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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왕국을 경계하다‘다윗, 한계를 딛고 주를 보다’ 7(사무엘상 24:6-7)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4.01.02 02:38
▲ Rembrandt, 「David and Jonathan」 (1642) ⓒWikipedia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다윗, 한계를 딛고 주를 보다’ 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자기 왕국을 경계하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다윗은 자기 처한 환경을 마냥 비관하진 않았습니다. 자기 머문 곳이 비록 광야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하나님의 은밀한 장막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기 문제에만 골몰하지도 않았습니다. ‘제 코가 석자’인 도망자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의 아픔을 외면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편 만들기에 힘쓰기보다 타자의 편에 서 보는 일에 힘썼습니다. 갖가지 위험을 감수하고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일라 성읍 사람들의 고통을 어루만졌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기꺼이 참여했습니다.

이것은 그저 손해 보는 일입니까? 그저 자기를 희생하는 일에 불과합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선행은 다윗의 성장과 성숙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도피해 있었을 때 그의 곁을 찾았던 사람은 400명이었습니다. 그일라 성읍 백성들을 돕고 그곳을 빠져나오는 이때 다윗 곁에는 이제 600명의 사람이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따르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돌볼만한 내적 역량이 갖춰졌고, 그만큼 더욱 성숙했다는 의미입니다. 주변에 그저 사람만 많아진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를 가까이하셨습니다. 사무엘상 23장 14절 하반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사울을 피해 그일라 성읍을 빠져나온 다윗은 십 광야 수풀로 이동했습니다. 도피 생활은 여전했지만, 다윗은 그렇다고 도피로 삶을 낭비하진 않았습니다. 도피로 삶을 일관하지도 않았습니다. 도피가 그의 삶의 목적도 아니었으니까요. 그가 도피를 자기 삶의 동력으로 삼은 적도 없으니까요. 그는 ‘나를 어떻게 지키나, 더 안전한 곳은 어디인가, 어떻게 위험을 대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만 자기 삶을 다 채운 게 아니었습니다. 사울에게 언제 발각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고 그게 삶의 이유도 아니었습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게 무엇입니까? 두려움입니다. 혹시 일어날지 모를 두려운 상황을 가정하고 그것을 대비하는 데 주력하는 게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의 삶입니다. 학생들은 꿈과 비전 때문이 아니라 대학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으로 공부하고, 청년들은 소망과 열정 때문이 아니라 취업을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으로 스펙을 쌓으며, 직장인들은 사명과 가치 때문이 아니라 성과가 없어 진급을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 두려운 상황을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게 우리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도피생활 중에도 도피로 삶을 일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중한 삶을 헛되이 낭비하는 건 오히려 왕궁에 편안하게 거주하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내 자리를 어떻게 지켜야 하나, 내 자리를 탐하는 다윗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그를 어떻게 잡아 죽이나’ 하는 문제로 자기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 자격이 없다’ 생각하며 스스로를 의심했고 ‘언제든 이 자리를 뺏길지 모른다’ 두려워 했습니다. ‘실제로 내 자리를 뺏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피해의식 속에 스스로를 가둬놓고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사무엘상 23장 21절, 사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백성을 긍휼히 여겨야 할 왕이 백성의 희생과 헌신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도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삶을 허비하는 대신, 미래 비전과 사명에 부합하는 가치를 지향하는 삶에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보다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힘입을 것인가, 하나님 주신 사명을 위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에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삶을 그렇게 이끄셨습니다. 그저 도망만 다니도록 내버려 두신 게 아니었습니다. 다윗도 그 하나님을 알아차리고 그 하나님께 순종했던 것입니다.

다윗을 찾아와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할 것을 격려했던 요나단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사무엘상 23장 17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적어도 이 말을 전하는 순간만큼은 다윗에게 요나단은 하나님의 사자와 같았다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말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요나단의 말을 이렇게 들었을 터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의 본질과 역할을 바르게 이해하고 훈련하고 그것을 현재에 미리 이행하는 삶을 살라.” 다윗이 요나단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었기에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었습니다.

