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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을 무릅쓰다‘다윗, 한계를 딛고 주를 보다’ 6(사무엘상 23:3-6)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12.26 02:25
▲ James J. Tissot, 「The Valiant of Gibeon」 (1896-1902) ⓒThe Jewish Museum, New York.
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내려 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다윗, 한계를 딛고 주를 보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여섯 번째 시간으로 ‘위험을 무릅쓰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직시하고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토로하는 일을 체질화하고 습관화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깊고 넓게 체험했습니다. 그에게 최우선적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본래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태동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최초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그 관계를 최우선하는 게 우리 존재를 온전케 하는 최선입니다. 다윗은 고립된 상황에서, 무기력한 상황에서 이를 더욱 깊이 절감하고 체감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토대로 타인과 관계 맺었습니다. 하나님의 경청하심을 알았기에 그는 타인의 말을 경청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헤아려 아심을 경험했기에 그는 타인의 마음을 공감적으로 헤아릴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확신했기에 타인에게 자기 허물을 용기 있게 개방할 줄도 알았습니다. 타인의 아픔에 책임적으로 반응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 때문에 환난 당한 사람들, 빚진 사람들, 마음이 원통한 사람들이 그의 곁에서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피난처 삼는 수준을 넘어서서 차츰 다윗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갔습니다.

다윗의 이런 선의와 호의로 그들만 덕을 본 게 아닙니다. 다윗 그 자신에게도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다윗은 자기 곁을 찾아온 사람들을 돌보면서 한 공동체의 리더로서, 장차 오르게 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자질과 품성과 지혜를 갖춰 갔습니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타인에게 공헌하려는 목표 없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난폭하고 오만스럽고 불쾌한 사람이 되어 버릴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타인에게 공헌하려는 목표가 있어야, 하나님 주신 사명에 눈을 떠야, 우리의 인격이 온전히 자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또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은 자기 권위와 안위에만 집착했기에 타인에게 오만하고 난폭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타인과의 유의미한 관계, 곧 이타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기 때문에 그 관계 속에서 인격의 성숙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나로 변화되길 원합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으로 성장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다윗 이야기를 근거로 말하자면, 우선 나를 둘러싼 환경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자기 문제에만 골몰하는 식의 자기 집착을 내려놓고 내 주변의 사람과 사물을 달리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변화와 성장을 기대하면서, 자기 처한 환경에 매몰되어 있을 순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변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지는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향을 안 받을 순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영향의 방향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고 긍정적인 영향에 주의 집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러면, 그저 환경에 대한 사실 지각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그 외형적 특성을 기술하거나 묘사하는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그걸 뛰어넘어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에 건강한 의미 부여, 곧 참되면서도 창조적인 의미 부여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사는 집이 누추하고 허름할 수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딱히 객관적이라 말할 순 없지만 상대적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이 누추하고 허름하다고 이 집이 당장의 내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이 집이 내가 취하여 행할 수 있는 일들에 큰 제약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집에서 축구를 하거나 공연을 할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누추하고 허름한 집 때문에 무기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에게 자랑할 것 아니라면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참되면서도 창조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 외형적 허름함과 상관없이 이 집은 내게 쉼을 허락하고, 가족과의 친밀한 관계를 보장하며, 삶에 대한 내 구상과 계획과 준비의 공간을 제공한다는 생각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습니다. 누추하고 허름한 이 집에서조차 행복하고 아름답게 존재할 수 있다면, 이 집은 내게 성장과 성숙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취할 수 있습니다. 집 차제를 바꿀 순 없지만, 집 안의 환경을 달리하고, 집 안에서의 마음가짐과 활동을 달리할 순 있습니다. ‘이 집이 감당 못할 사람으로 성장하자’ 다짐하고 확언할 수도 있습니다.

변화와 성장을 위해선 다른 한편으로 자기 문제에만 골몰하는 자기 집착을 문제삼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도 아닙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삶이 온전해지고 풍요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 삶의 문제가 내 삶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 문제에만 골몰하는 식의 자기 집착은 정작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그 문제에 더 깊이 얽매이게 만듭니다.

자기 문제에 고착되어 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처한 환경과 비슷한 환경을 공유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내 시선을 돌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을 향한 시선에 선의와 호의를 담아야 합니다. 그들을 긍정적으로 재정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태도와 행동은 역설적으로 나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킵니다.

