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책임을 통감하다‘다윗, 한계를 딛고 주를 보다’ 5(사무엘상 22:22-23)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12.19 02:26
▲ 다윗과 아비아달 ⓒGetty Images
22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23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큰 은혜와 평화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다윗, 한계를 딛고 주를 보다’ 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다섯 번째 시간으로 ‘책임을 통감하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다윗은 무기력한 상황에서도 무력감에 굴복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처해 있던 상황은 분명 통제 불능, 예측 불가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상황에 절망하기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했습니다. 그가 도피처로 삼았던 아둘람 굴에서 고백했던 시편 57편을 보십시오. 그 핵심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은 나를 위해 하십니다. 나는 알 수 없으나 주님은 내 길을 아십니다. 그 주님께 내 마음을 고정하겠습니다.”

이런 다윗에게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그의 형제와 가족만 찾아온 게 아니었습니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도 찾아왔습니다. 사울이 지배하는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배제되고, 소외된 이들이 다윗의 품으로 모여든 것입니다. 그 수가 무려 4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왜 다윗을 찾았습니까? 제 한 몸도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그다윗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윗에게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다윗은 ‘나와 같은 처지이긴 하지만 분명 나와는 다른 면모를 지닌 존재’ 였습니다. 다윗은 정말 그랬습니다. 다윗은 무력감을 끌어안고 주를 보았기에 담대히 그들을 끌어안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다윗은 이미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16:13). 그가 사울 왕을 대체할 왕으로 진작부터 예정되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현실은 사울 왕에게서 쫓겨 도망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다윗은 분명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와 사방 팔방 꽉 막힌 현재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크게 두 가지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원망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인정하고 준비하거나.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아닌 두려움에 끌려다니거나 하나님이 주신 소망에 이끌린다거나.