물론 사울의 광기와 폭력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문제가 다윗에게도 결코 만만한 사안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사울의 집요한 추격을 분명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민하게 대비하고 움직여야 했습니다. 골을 넣어야 승리하는 축구일지라도 상대편의 골을 잘 막아내는 수비 전략이 없으면 결국 패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제때 잘 포착하여 십 광야에서 마온 광야로 이동했습니다. 마온 광야에서도 언제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채비를 갖췄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문제가 다윗의 사명과 가치 지향적 삶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문제 때문에 다윗은 한층 더 사명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 목숨만 지키면 됐을 시절에는 도피생활이 그저 비참한 일에 불과했겠지만, 공동체 전체의 안위를 지켜야 하는 지금에는 도피생활 자체가 하나님 주신 사명을 준비하고 훈련하고 이행하는 일의 일부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서 갖가지 삶의 문제를 보아야지 그 문제들에 속박되지 않고 사명과 가치 지향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윗이 도피생활 중에도 도피 문제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곧 그가 자신의 의지와 노력과 예측의 한계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손을 의식하고 신뢰하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은 다닐지언정 그저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지도 않았고, 비전과 사명을 포기하기도 않았습니다. 물론 자기 곁의 사람들을 방관하거나 내팽개치지도 않았습니다.

축구 경기에서 공격 축구를 지향할 때가 있고, 수비 축구를 지향할 때가 있습니다. 공격 축구를 지향할 때는 주로 약팀을 만났을 때일 것입니다. 승리에 대한 기대감과 자신감 없이 공격 축구를 구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두렵긴 해도 그를 하나님보다 두려워하진 않았고,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기는 해도 사울에게 잡혀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피생활 중에도 목표 지향적이고 가치 지향적인 삶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다윗의 그 믿음과 선택이 옳았습니다. 다윗에게 일어난 일을 보십시오. 십 광야에서 마온 광야로 도피하던 중 다윗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사울은 집요한 추격 끝에 마침내 마온 황무지에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서 잡기 직전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그때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전령이 급하게 사울에게 찾아와 이렇게 소식을 전합니다. 사무엘상 23장 27절입니다.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블레셋의 침략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사울은 급히 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아무리 제 할 일 안 하는 왕이라도 다른 나라의 침략마저 방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래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마온 광야를 빠져나와 안전하게 엔게디 요새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다윗은 분명히 깨달았을 터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자리에 친히 역사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빈틈을 메워 주시는구나. 빈틈이 큰 게 문제가 아니구나, 빈틈이 많은 게 문제가 아니구나. 그 빈틈에서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게 진짜 문제구나. 크고 작은 삶의 문제가 진짜 문제가 아니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게 진짜 문제이고 하나님 주신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 사명에 충실하지 않는 게 문제구나.’ 우리도 다윗처럼 확신해야 합니다. 문제투성이인 내 인생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 너머의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게 문제이고, 하나님 주시는 사명에 눈을 뜨지 못하는 게 문제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하심을 깊이 체험하는 동안 사울은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도무지 잡히지 않는 다윗, 그 다윗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제는 그 진실을 인정할 법도 한 데, 어찌된 영문인지 사울은 좀처럼 돌이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의 공격을 차단함으로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나자 사울은 다시 다윗을 좇기 시작합니다. 삼천 명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다윗이 머물고 있는 엔게디 광야로 향합니다.

사울은 도대체 무슨 마음일까요? 자기 삶에 정말 아무런 후회도 문제의식도 없었던 것일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이 모든 걸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윗을 잡아 죽이는 것 말고 더 이상 나한테 무슨 희망이 있나’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사울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 것이라면, 그런 생각들 다 거짓말 아닙니까? 진실은 무엇입니까? 돌이키기에 늦었다니요.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최적기는 항상 ‘지금’입니다. 다윗을 죽이는 게 희망이 될 수 있습니까? 오히려 다윗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갈망한다면 오히려 더 큰 희망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내면의 이런 거짓 생각도 문제이지만 그러나 사울의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핵심 문제는 그가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 왕국에 집착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의 제일의 자격과 역할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진짜 왕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왕 되심은 애써 외면하고 자신의 왕권에 도취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왕국이 되게 하는 데에는 무심하고 이스라엘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집착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디 사울의 문제이기만 합니까? 그런 행태는 사울의 죄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도 사울의 죄와 같은 죄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죄는 사실 온 인류가 안고 있는 원죄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도록 하와를 유혹했던 뱀이 하와에게 했던 말을 다시 상기해 보십시오. 창세기 3장 5절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와도, 아담도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선악과를 취했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게 핵심이 아닙니다.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는 욕망에 붙들려 하나님 같이 되려 했다는 게 핵심입니다.

