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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진보를 의도하다‘삶의 기쁨을 회복하다’ 2(빌립보서 1:29)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4.02.27 03:27
▲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고난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Getty Images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삶의 기쁨을 회복하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믿음의 진보를 의도하다’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기뻐할 것을 힘주어 권면합니다. 그들은 지금 황제 숭배에 저항하고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당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기뻐하라고 말하는 건 바울이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해서 하는 말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바울이야말로 선교의 여정 내내 이루 말할 수 없는 박해와 고난을 받아왔습니다. 이 서신서를 쓰던 당시에는 심지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빌립보서를 그래서 옥중서신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 힘주어 말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괴로운 상황에서도 나름 기뻐할 이유를 찾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괴로워하는 자기 자신 안에서 기뻐할 이유를 찾았기 때문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모든 상황, 모든 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그가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실로 주님이 함께 계심을 그가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바울에게 기쁨은 기쁜 상황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 함께 계시는 주님께 대한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기쁨은 기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모든 감정을 가로질러 임재하시는 주님께 대한 긍정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독 빌립보교회 성도들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우선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바울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당시 꽤 많은 성도들이 내내 바울의 사도성을 미심쩍어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직계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현존했던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한마음으로 사도로서의 그의 권위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여러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혹시나 건강이 상하지 않을까 싶어 에바브로디도를 보내 돌보게 했습니다.

바울 역시도 1장 7절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자기 마음에 있다고 표현합니다. 늘상 마음이 많이 쓰일만큼 아낀다는 뜻일 터입니다. 8절에서는 그들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라고 표현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얼마나 사모하는지”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유달리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남달리 아끼고 그리워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에게 잘해주어서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꼽을 수 있습니다. 우선 7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여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우리는 이 표현 속에서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과 일종의 동질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7절을 근거로 말하자면,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선교와 전도 사역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난에도 함께했고, 그 고난 중에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에도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빌립보교회 성도들 상호간의 동질감은 고난과 은혜를 체험하면서 갖게 된 신앙의 가치와 의미를 그들이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어려운 일을 함께 겪고, 함께 이겨낸 사람들이 삶의 소중함, 삶의 성스러움을 공유하게 될 때 느끼는 동질감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남다르게 여겼던 또 하나는 이유는 8절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란 표현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일체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대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와 일체감을 가졌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참여이자 연합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에게는 이런 확신과 확증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은 결코 그저 나 혼자 당하는 억울하고 서럽고 야속한 일에 불과한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십자가 지신 주님과 이 고난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중이다.’ 이런 확신 때문에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 와중에도, 다른 말로 하자면, 죽을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 중에도, 두려움, 고립감, 허무와 절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당한 고난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난과는 그 성격과 의미가 다릅니다. 바울의 고난은 복음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 때문에 당한 고난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난은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잘못된 또는 해로운 생각과 행동을 반복하다 스스로 자초한 고난입니다. 예를 들면, 과도한 음주 습관으로 인해 간질환을 앓게 되는 경우가 그에 해당합니다. 둘째, 부조리하고 부정의한 이 세상에 살다보니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입니다. 예를 들면, 회사로부터 부당 해고를 당한다거나, 보이스피싱을 당한다거나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셋째, 합리적으로 해명이 안 되는, 도통 그 이유를 없는 고난입니다. 대표적으로 욥이 당한 고난이 그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당한 고난은 이것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선 이 고난은 의도치 않게 갑작스럽게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그런 유형의 고난이 아닙니다. 충분히 예측되지만 기꺼이 감수하는 고난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아는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예견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입성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수차례 그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군인들에게 잡히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사실 얼마든지 그 고난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하셨고 감내하셨습니다.

바울도 박해를 예견했습니다. 3차 선교여행을 마무리할 즈음 그는 성령님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당할 결박과 환난을 예고받았습니다. 바울의 제자들은 당연히 바울의 예루살렘 입성을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1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이 당한 고난은 주 예수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하여 기꺼이 감수하고 감내한 고난입니다. 사실 억울하기로 치면 이보다 더 억울한 고난이 있을 수 있을까요? 남을 위해 좋은 일 하다 다치기라도 해보세요. 더 속상하겠지요. 하지만 바울에게는 주님 때문에, 주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감수하는 고난이었기에 억울함, 서러움, 원망 같은 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바울이 당한 고난은 의도가 담긴 고난이기도 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그는 결박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고난의 여정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의도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 그저 고통스런 울부짖음이나 한탄으로 그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그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합류하길 의도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심정으로 자기 고난을 감수하고 감내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우리가 구원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그 빛을 발했고,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참여라면, 그것이 결코 허무한 일이나 무의미한 일로 귀결될 수 없음을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1장 12절에서 자기가 당한 일로 인해서 복음 전파에 진전이 이루어졌다 고백합니다. 14절에서는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음으로 인해서 오히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음을 상기시킵니다. 18절에서는 심지어 자기를 시기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감옥에 갇힌 자기를 의식하면서 경쟁심에 이끌려 복음 전파에 힘쓴 일을 가리켜 잘 된 일이라 평가합니다. 어찌되었든 그리스도가 더욱 널리 전파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기뻐하라고까지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의도하면서 또 한 가지 덧붙여 의도한 게 있습니다. 믿음의 진보가 그것입니다. 1장 19-20절에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이 풀려날 것을 확신하면서, 자신이 고난 중에도 기대하고 소망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부끄러워하기보다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으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한마디로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리스도의 흔적과 향기가 드러나길 소망했습니다.