다윗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긍정하고, 하나님에게서 소망을 품고 나니 꽉 막힌 현재를 뚫고 나갈만한 틈이 보이기 시작했을 터입니다. 할 일이 보이고, 준비하고 훈련할 게 보이고, 도전할 게 보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의 왕 자리는 비록 요원해 보여도 아둘람 공동체의 리더로서 당장 자신을 바로 세우고,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장차 오르게 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 꼴과 위엄과 성품을 갖추기 위해 깐깐하고 단단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다윗은 이미 왕직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왕을 허락하실 때 의도하셨던 그 이스라엘의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권력을 행사해 자기 권위를 높이려는 사람은 아닐 터입니다. 법을 이용해 자기 권한을 강화하는 사람도 아닐 터입니다. 그와는 달리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해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고 높이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고 이끄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이렇다면 다윗은 이미 왕직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로 모여든 사람들, 곧 가장 낮은 자리로 쫓겨난 사람들, 가장 소외된 곳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을 끌어안아 그들을 돌보고 세우고 높이는 일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다윗은 이미 왕이었습니다. 다윗도 자신을 피난처 삼아 찾아온 사람들에게 이미 왕이 된 것처럼 의연한 태도로 살아야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아둘람 공동체의 왕으로 선 다윗은 우선 부모님을 모압 왕에게 위탁했습니다(삼상 22:3). 하나님께서 어디로 이끄실지 아직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계속 곁에 둘 순 없었습니다. 부모님을 안전하게 모셔두어야 아둘람 공동체를 이끄는 데 전념할 수 있겠다는 판단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왜 모압이었을까요?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모압 여인 룻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당시 모압은 사울을 견제해야 하는 입장이었단 사실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이 모압 왕에게 부모님을 위탁한 이후 그에게 선지자 갓이 찾아왔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물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모압 왕에게 부모님을 위탁할 때 언제까지 맡겨둘 것인지 말한 내용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삼상 22:3) 이 말은 곧 다윗이 자기 행보와 관련해 이미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그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구현하는 일을 왕직의 본질로 삼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게 왕직의 본질이니, 그러므로 왕 곁에는 하나님의 메신저, 곧 선지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갓을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갓 선지자는 다윗에게 아둘람 동굴을 떠나 유다 땅에 위치한 헤렛 수풀로 이동할 것을 명했습니다(삼상 22:5). 다윗은 지체하지 않고 그 명령에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는 신중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는 망설일 이유가 없으니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힘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할 마음과 의지가 없어서 일 수 있습니다. 내가 고집하는 내 뜻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일에 소홀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입각해 자기 뜻을 세우는 데 무지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주저하지 않을 만큼, 평소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리더십의 원천 중 하나였습니다. 또한 이것이 400여 명의 사람들이 다윗 곁을 찾아온 또 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어떠했습니까? 그 조건만 따지고 보자면, 사울은 다윗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할 수 있는 게 참 많았습니다. ‘지금 왕은 나이니, 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구하자. 나에게 주어진 권한을 선용하자.’ 이렇게 다짐하고 확언하고 기도하면서 얼마든지 왕직을 잘 수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했다면 사울을 왕으로서 존경하고 따르고 추앙할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사울 곁 가까으로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달랐습니다. 사울은 무기력했습니다. 무력감에 빠졌습니다. 다윗을 적대하는 일 말고는 제대로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보였습니다. 사울은 심지어 자기 곁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하나 둘 적으로 돌렸습니다. 사무엘상 22장 6절은 사울이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아 신하들에게 호령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게 그의 단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곁에 선 신하들이라고 해봐야 그저 베냐민 사람들 뿐이었습니다(삼상 22:7). 자기 지파 사람들 말고는 더 이상 자기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왕으로서의 권위가 추락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울의 편집증도 더 강화됐습니다. 피해의식과 의심과 피해망상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사울은 그나마 자기 곁을 지키고 있는 신하들에게조차 따져 물었습니다. 사무엘상 22장 7-8절을 보십시오. 이런 의미였습니다. “다윗이 너희에게 큰 보상이라도 약속해 주었더냐? 왜 서로 공모해서 나를 대적하고 다윗을 감싸고 도는 것이냐? 왜 이렇게 내 편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냐? 너희 중에 하나가 다윗에게 이미 매수를 당해 오늘이라도 나를 죽이려 들지 모르는데 왜 내게 가타부타 귀띔해 주는 사람 하나 없더냐?”

잘 들어보면, 이름만 왕일 뿐 왕으로서의 면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울에게 백성은 그저 내 밑에서 날 위해 희생하고 내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할 종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왕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있다면 사무엘상 22장 9절에 등장하는 에돔 사람 도엑과 같은 탐욕스런 기회주의자뿐이겠지요.

도엑은 다윗이 아히멜렉 제사장을 만나던 바로 그 현장에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이 신하들을 채근하는 틈을 타 왕의 마음을 얻을 공산으로 당시 상황을 왕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사실을 말했으니 도엑은 정직한 사람이던가요? 아닙니다. 다윗은 이 일을 회상하며 시편 52편을 지었습니다. 그는 시편 52편 7절에서 도엑을 가리켜,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칭했습니다.

도엑은 사울의 광기 어린 명을 따라 제사장 85명을 잔혹하게 죽였습니다. 제사장들의 성읍이었던 놉에 거주하는 남녀, 아이들, 가축들까지 모두 죽였습니다. 다른 신하들 모두가 꺼리고 마다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했던 것입니다. 사울처럼 그가 하나님은 안중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비극적 참사의 과정을 되짚어 보면, 사울은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을 뿐만 자기 편을 드는 사람 말고는 의롭고 정직한 사람과는 소통 자체가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도엑의 말을 듣고 즉시 아히멜렉 제사장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왜 다윗과 공모해 나를 적대하고 죽이려 했느냐고 그를 추궁했습니다(삼상 22:13).

