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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감을 끌어안다‘다윗, 한계를 딛고 주를 보다’ 4(삼상 21:10-11)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12.12 03:13
▲ 「David seeks refuge with Achish, king of Gath, but fakes insanity」 ⓒWikimediaCommons
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나 자신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내려주시길 기원합니다. ‘다윗, 한계를 딛고 주를 보다’ 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으로 ‘무력감을 끌어안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다윗은 사울로 인해 철저하게 고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고립 상황에서조차 고립감에 짓눌려 있지 않았습니다. 시편 23편의 고백을 통해 짐작해 보건데, 오히려 그는 세상과 다소 격리된 라마 나욧에 머무는 동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히 소통하는 한 고립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다윗은 하나님과 친밀했기에 인간관계에서 보다 투명하고 진솔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없는 적대와 무자비한 위협으로 인해 누구보다 깊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에 대한 따뜻함과 친절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고립된 처지로 불안불안하게 도피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확신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도움으로 사울의 마음을 재차 확인했습니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증오와 적개심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놉에 거주하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피했습니다. 그에게 우선 먹을 것을 좀 청했습니다. 아히멜렉은 제사의식에 사용할 거룩한 떡 외에는 갖고 있는 게 없었습니다. 문제는 거룩한 떡, 곧 진설병은 율법의 규정상 제사장 말고는 취할 수 없는 것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히멜렉은 다윗과 그를 따르는 이들의 성결함을 확인하는 정도로 절차를 마무리짓고선 거룩한 떡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윗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다윗도, 아히멜렉도 모두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 3-4절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언급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당시 맥락은 이렇습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던 제자들이 마침 시장해서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일을 꼬집어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비판에 대응하여 하신 말씀 중에 바로 다윗이 진설병을 취한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너희가 그렇게 성왕으로 추앙하는 다윗도 율법을 범하고 진설병을 취하지 않았냐’ 는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진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은 마태복음 12장 7-8절이었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율법 규정에 딱 들어맞는 형식적 제사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율법을 진정으로 제대로 지키려면 그것을 사랑의 법으로 인식하고 무엇보다 사랑을 구현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런 의미의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에 비추어 다윗이 거룩한 떡을 취했던 사건을 달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과 아히멜렉은 그저 율법을 범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일보다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사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하나님에게서 폐위된 사울의 경우에는 그 양상이 달랐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핑계를 댈 때를 보면 무슨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 같지만 그건 그냥 하나님의 본뜻을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위배했던 것일 뿐입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사무엘상 15장에 묘사된 일입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아말렉에게 빼앗은 전리품 중 일부 값진 것을 폐기하지 않고 남겨두어 개인적으로 착복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을 명령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사무엘이 그 일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때 사울은 백성들이 원하는대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데 사용하려고 남겨두었다 거짓 해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로 사울의 위선과 불순종을 꼬집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사울에게 율법은 자기 신앙의 원리가 아니라 그저 정치이데올로기에 불과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가진 백성들을 하나로 규합하고 그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취한 정치이데올로기 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울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사무엘의 뼈아픈 지적에 이렇게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4-25절입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울의 말은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백성들이 원하는데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왕이 백성의 마음을 몰라주면 어떻게 왕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 이 왕 자리를 내가 달라고 했나요?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것 아닙니까? 격려는 못해줄망정 왜 이렇게 비판만 합니까? 당신만 너그럽게 봐주면 하나님께서도 이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울의 말에 사무엘은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판단하고 뒤돌아섰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이번에는 사무엘의 겉옷자락을 붙잡고선 이렇게 한 번 더 하소연합니다.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내 백성과 장로들 앞에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삼상15:30) 사울의 이 말을 통해 재차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울에게 중요한 건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저 왕으로서의 자기 권위가 중요할 뿐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척, 하나님을 위하는 척 하고는 있지만 실상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백성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사도 드리긴 하지만 하나님과 나는 사실 별 상관이 없다’ 는 식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자기를 기름부어 세우신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 테고, 또렷히 기억할 텐데요. 이건 우리가 누군가에게 단단히 화가 나서 ‘나, 너랑 이제 더 이상 상관 없는 사이야. 이제부터 나, 너 모르는 사람이야’ 이렇게 말하는 경우를 빗대어 볼 때 보다 쉽게 이해될 터입니다. 사무엘과 사울의 대화를 곰곰히 다시 생각해보면, 사울이 다윗을 그렇게 적대했던 그 이면에 하나님께 대한 강한 분노와 거부가 작용하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불만이 있지 않았을까요? ‘나도 나름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서 왕답게, 권위 있게, 왕 노릇 한 번 제대로 해보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왜 날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도 않으시고, 날 높여주지도 않으시는가? 이런 하나님께 내가 충성해 봐야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아멜렉의 전리품을 취한 일로 사무엘의 호된 비판을 받았던 그 사건 이후로 사울은 급격히 무기력해졌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습니다. 사울은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으로 인해 번뇌했습니다. 분열적 망상에 시달렸습니다. 그나마 다윗의 수금 소리가 위로가 되어, 그 연주에 집착했습니다. 이것은 감각적 즐거움에 몰두함으로 무질서한 자기 마음을 회피하고자 한 행동이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 앞에서도 무력했습니다. 앞장 서서 싸우기는 커녕 제대로 된 전략 하나 내놓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 이후에는 ‘백성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더 환호하는구나. 이제 백성들이 나를 폐위하고 다윗을 왕위에 올리겠구나’ 단정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선 편집증적 증세까지 보였습니다.

