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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무슨 표징인가?(이사야 7,10-25; 누가복음 2,8-17)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3.12.29 03:38
▲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을 통해 이어 가신다. ⓒGetty Images

이사야는 북이스라엘이 망하던 때를 전후해서 활동했던 남유다의 예언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북이스라엘이 시리아와 연합하여 남유다와 전쟁하던 때 있었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결국 이 전쟁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연합은 그 자체로 남유다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는데 충분했습니다(2절).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아하스 왕에게 보내 그를 안심시키며 이 전쟁은 저들의 패망으로 끝날 것이라고 일러줍니다. 그리고 이를 믿으라고 하시며, 믿지 않으면 굳게 설 수 없다고 경고하십니다.

이 경고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의 뜻을 밝히셨는데, 그 뜻을 전해 듣는 자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믿음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요? 하나님은 유다를 침입으로부터 보호하실 것입니다. 이 약속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위기 앞에 서있는 사람들이 이 약속을 의지한다면, 그들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의심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들의 패닉 상태는 당연히 계속될 것입니다. 눈앞의 현실은 바뀌지 않았는데, 이로써 유다의 패닉 상태가 극복되고 유다는 굳게 설 수 있었을까요? 우리에게도 자주 위기가 닥쳐오지만, 그 가운데서도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안정과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그 말을 들은 아하스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굳게 하시려고 그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제안하십니다. 하나님이 그의 말대로 하신다면, 아하스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그 제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이 제안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는 신조가 더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말씀 보다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이나 가르침을 더 따를 수 있음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것은 개별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집단적인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이 그래도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이같은 현상은 때로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사야는 아하스의 이 태도가 하나님을 괴롭히는 행위라고 규정합니다. 그의 점잖은 말이 실상은 자기의 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배격하는 불신과 불경의 말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에 대한 이사야의 말이 혼란스럽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다음 말은 우리가 흔히 예수의 출생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동정녀 탄생 예언입니다.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일반의 상식을 뛰어넘는 이 예언은 위기 앞의 유다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구원받을 것임을 함축합니다. 그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그 아이의 이름이 말해줍니다.

그렇다고 위기가 즉각 해소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점은 아이가 자라 나쁜 것/악을 버리고 좋은 것/선을 택할 줄 알 때입니다. 몇 살이 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최소한 서너 살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기 전에 지금의 위기가 해소될 것입니다.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앗수르에게 멸망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남유다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앗수르 때문에 남유다 역시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 아하스가 하나님의 제안을 거부했기 때문일까요? 구원의 계획에 심판이 끼어들었습니다. 임마누엘로 불릴 아기에 대한 예언과 심판예언이 번갈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롯이 구원의 희망을 노래했을 임마누엘 예언이 심판예언으로 뒤덮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더 강력한 외세의 침입이 있고, 다른 한편 그럼에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계속됩니다. 심판으로 황폐해진 땅에서 소와 양이 풀을 뜯고 사람들은 거기서 나오는 버터와 꿀을 먹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그 시점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을 취소하지는 않으셨지만 그 실현은 심판으로 지연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본문의 복잡함과 혼란스러움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의 응답과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소통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언제나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그의 역사에 근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을 가장한 불신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기를 빕니다.

임마누엘 예언이 예수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위에서 말한 것들을 함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밤입니다.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경이로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에게 나타나고 그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칩니다. 놀란 그들은 두려움에 떱니다. 처음 겪는 일일 것이고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주의 사자가 두려워 말라고 그들을 안심시키고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하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일까요? 구주 곧 그리스도 주님이 나신 것일까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는 것에 제동을 거는 말이 본문에 있습니다. 표징 또는 징조 등으로 옮길 수 있는 세메이온입니다. 말구유에 누인 아기, 그는 표징입니다.

그러면 그 아기는 무엇을 가리키는 표징일런지요? 그 뒤에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천사의 말이 전해집니다.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의 출생이 그렇다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를 피하려면 줄이지 말고 그대로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늘에서는 영광이 하나님의 것이 되고 땅에서는 선한 뜻의 사람들 가운데 평화가 있을 것이다’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출생을 찬양하는 말일까요? 그럴 수도 있으나 그렇게 읽기 보다는 예수의 출생이 표징으로서 가리키는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주의 나심이 지향하는 예언적 목표입니다.

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의 출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영광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지만 이를 탐하는 영적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출생과 함께 그들 모두가 하나님에게 굴복하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지는 때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선한 뜻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엔 안트로포이스 오이도키아스’는 선한 뜻의/기쁨의 사람들 가운데를 뜻합니다. 그러면 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 가운데’로 옮기는 것은 적절해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차라리 그 문맥에 가까울 것입니다. 선한 뜻을 이렇게 풀어 말할 수도 있겠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의 나심에서 구주의 나심을 볼 수 있고 그를 따라 삶을 바꿔가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예수의 출생은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며 하나님께서 승리하시는 때를 가리키는 표징입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고 이를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여 자기 삶의 지침으로 삼고 실천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은 평화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뻐하며 그에게서 이 구절이 노래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악의 세력을 굴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의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리는 어리석음이 우리의것이 되지 않게 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빕니다. 선한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고 이로써 온 땅에 평화의 세계가 확장되기를 빕니다. 고통과 불안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와진 평화의 세계가 그리스도의 나심과 함께 시작되는 성탄절이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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