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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 해방신학을 만나다홍인식 대표의 『이집트탈출기: Lection Divina로 읽는 모세오경 시리즈 2』 (엘까미노, 2023)가 읽은 출애굽기
이정훈 | 승인 2023.12.19 02:36
▲ 『이집트탈출기: Lection Divina로 읽는 모세오경 시리즈 2』 책표지 ⓒ엘까미노
“이제 이들은 다시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게 돌아와야만 한다.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에게로 돌아오지 않고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의무를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홍인식, 『이집트탈출기: Lection Divina로 읽는 모세오경 시리즈 2』 [엘까미노, 2023], 151-152; 이하 괄호 속에 숫자는 이 책의 쪽수이다.)

늘 지근 거리에서 보고 있는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의 올해 화두는 ‘전환(轉換)’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년 말부터 올 한해 계획을 꾸릴 당시, 만날 기회가 되는대로 전환이라는 단어를 거론했었다. 확인했던 것으로는 올해 새길교회에서 전하는 설교도 이 주제에 맞춰 진행했다.

그럼 홍 대표가 생각하는 전환은 무엇일까? ‘여는 글’에서 홍 대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코로나가 교훈적 의미에서 우리에게 준 핵심 단어는 ‘전환’입니다. 코로나는 현재의 시스템, 정치 경제 그리고 일상적 삶의 체제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탈(脫)이라는 단어로 표현해도 좋을 것입니다. 탈(脫)인간, 탈(脫)서구, 탈(脫)성장, 탈(脫)종교 등 ‘탈’은 단순한 벗어남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안적 삶을 향합니다. 그래서 전환이 아니겠습니까. 방향을 바꾸어 걸어가는 것입니다.”(10)

이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홍 대표에게 전환은 ‘탈(脫)’이자 ‘대안(對案)’이다. 기존의 것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기존의 것이 구축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점검(點檢)’을 또하나 첨가한다.

기자의 입장에서 순서대로 다시 나열하자면, ‘① 점검하고 → ② 탈 하고 → ③ 대안이 되자’로 재배열할 수 있다. 그런데 기자에 보기에 홍 대표가 명시적으로 쓰지 않은 것이 하나 있어 보인다. 바로 ‘의심(疑心)’이다.

의심이 ‘없다’면 혹은 ‘생기지 않는다’면 기존의 것을 점검하지도 않을 것이고, 탈 할 이유도 없고, 대안을 만들 필요도 없다. 생각이 이렇게 꼬리를 물자, ‘홍 대표가 생략한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의심이라는 말이 너무 ‘진부해서인가?’ 아니면 ‘과격해서인가?’ 하는 물음표가 붙는다.

그런데 홍 대표는 이 의심이라는 문제제기를 ‘코로나’로 유하게 바꾸어 놓은 듯 보인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만한 전염병의 전 세계적인 대유행 속에서 전 지구공동체는 한계를 절감했다. 화성으로 가니마니 하는 시대에 속된 말로 그깟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인간 세상은 모든 것이 멈추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여기에 전 세계의 생산기지라고 일컬어지는 중국의 모든 생산시설이 멈추면서 그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히밀라야 산 정상이 보이는 아름다운 모습도 목도했었다. 그때 회자되었던 말 중 하나는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는 오래된 문구였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바이러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제한당해 멈추었을 때 우리 곁에 있었던 것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던 순간이었다.

홍 대표가 일견 생략했던 것으로 보였던 ‘의심’이라는 테제를 ‘코로나’로 치환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던 코로나로 인해 인간은 지금까지 인간이 이룩했다고 자부했던 모든 것들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여기저기서 새로운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인간이 늘 그랬듯 인간에게는 무서운 원상 회복능력이 있다. 코로나가 거의 종식되어 가면서 인간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로 다시 회귀하고 있다. 더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고 있다. 홍 대표는 이것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악한 길로 되돌아가는 인간의 모습에 말이다.

그렇기에 전환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풀이하려고 했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잠시 해봤지만 창세기에 이어진 것이니 나의 의심은 여기서 멈춘다. 하지만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고 했던가 상황이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래서 흥미롭게 읽었다. 기자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좋아하는 책 종류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책의 한 부분에서 흥미로운 문구를 발견했다. ‘새로운 의무’라는 부분이다. 한국 신학계에서 해방신학을, 그것도 남미 해방신학자에게 배워 학위를 받은 거의 유일무이한 학자가 ‘출애굽기 법전 부분에서 해방신학 전통을 먼저 앞세우지 않았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에 이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 존재의 본질이 자유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52)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홍 대표는 정말 해방신학을 벗어난 것일까?