예를 들면, 인지상담치료 중에 ‘이중기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자기 처지에 관해, 자기 삶의 문제에 관해, 자기 고통과 괴로움에 관해 한참을 비관적으로 토로합니다. 세심하게 경청한 상담자가 이제 내담자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만약에 당신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누군가가, 그것도 당신이 매우 아끼는 누군가가, 방금 당신이 표현한 동일한 내용으로 당신에게 하소연한다면, 그에게 어떤 말로 위로하고 격려해 주시겠습니까?” 그때 내담자는 틀림없이 그의 상황 인식의 오류, 그의 단정적인 표현, 편협하고 왜곡된 생각 등을 교정하는 말을 해줄 것입니다. 상담자는 마지막으로 제안합니다. “당신이 그에게 해주었던 그런 말들이 진실이라면 이제 그 진실을 당신 자신에게 들려주세요.” 이것이 이중기법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이제 다윗을 다시 보십시오. 그는 지금 유다 땅 헤렛 수풀에 숨어 있습니다. 말이 수풀이지 실제로는 민둥산에 가까운 산지들 사이 사이로 펼쳐진 광야입니다. 나무들이 빼곡히 우거진 숲이 아닙니다. 다만 그 공간이 꽤 넓고 사람의 흔적이 적을 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무엘상 22장 23절에서 사울의 대학살을 피해 도망해 온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한 말을 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굉장한 자신감이 묻어 있는 말입니다. 듣는 이를 충분히 안심시켜주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디에서 온 자신감인가요? 인적도 드물고 광활한 지역에 숨어 있으니까 사울에게 들킬 염려가 없다는 판단에서 온  자신감인가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공간이 아무리 드넓어도, 두려움에 압도되어 있으면 그 공간이 좁디 좁아 보일 게 분명합니다. 아무리 숨을 곳이 많아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들키기 쉬운 빈 구석만 우선 눈에 뜨일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이 자신감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그 근원을 알려면 다윗이 헤렛 수풀로 오게 된 경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22장 5절에 의하면, 다윗이 이곳에 온 것은 자의적 판단과 임의적 결정에 기초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통해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명하셨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기에 왔으니, 다윗이 보기에 헤렛 수풀 그저 광활한 벌판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그곳은 남다르고 새로운 의미의 공간입니다. 그가 보기에 헤렛 수풀은 그저 광야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난처요, 하나님의 요새였습니다.

시편 27편 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연이어 5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 고백을 기초로 헤렛 수풀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달리 보니, 드넓은 광야 사이 사이로 재빠르게 이동 가능한 비상로가 보였을 것입니다.사울의 군대에 발각되더라도 추격을 따돌릴만한 지형이 보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윗의 자신감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해졌습니다. 그의 자신감은 자기 처한 환경에 대한 신앙고백적 의미 부여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기 문제에만 골몰하는 식의 자기 집착을 내려놓고 자기 주변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고 그 시선에 선의와 호의를 담았습니다.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했던 말을 다시 상기해 보십시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삼상 22:23) 이 말은 연대와 동조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비아달에게서 자신의 것보다 더한 비참함과 더한 고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사울의 군대의 잔혹한 폭력으로 가족을 잃었고 동료를 잃었습니다. 다윗은 책임을 통감하며 그와 함께 아파했습니다.

함께 아파하는 행위는 강력한 유대감을 형성해 줍니다. 우리는 함께 아파함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음, 곧 하나됨을 경험합니다. 타인을 위해 진심으로 울어본 경험이 있다면 우리는 이 하나됨의 체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비아달과 함께 아파함으로 그와 하나됨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나됨의 체험은 나의 안전과 너의 안전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직관적 인식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너의 안전이 곧 나의 안전이고 나의 안전이 곧 너의 안전이라는 직관적 인식에 기초해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말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자기 처한 환경과의 관계, 자기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관계 지향적으로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그만큼 다윗과 더욱 친밀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다윗의 이런 친밀한 관계 형성은 자기편 만들기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분명 다윗의 편이 되었습니다. 다윗도 그들의 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자기편 아닌 사람들에게 무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은 자기편 아닌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배제한 적도 없습니다.