우리의 죄의 본질은 우리의 자아를 하나님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자아를 하나님처럼 떠받드는 데 있습니다. 우리 자아의 힘을 하나님의 권능보다 우위에 두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거해야 할 하나님의 왕국을 그저 자아의 왕국으로 대체하려는 데 있습니다.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에덴동산 동편으로 더 멀리 도망한 가인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창세기 4장 16절 이하에 의하면, 그는 에덴 동쪽 놋 땅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문명의 역사가 실은 가인의 역사의 연장선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바탕으로 뒤돌아보면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룩한 문명이 마냥 찬란하고 편리하기만 합니까? 그 빛과 그림자 모두를 정직하게 들여다 보아야겠지요. 인류 문명의 역사는 잔혹한 전쟁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멈췄던 순간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전쟁과 폭력을 기준으로 보자면, 지구상에 인간보다 잔혹한 종은 없습니다. 동물의 세계에 등장하는 싸움은 생존과 관련된 일, 위계를 세우는 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동물의 전쟁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전쟁은 지독하고 잔인합니다. 극단적이고 사악합니다. 그 전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어디서든 새로운 전쟁이 분출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과 착취와 차별이 사라졌던 때가 과연 있었던가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자리잡았다고 계급과 계층의 차이가 사라졌던가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은 그저 과거의 이야기일 뿐인가요? 이렇게 사회적 현상 속에만 문명의 어둔 면이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닙니다. 물질적 풍요와 과학기술의 발달이 과연 인간 내면의 지독한 불안과 결핍과 고립감과 우울을 해결해 주었나요? 오히려 그것이 부와 지위에 대한 과도한 집착, 소비 중독, 감각적 쾌락과 관련된 뇌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중독, 각종 정신장애를 더 광범위하게 양산한 것은 아닌가요?

스티브 테일러는 “자아폭발”이라는 그의 책에서 인류 문명의 역사에 끊이질 않았던 이 모든 부정적 현상 이면에 자아의 비대화, 자아 맹신, 자의식 과잉이 가로놓여 있다고 바르게 통찰하고 논증한 바가 있습니다. 자아의식은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다’라는 의식입니다.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정신기능입니다. 그러나 자아의식에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분리의식이 그것입니다. 분리의식은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나와 너는 따로 따로다’라는 의식입니다. 신체를 경계로 분리되고 자존하는 독립된 개체라는 의식이 분리의식입니다. 분리의식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따로 따로이지만 동시에 서로 함께입니다. 우리는 독립된 개체이지만 결코 독립하여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아의 비대화, 자아 맹신, 자의식 과잉은 분리의식의 강화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우열다툼, 권력다툼, 서열화, 차별과 불평등, 자아우상화를 양산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의식 과잉 상태로 자아를 과정하고, 맹신하며, 우상화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기독교신앙은 그 근본원인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만유의 근원되신 하나님과의 단절과 불통에서 찾습니다. 만유를 초월해 계시지만 만유 안에 내재하시고 만유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각을 상실해 버린 데서 그 근본원인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모든 존재가 하나님으로 수렴되고 통일된다는 사실을 깊이 직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분리의식을 넘어서서 상호연관성을 강하게 의식하며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망각하면서부터 자의식 과잉 상태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자기 왕국을 좇기 시작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자기 뜻과 힘과 의지와 계획에 따라 이룩할 자기 왕국보다 하나님의 뜻과 힘과 의지와 섭리에 따라 이뤄질 하나님의 왕국을 더 갈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 밖의 자기 왕국은 허상이요, 망상일 뿐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왕국 속에서만 자기 왕국도 존립할 수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자기 왕국을 경계하고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엔게디 광야로 다윗을 잡으러 온 사울은 용변을 보러 근처 굴로 들어갔습니다. 이 굴 깊은 곳에 다윗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말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도망자 신세를 끝낼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었지요. 다윗의 사람들은 고무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당신이 저 원수를 직접 처리하시오’ 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찌 했습니까? 사울의 겉옷 자락을 조금 벨 뿐 사울을 해하지 않고 그냥 내보냈습니다. 사무엘상 24장 5절을 보니,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벤 것만으로도 마음이 찔렸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정말 죽일까? 눈 한 번 질금 감으면 이 도피 생활도 이제 끝날텐데’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찔렸습니다. 

다윗의 이런 반응은 어찌 된 일일까요? 사무엘상 24장 6절에서 다윗은 그 이유를 밝힙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다윗이 사울을 주로 인정하고 존중한 것은 그를 바로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을 왕으로 대한 진짜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의 진짜 왕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왕 되심에 순복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이유가 없었더라면, 다윗은 틀림없이 사울을 죽이고 자기 뜻과 의지에 따라 자기 왕국을 건설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이 신앙이 오늘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자의식 과잉 상태에서 자기중심적으로, 탐욕스럽게, 무자비한 방식으로 추구하는 자기 왕국을 경계하고 우리 삶을 하나님의 왕국의 무대로 내어 드려야 합니다. 자기 왕국 속에 고립되어 있기보다 하나님의 왕국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자아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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