이 의심을 풀어가기 위해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태동하고 그 영향력이 커지면서 교황청의 근심이 커져갔다. 급기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앙교리성(당시 장관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었고, 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선출된다)에 해방신학에 관한 두 가지 연구를 의뢰한다. 이 결과물이 1984년과 1986년에 각각, 〈Libertatis Nuntius〉와 〈Libertatis Conscientia〉가 발표되었고, 한국 가톨릭 측의 공식 번역은 〈자유의 전갈: 해방 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1984)과 〈자유의 자각: 그리스도교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1986)이다.

한국 가톨릭 측 사회교리에 의하면 “이 두 선언은 일단의 해방신학의 흐름에 대한 경고로 볼 수 있지만, 주요 흐름에 대한 경고는 아니라는 점을 올바로 보아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라칭거의 문서는 해방 주제 자체가 성서 말씀의 중심이고, 전체 그리스도교의 메세지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주제에 바탕을 둔 사회 정의를 이루기 위해 구조적 변혁이 필요하다는 최근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재강조한 것이라는 점이다.”라고 지적한다. 우스갯소리로 ‘과격하기는 한데, 말은 맞아’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저 두 선언 중 〈자유의 전갈〉은 서론과 결론에, 짧막한 11개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략 3부로 나누어진다. 제1부(1-5장)는 훈령의 목적을 명시하는 서론에 이어서 해방신학의 생성,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과의 관계 등을 다루고 있다.

제2부(6-10장)는 일부 해방신학에서 발견되는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안고 있는 위험, 그리스도교 신앙과의 모순을 경고하지만 특정 해방신학자를 단죄하거나 해방신학 전체를 단죄하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 제3부(11장과 결론)는 해방, 정의, 자유에 대한 현심(顯心)과 투신을 막자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반복하고, 억압과 가난의 희생자들에게 헌신하는 모든 이를 격려한다.

그 당시 라칭거 추기경은 〈자유의 전갈〉 중 “IV 성서적 근거” 한 부분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3. ‘해방신학자들’은 출애굽기의 이야기들은 널리 이용하고 있다. 출애굽은 사실, 선택된 백성의 형성에 있어서 근본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외세의 지배와 노예생활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이다. 이 사건의 독특한 의미는 그 목적으로부터 드러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 해방은 하느님 백성의 창립과 시나이 산에서 거행된 계약의 제사를 그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기에 출애굽의 해방은 일차적으로 또 배타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의 해방으로 격하될 수 없다. 더욱이 해방이라는 말이 성서 안에서 흔히 해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구원이라는 말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또한,

“15. 또한 악을 일차적으로 또는 일방적으로 불의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안에 국한시킬 수만은 없다. 여타의 모든 죄악이 거기에서 생겨나므로 ‘새로운 인간’의 창조는 또 다른 경제적 사회정치적 구조의 건설에 의존해야 한다고만 말할 수 없다. 확실히, 악을 조장하는 열악한 구조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를 변혁시킬 용기를 가져야 한다. 구조란, 그것이 옳든 그르든, 인간 행동의 산물이며,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악의 근원은 자유롭고도 책임있는 인간 안에 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써 회개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를 효과적으로 추구하며 자제와 덕행을 실천하는 새로운 인간으로서 살고 행동하여야 한다.”

〈자유의 전갈〉 마지막 결론에서 라칭거 추기경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 관계의 급진적 혁명을 요구하면서 인격 완성의 추구를 비난하는 것은 인격과 그 초월의 의미를 부정하고 선악 구별의 절대 기준인 윤리와 그 근본을 파괴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사랑은 진정한 인격 완성의 원리이므로, 타인에 대한 개방과 봉사 정신 없이는 인격의 완성이란 불가능하다.”

라칭거 추기경은 〈자유의 자각〉 중 “2. 자유를 향한 인간의 소명과 죄악의 비극”에서 이렇게 일갈한다.

“해방은, 그것이 진정한 해방일 때에,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나누어 받은 그 자유의 개념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해방은 진정한 인간 자유의 실천이 요구하는 조건을 보장해주고 증진시키고자 하는 열망·계획·행동·투쟁·고통·시련들의 거대한 집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는 주어진 것이다. 자유를 실천하게 하고 신장시키는 해방의 과정 그 발단에서부터, 사실 자유는 주어진 것이다.”