바울은 21절 이하에서 또 이렇게 밝힙니다. 의역해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나, 감옥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도 괜찮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되어 이 고난도 끝이 날 테니까요. 하지만 여러분들을 생각하면, 더 살아야하겠지요. 육신으로 사는 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을 멈추지 않는 한, 이 고난은 지속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나와 함께 주님의 도를 좇는 여러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는 길이라면 기꺼이 그것을 감수하겠습니다.’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바울이 고난 중에도 기뻐할 것을 권면한 그 궁극적 이유가 말입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하라는 말은 내가 직면한 고난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되길 의도하라는 뜻이자, 동시에 그 고난이 믿음의 진보로 이어지길 의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고난이 내게 오히려 유익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도 은혜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받는 것도 은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의도한 믿음의 진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2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고난을 감수하고 이겨낸 자신의 이야기로 말미암아 예수 믿는 자부심이 높아질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진보는 예수 믿는 자부심의 향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삶의 태도, 그분의 가르침, 지향가치과 존재양식, 그 모두를 내 삶의 푯대로 삼고 내 삶에 이식하기 위해서 부단히 정진하며 누리는 삶의 충만함과 풍요함, 이것이 예수 믿는 자부심입니다. 이 자부심이 깊어지는 게 믿음의 진보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방식대로 삶을 사는 일이 때로 고되고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기꺼이 감내하는 마음이 또 예수 믿는 자부심입니다. 이이런 자부심 있어야 또 예수님의 방식대로 사는 삶의 과정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기도 합니다.

바울이 고난 중에도 기뻐하며 의도한, 또 다른 믿음의 진보는 27절 상반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당부합니다. 믿음의 진보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 나타납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복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을 통해 성취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이니,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진보는 이 세상에 살되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며 사는 삶의 열정과 열심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려면 때로 크고 작은 불편함과 괴로움을 감내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감수해야 할 희생과 대가가 있습니다. ‘나만 이렇게 공정하게, 진실하게, 친절하게, 자비롭게 살면 뭐하나?’ 회의가 들 수도 있습니다. ‘괜히 나만 손해보는 것 아닌가?’ 후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고 감수하는 게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진수와 신비를 맛보는 게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은 개인적 차원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홀로이지만 또한 함께입니다. 바울은 27절 하반절에서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할 것을 요청합니다. 믿음의 진보는 성도들과의 하나됨으로, 곧 얼마나 다른 성도들과 잘 연합하고 협력하느냐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함께 걷는 과정에서 깊어집니다. 삶의 배경도, 자라온 환경도, 기질도, 성격도, 다 다른 우리가 하나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요? 다양한 갈등과 신경전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기꺼이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감내하는 게 또 성도들과의 하나됨을 촉진하는 길입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하나이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이 하나이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도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령님과 내밀한 관계를 맺을수록 서로의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더 잘 알아차리게 됩니다. 서로의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알아차려야 우리는 서로 깊이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한마음으로 분별하고 한 뜻으로 그것을 이루기 위해 협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성도들과의 연합과 상호협력에는 서로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알아차리는 일과 더불어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1장 9절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사랑과 지식과 총명이 풍요해지길 간구했습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기뻐하며 의도해야 할 믿음의 진보는 곧 사랑의 진보입니다. 이 사랑은 지식과 총명을 필요로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랑에는 타인에 대한 이해, 공감적 인식, 사랑을 주기 위한 적합한 방식과 전략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에는 감내해야 할 불편함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감수해야 할 희생과 대가가 있습니다. 사랑하다보면 어떤 때는 외롭고 어떤 때는 속상합니다. 어떤 때는 화가 나고 어떤 때는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고 감수하는 게 또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고난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고 감내하면 반드시 그것이 믿음의 진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했고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도 믿음 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중에도 믿음의 진보를 의도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고난 중에 기뻐하는 일의 본질입니다. 어찌보면 최고의 위로였습니다. ‘힘든 것 알지만, 결코 힘든 것으로 그치진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지만, 분명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고난들 중 상당수는 사실 우리가 뭔가를 잘못해서 당하는 것이라기보다 나름대로 잘 살아보려 애쓰다 당하는 것들입니다. 나름 의롭게 살아보려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믿음대로 살아보려 힘씀에도 불구하고, 선한 마음으로 살아보려 의도함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것들입니다. 못된 마음으로, 제 잇속만 챙기려는 요량으로,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다 당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난이 그렇게 억울하고 서럽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고난 중에도 기뻐하라는 바울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삶이 힘겹고 고되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 지금 ‘이제는 나를 바라보렴. 이제는 나를 더 가까이하렴’ 하고 말씀하시는구나. 날 위해 기꺼이 십자가 지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외로워하고 서러워하고 억울해할 필요가 어디에 있나?’ 삶이 힘겹고 고되면, 그것을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합류하고 참여할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품었던 그 희망, 우리가 기대했던 그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 주님과 동행하는 이 고난의 여정을 통해 꽃피고 열매 맺길 의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이 힘겹고 고되면, 또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주님이 내게 이 고난을 허용하실 때, 주님은 내 성장과 성숙을 기대하시면서 허용하셨을 것이 분명해. 주님은 이 고난을 통해서도 분명히 나를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실 수 있어. 이 고난을 내 믿음의 진보, 내적 성장의 기회로 삼아 보자. 그러러면 나는 무엇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우리의 고난을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로 삼았다면, 주님의 십자가에 나는 무엇을 못박아야 하는지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성찰적 관점에서, 돌이킴의 관점에서 자기 고난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고난을 믿음의 진보로 이어지게 하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쁜 일에 기뻐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기뻐할 수 없는 일에 기뻐할 수 있으면 그것은 거룩한 일입니다. 우리 삶이 거룩하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삶으로 승화되려면 고난 중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삶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삶입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적같은 삶이기도 합니다. 이 거룩한 삶을 위해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길을 걸으시길 소망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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