아히멜렉은 사실 영문을 몰랐습니다. 사울의 반응이 이해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평소 소신대로 다윗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옹호했습니다. 사울 왕에게도 그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환기시켜 주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음모를 꾸몄다는 사울의 말에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귀에는 아히멜렉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내 편 아니면 다 적이고, 내 말에 반대하면 다 거짓말쟁이라는 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누군가의 말을 제대로 듣는다는 것, 곧 경청한다는 것은 매우 이타적인 행위입니다. 일단 그건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멈추는 일입니다. 할 말 다하고 살자는 식을 넘어서서 들을 건 듣자는 태도를 취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또 경청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전하는 말의 내용 뿐만 아니라 그 말의 어조, 분위기, 그 말을 할 때 드러내는 표정과 몸짓 등에 주의를 집중하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하는 일입니다. 자기관심사에 사로잡혀 있으면 이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타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듣지 않으면 제대로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왜곡해서 듣거나 제 식으로 들을 뿐입니다. 제 맘에 맞는 것만 취사선택해서 들을 뿐입니다.

동시에 누군가의 말을 제대로 듣는 일은 매우 책임적인 행위입니다. 그건 우선 그가 하는 말의 뜻을 잘 이해해 보려는 선의지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가 하는 말을 적당히가 아니고 적확하게 해석하고, 그의 말에 담긴 감정과 욕구 등을 대충이 아니고 공감적으로 파악하고 추론하기 위해 애쓰는 일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의 말이 내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내 감정과 욕구에 정직하고 책임적으로 반응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화가 나면, 그 순간 화를 화로 알아차리되, 벌컥 화만 낼 게 아니라 차분하게 제 마음을 다시 살펴서 부드럽게 대응하는 게 바로 경청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책임적 행위입니다.

누군가의 말을 제대로 듣는다는 건 그래서 사울의 정신과 마음 상태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게 다윗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다윗은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의 마음 상태를 추론하는 데 능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이런 면모를 보다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사울의 광기와 도엑의 잔혹함으로 놉의 제사장들이 몰살을 당할 때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었습니다. 아비아달은 다윗에게로 피하여 그간의 일을 소상히 알렸습니다.

그때 다윗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을 다시 보십시오. 한마디로 그는 책임을 통감했습니다. 다윗은 아비아달의 애통함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아비와 형제들이 죽어가는 데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는 아비아달의 죄책감을 간파했습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다윗은 그가 겪었던 그 일이 곧 자신의 일이고, 그가 겪어야 했던 괴로움이 곧 자신의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 일에 자기가 연류되어 있었음을 인정했고, 그 일을 초래한 자기 잘못을 직시하고 용기 있게 고백했습니다. 만약 다윗이 아히멜렉을 만났을 때, 자신이 지금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고, 도망다니는 신세임을 사실 그대로만 말했다면, 적어도 아히멜렉이 자기를 방어할 묘책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분명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비아달의 일을 자기 책임의 영역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더 나아가 아비아달을 자기 목숨처럼 돌보겠다 다짐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책임을 통감하게 된 메커니즘을 되짚어 봅시다. 그가 아비아달의 말을 듣고 그의 마음 상태를 깊이 헤아릴 수 있었던 건 그가 자기 마음 상태를 직시하고 명료화하는 데 능숙했기 때문입니다.

이 능숙함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토로하고 아뢰는 일이 습관화되고 체질화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직시하고 자기를 정직하게 개방하는 데 힘써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다윗은 시편 34편 18절에서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 경험에서 자리잡은 내면의 힘과 자세로 자기 곁을 찾아온 수많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마음처럼 알아차리고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상한 마음에 책임을 통감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찾아온 상한 심령들은 그렇게 다윗 곁에서 치유되고 성숙되어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에게 나타난 이 책임적 인간관계와 성숙함이 우리에게도 재현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가 사람과의 관계로 이어지시길 소망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현주 목사(한성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4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