이어 “3. 해방과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느님은 해방자이시다. 그분의 해방활동은 이미 구약성서 안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은 모든 해방의 전형이다. 야훼께서는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예속으로부터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셨다. 그러나 그분의 목적은 한층 높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의 계약을 통하여 그들을「사제들의 나라, 거룩한 백성」(출애19,6)으로 삼고자 하셨다. 출애굽을 일으키고 이를 해석하는 종교적인 전체 구조에서 정치적인 측면을 배제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라칭거 추기경은 “4. 교회의 해방사명”에서

“교회가 억압과 예속을 고발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자기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을 이방인으로 대하는 사회생활의 새로운 형태를 거부해야만 한다.역사를 비추는 진리의 말씀을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셨고 또 고통받는 사람들과 더불어 일치할 수밖에 없는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교회는 그러한 과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홍 대표가 해설에서 ‘새로운 의무’라고 표현한 것은, 심지어 해방신학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당시 라칭어 추기경이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해방신학 전통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이웃에 대한 의무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로 바꾸면 더 좋겠다.

홍 대표의 법전 해설 중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이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여 살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당면하게 될 것이다. 위기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위기 중에서 한 사회를 무너뜨리고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불의한 소득을 용납하는 것이리라. 이스라엘을 파멸 시키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그 사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내부의 부패일 것이다.”(164)

재미있다. 홍 대표는 가나안에서의 삶 자체를 위기로 본다. 그 위기는 “불의한 소득”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읽는다. 착취나 억압이라는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불의한 소득이라,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표현이었다. 노동자의 소득은 불의하지 않다. 땀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법전 해설의 마지막에서 눈을 멈추게 한 부분은,

“한 사회의 건강성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얼마나 정의에 입각한 공정한 행동을 하고 공정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좌우된다.”(170)

공정만을 부르짖다가 위기에 이른 한국 사회를 지적한 것으로 읽었다. 특히 지난 대선에서 정치권의 갈라치기 전략으로 인해 한국 사회는 공정이라는 화두에 몰입했었다. 아니 문재인 정부에서부터 이런 현상은 두드러지게 드러났었다. 정작 문제는 공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공정을 주장하며 ‘정의’가 사라진 것이었다. 정의는 제외한채 공정만을 찾다가 한국 사회는 끝모를 위기에 처해 있다.

사실 ‘렉시오 디비나’라는 가톨릭 전통의 성서 묵상 방식을 잘 모를 뿐더러, 80년대 중반부터 한국 개신교에 불어닥친 ‘경건의 시간’, 이른바 ‘QT’ 열풍에 대해 대단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자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이러한 반감이 일어나면서 어느샌가 렉시오 디비나가 ‘QT’ 열풍에 대안으로 등장했나 하는 의심까지 했다. 그러니 무지에 오해까지 덮쳐 렉시오 디비나에 아예 관심을 끄고 살았다.

특히 한 대형 개신교회에 소속된 출판사에서 출판되던 경건의 시간용 책자에서 보이는 말도 안 되는 성서 해설에서 기겁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 렉시오 디비나도 그저 그런 것이려니 했다. 실제로 렉시오 디비나를 위해 출판된 책들을 훑어보면서 기자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속으로 ‘정말 앞으로 두 번 다시 관심 가질 일 없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책이 출판되기 전 홍 대표가 ‘추천의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기에 기자는 렉시오 디비나 형식 보다 ‘성서 해설을 도대체 어떻게 했을까?’ 하는 부분에 더 깊은 관심을 두고 읽어나갔다. 그렇게 읽어나가다 보니 ‘과연 해방신학자의 성서 해설이구나’ 싶었다. 특히 기자가 제일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법전 부분 해설에서 반가운 표현들이 많아서 즐거웠다.

독자들에게, 렉시오 디비나라는 형식에 맞추어 이 책을 읽어도 좋겠지만, 성서 해설 부분만 읽어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적어도 성서 해설이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은 아니니 말이다. 특히나 해방신학자가 성서를 어떻게 읽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독자에게 적극 권하고픈 책이다.

마지막으로 홍 대표가 부탁했던 ‘추천의 글’은 결국 쓰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다. 처음 부탁했을 때, 먼저 ‘제가 뭐라고 그런 글을 쓰겠습니까?’ 하고 거절했지만,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쓰겠노라고 이루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했고 역시 내 예상대로 쓰지 못했다. 그럼에도 책이 출간되기 전 읽으면서 즐거운 독서였기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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