다윗을 적대하기 시작한 이후로 사울의 통치행위는 그저 다윗을 적대하는 것 말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무기력에 빠져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으로서의 사명 의식도 잃어버렸습니다. 왕정에 대한 목표 의식도 상실했습니다. 정작 중요한 일에는 무심하고 무능했지만, 자기 망상에 불과한 일에는 조급하게 행동했습니다. 과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하나 둘 적으로 돌리더니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습니다. 자기 문제의 핵심을 짚어주는 사무엘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더 완고해졌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이렇게 된 게 어디 하나님 탓인가요? 사울의 무기력과 무력감은 사실 두 가지 무능에서 기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각 능력 또는 성찰 능력의 결여요,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무감각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사안을 바라보는 영적 분별력의 결여입니다. 사울은 자기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기를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데 무능했습니다. 그래서 왕위와 왕정에 임하는 자기 마음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실제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자기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게  열등감에서 기인한 인정욕구, 권력의지, 자아도취감, 교만이었음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알았다면 다윗을 적대하는 데 힘쓰기보다 자기를 절제하고 경계하는 데 힘을 썼을 것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에도 무능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무감각하니 당연히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부합된 왕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선택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인지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그 기회와 가능성을 스스로 내던져버렸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나를 이렇게 존귀히 여기시고, 당신의 손을 들어 사용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하루하루 감사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며, 사명감과 기대감으로 왕정에 충실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반면에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돌이켜보면 다윗이야말로 사실 지독한 무기력과 무력감에 빠질 법한 상황에 처해 있지 않았습니까? 다윗이야말로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정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사울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이 억울하고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역전시키는 건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이 도피생활이 과연 언제 끝날지도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자기 앞에 또 어떤 위협이, 무슨 위험이 펼쳐질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틀림없이 ‘또 어디로 도망쳐야 하나?’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이스라엘에게는 원수 같은 민족인 블레셋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했을까요?

우리는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통제 불가능한 절망적 상황, 예측 불허의 위험천만한 미래가 날마다 다윗의 마음을 옥죄지 않았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라고 흔들리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십시오.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했을 때 그의 신하 중 하나가 다윗의 정체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아기스 왕에게 다윗을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올라선 사람으로 소개했습니다. 정체가 발각된 이상 다윗은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때 다윗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사무엘상 21장 13절을 보십시오.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렸습니다. 그 순간 다윗의 마음이 느껴지시나요?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얼마나 서러웠을까요?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얼마나 깊은 절망과 무기력에 빠졌을까요?

하지만 놀랍게도 다윗은 이 지독하게 절망적이고 무기력한 상황에서조차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무력감에 굴복되지 않았습니다. 뒤이은 다윗의 행적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다윗은 도망자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도피처가 되어 주었으니까요. 다윗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무력감을 끌어안았습니다. 몸부림쳤습니다. 그리고 이겨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시편 57편,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노래한 시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빠져나와 곧바로 아둘람 굴로 피했습니다. 아둘람은 히브리어로 ‘은신처, 피난처, 격리된 장소’를 뜻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시편 57편을 노래했습니다. 1, 2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다윗의 이 고백을 묵상해 보십시오.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던 그 순간, 다윗은 모든 것이 가능하시고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자기 자신을 내어맡겼습니다. 제 앞에 펼쳐진 미래는 비록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였지만, 다윗은 그 캄캄한 미래를 주시하며,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 재앙을 끝내시고 자신을 반드시 의로운 길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이 확신을 마음 깊이 새기고 새겼습니다. 시편 57편 7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다윗은 이 고백을 무기 삼아 자기 내면의 어둔 이면에서 무력감을 부추기고 무기력을 강화시키는 마음속 거짓말, 거짓 생각을 끊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하나님께서 열어 주실 새로운 미래를 긍정하고 또 구체화시켜 확언했을 것입니다. 양치기 소년에 불과했던 자신을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어 세워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하고 또 회상했을 것입니다. 몸서리치는 재앙을 끝내시고 마침내 승리케 하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했을 것입니다. 비록 그 날이 더딜지라도, 비록 그 과정이 길고 긴 기다림과 인내를 요구한다 할지라도, 결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것입니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다윗이 이렇게 무력감을 끌어안고 그것을 당당히 돌파했기에 뒤이어 그에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둘람 굴에 숨어지내는 동안 그의 곁으로 하나, 둘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더니 그 수가 무려 400명에 달했습니다. 사무엘상 22장 2절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다윗 곁을 찾아온 사람들은 한마디로 절망적이고 무기력한 상황속에서 무력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왜 다윗을 찾았을까요? 다윗이 무기력과 무력감을 극복해냈기 때문입니다. 무기력과 무력감에 사로잡힌 자신들을 능히 하나님께로 이끌어낼 역량이 다윗에게 있었음을 그들이 직관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이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도 때로 통제 불능의 상황, 예측 불허의 상황에 처합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무기력한 상황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 됐든 그저 바쁘게만 움직이면 되던가요? 또렷한 삶의 의미와 목적 없이 그저 분주하기만 한 건 무기력의 대표적 증상이자, 무력감의 한 표현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때 그때 즐거운 일만 찾아다니면 되던가요? 이 역시 무기력의 한 증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윗이 보여준 신앙의 길을 통해 무기력을 돌파해내야 합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이끄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 확신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우리 마음을 확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미래를 긍정하고 그 구체적 그림을 날마다 반복적으로 확언해야 합니다. 후회와 의심과 체념보다는 감사와 찬양으로 삶을 추동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다윗처럼 무력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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