믿음은 그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정도의 것이 아님을 성서는 전해줍니다. 지극히 평범했던 아브라함입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부르시고 끝까지 동행하시며 그를 통해 새역사의 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

이삭의 출생으로 복의 역사를 이어가신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를 보내시기 전에 그의 길을 준비할 요한의 출생을 그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알리십니다. 그의 아내 엘리사벳도 사라처럼 늦게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사가랴가 순서에 따라 제사장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찾아와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말해줍니다.

사가랴는 천사에게 내가 무엇으로 이것을 알 수 있는지요? 나도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대답은 사라의 반응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내게 무슨 즐거운 일이 있겠습니까? 무엇으로 내가 이것을 알겠습니까? 두 사람의 이같은 질문들은 각각에 맞는 일종의 답변을 얻습니다. 사라에게는 사라와의 말씨름과 상관없이 아들의 출생이라는 즐거운 일이 나중에 일어나지만, 사가랴는 믿지 않는다는 책망과 아울러 실어증을 앓게 됩니다. 바로 이 실어증 때문에 그는 천사의 말이 진짜구나 하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천사의 소식은 기쁜 소식이었지만, 그는 이것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아들을 얻는다는 것만으로도 더할 수없이 기뻤을 텐데,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하니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벅찬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 못하는 답답함은 그만큼 더 컸을 것입니다. 사가랴가 아들이 태어나고 천사가 지시한 대로 그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 그의 입이 열리고 그는 찬가를 부릅니다. 열달 동안의 감동과 기다림이 노래로 터져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예수를 잇는 이삭과 요한입니다. 이들의 출생은 사람의 기대와 상상을 뛰어넘는 사건들이며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노년이 되어 사람으로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그때까지 기다리셨다가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신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실망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한계에 부딪혀 결국 포기하는데까지 이를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삶속에 함께 계시며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마침내 바꾸어주셨습니다.

이를 두고 ‘왜 꼭 그리 하셔야 했습니까?’라고 원망 섞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이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개입하실 때를 기다리십니다.

사가랴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맹세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노래합니다(73절). 아브라함 이후 긴 기다림의 역사 끝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고, 그 아들 속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아직 완성을 기다리는 새세상의 시작입니다.

새로운 구원과 해방의 역사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오심을 기다리고 기뻐하며 오늘의 역사 속에서 그 완성을 보기 원합니다. 또다시 이어지는 기다림의 역사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 기다림에 때로는 지칠 수도 있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시며 찾아오시고 우리로 하여금 계속 하나님 앞에 살도록 기다림의 용기를 더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때에 그의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가랴에게 미래를 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의 미래를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에게 또한 그 미래를 열어주실 것을 믿으며 우리의 매일매일을 희망으로 채워가기를 빕니다. 불가능과 한계라고 모두가 인정해도 그 안에 갇힌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새세계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입니다. 그의 은총과 자비 가운데 깊은 감동과 즐거움으로 사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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