이런 점은 분명 사울과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대로 사울은 자기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대했습니다. 자기 말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모두 거짓말쟁이로 취급했습니다. 사울에게 관계라는 것은 그저 자기를 편드는 사람을 자기 편에 두는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와 달랐습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편 만들기가 아니라 타자편에 서 보기였습니다. 자기편이 생긴 건 그것을 의도해서라기보다 타자편에 서 보니 자기편이 생겼을 뿐입니다. 다윗의 이런 면모를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까? 본문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다윗은 어느 날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타작마당을 탈취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일라는 블레셋 진영 가까이에 위치한 유다의 한 성읍이었습니다. 타작마당을 탈취당했다는 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동족이 위험과 고통에 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다윗은 그 소식을 그저 흘겨 들을 수 없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그일라 사람들의 고통이 너무 가깝게 느껴졌을 터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즉각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삼상 23:2)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은 그 일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큰 어려움이 뒤따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물음에 하나님은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명하셨습니다(삼상 23:2). 이 과정을 지켜보았던 다윗의 사람들이 이제 다윗에게 하소연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려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삼상 23:3) 이들의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일라의 사람들이 비록 한 동족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편이라 할 수는 없는데, 그들을 위해 여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꼭 블레셋과 싸워야 하는지, 얼마든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그일라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윗에게는 자기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타인의 편에 서 보고 그의 편이 되어 주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자기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또 마냥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만류하는 사람들의 편에도 서 보면 그들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되거든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지금 어찌되었든 도망자 신세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 코가 석자’입니다. 솔직히 누구를 돕고 말고 할 여유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무심하거나 타인을 위한 선행에 무능한 것은 ‘제 코가 석자’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이 의식을 강화하는 요소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 처지나 문제는 과장하고 타인의 처지나 문제는 축소하는 내면의 경향성이 그 하나입니다. 타인을 돕는 일이 자기에게는 그저 손해일 뿐이라는 잘못된 믿음도 그 중 하나이고, 선행의 유익이 감수할 위험보다 더 작다는 성급한 판단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제 코가 석자’라는 의식이 과연 정말 우리 선행의 무능을 설명하는 핵심 이유일까요? ‘제 코가 석자’라는 의식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문제에만 골몰하느라 지향하고 구현해야 할 가치와 목표를 상실해 버린 게 핵심 문제 아닌가요?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닌 문제들 중에는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될 문제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문제들을 전부 붙잡고 늘어지느라 정작 꼭 이루고 싶고 일들, 꼭 이루어야 하는 일들에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도망 다닐 때 도망 다니더라도 타자의 편에 서 보고 그의 편이 되어 주는 이타적 행위 가치를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놓칠 순 없었습니다. 그게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소명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블레셋으로부터 그일라를 구원하는 일과 관련해 하나님께 한 번 더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재차 명하십니다.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삼상 23:4) 하나님의 뜻이 더 선명해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자기편 사람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그일라를 도와야 한다고 설득할 분명한 이유가 생겼습니다.

다윗의 이런 모습은 시편 27편 3절의 고백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다윗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이겼습니다. 그일라 성읍의 백성들을 구원해 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것은 자기편 만들기와는 무관합니다. 실제로도 그일라 백성들이 다윗의 편이 되진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오히려 다윗을 배신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일라를 위해 블레셋과 전투하는 동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울에게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사울은 당연히 군대를 동원하여 그일라 성읍을 쳐들어 올 채비를 갖춘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은 두 가지가 염려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자기 때문에 그일라 성읍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또 하나는 혹시 그일라 성읍 사람들이 사울에게 자기를 넘겨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사무엘상 23장 10-11절입니다.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하나님의 대답은 실망스런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쳐들어 올 것이고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을 내어 줄 것이라는 게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염려가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도 그일라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헤코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조용히 그일라를 빠져나왔을 뿐입니다. 물론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까 따질수조차 없었겠지요. 그래도 그들 속내를 알아버린 이상 그냥 두고 싶지 않았을 법한데 왜 조용히 물러났을까요? 다윗은 애초에 그일라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 생각 때문에 그들을 도왔던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처지를 생각해 보니 그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마음 때문에 도왔을 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행위라는 확신 때문에 그랬을 뿐입니다.

그러고보니 다윗이 그일라를 위해 블레셋 전투에 나섰을 때 그것은 예상되는 한 두 가지 위험을 감수한 정도의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위험, 곧 보상이 뒤따르지 않을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으며, 상처를 받거나 심지어 배신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그일라 백성들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윗은 그 과정을 통해 이전의 자기를 한층 더 초월하여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3장 13절을 보십시오. 그일라를 떠나올 때, 다윗의 사람이 600명이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아둘람 공동체의 리더로 섰을 때 그의 곁에 400명이 있었는데, 그 수가 600명으로 늘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수의 증가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윗의 내면의 역량이 자랐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을 통해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자기 문제에만 골몰하는 태도를 뛰어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의미와 가치를 구현하는 데는 때로 위험이 뒤따릅니다.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일에 참여해야 자기 문제로부터도 자유로워집니다. 그래야 자기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성숙해집니다. 어떤 위험 속에서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확인된 이 신앙의 신비가 오늘 우리 삶에도 재현되길 소망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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