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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던지다‘삶의 기쁨을 회복하다’ 3(빌립보서 2:17-18)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4.03.05 01:14
▲ Filippo Falciatore, 「Joseph and Potiphar's Wife」 ⓒWikipedia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삶의 기쁨을 회복하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나를 던지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 나누겠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고난 중에도 기뻐할 것을 권면합니다. 믿음 가지고 선한 마음으로 나름 정말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중에도 고난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서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을 바라보는 게 고난 중에 기뻐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고난의 길을 걷는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신뢰하고 알아차리는 게 바로 고난 중에 기뻐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고난 중에 기뻐하라는 건 우리의 고난의 길이 믿음의 진보,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지길 의도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졌듯, 우리의 고난은 그저 괴로운 일로, 허무한 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으면, 고난도 하나님 주신 은혜임을 깨닫고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빌립보서 2장에서 고난 중에도 우리가 견지해야 할 중요한 태도가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겸손이 그것입니다. 그가 겸손을 상기시키는 데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성도들이 무슨 일을 하든 서로 한마음, 한뜻으로 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빌 2:2). 또 하나는 겸손이 그리스도의 마음의 요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렇게 하나됨을 중시하는 것일까요? 분열보다 하나가 낫다는 식으로 단순히 당위적인 차원에서 그리한 건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믿는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이며, 하나님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엡 4:4-6). 동시에 우리가 지체로 속해 있는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신했고 직관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교회의 분열은 곧 그리스도를 해하는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서로를 떼어놓는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강조하는 하나됨은 우리 개개인의 개성이나 고유성을 말살하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하나되라는 건 다 똑같아지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찬미의 대상으로 삼은 일에 하나가 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삶의 토대와 삶의 궁극적 목적을 찾는 일에,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본질과 소명을 발견하는 일에, 그리스도께 부여하신 사명에 헌신하는 일에 하나가 되라는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사는 일로 하나가 되라는 말입니다. 엄밀히 말해 하나됨은 우리가 억지 노력으로 만들어 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루시는 일입니다(엡 4:3).

바울은 교회의 분열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다툼과 허영을 꼽고 있습니다(빌 2:3). 여기에서 다툼은 근원적으로 우열 다툼을 의미합니다. 누가 더 나은 사람이고 누가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에 관한 다툼 말입니다. 허영은 근원적으로 자의식 과잉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남들 눈에 그럴싸 하게 보이는 과장된 나에 집착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열 다툼과 자의식 과잉 상태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자아의 왕국에나 통용되는 행태입니다. 교회에서 다툼과 허영을 일삼는다면, 그건 하나님 나라의 전초 기지에서 자아의 왕국을 만드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사실 그것은 겉으로 볼 때는 자아를 강화시키주는 행위로 보이지만, 자아를 강화시켜주기는커녕 근본적으로 그건 그저 자아의 빈곤과 결핍에서 비롯된 행위에 불과합니다. 다툼과 허영은 자존심을 내세우는 행위이지만, 실상은 그저 자존감을 결여한 행위을 뿐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는 오히려 자아를 더 쉽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정한 자존감은 자아 강화 행위,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아 이미지 강화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진짜 나를 알고, 소명을 발견하는 데서, 주어진 사명에 헌신하는 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다투기보다 헌신합니다.

이때 헌신은 자기를 잊어버릴만큼 중요한 뭔가에 몰입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자기를 던지는 행위이자 자기를 쏟아붓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소명이나 사명에 헌신하는 행위는 바울이 강조한 겸손의 태도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겸손이 무엇이길래요? 바울은 겸손을 추상적 언어로 정의내리기보다 구체적 행위로 제시합니다.

2장 3절에서,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툼과 허영을 대체하는 행위로 제시된 것이면서, 동시에 겸손의 핵심을 간파한 실천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겸손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행위는 곧 자아를 내려놓는 행위와 같습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면, 우열 다툼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자기를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니까요.

자아를 내려놓는 게 무턱대고 가능하진 않겠지요. 자아를 내려놓아도 좋을만큼의 이유가 있어야겠지요. 바울은 자아를 내려놓되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자아를 내려놓으라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인 다른 사람을 존귀히 여기기 위해서, 그를 존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자아를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본질입니다. 바울은 2장 5절 이하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곧 그분의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자기를 비우고 낮춰 사람과 같이 되신 행위로 설명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람인 우리를 존귀히 여기시려고, 사랑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행위는 또 다른 한편으로 자아를 던지고 쏟아붓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에 자아를 던지고 쏟아부으라는 말입니까? 바울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권면에 연이어 2장 4절에서 제시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바울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행위, 곧 자기를 내려놓는 사랑의 행위는 남을 돌보는 일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모습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고 낮춰 사람이 되어 우리 곁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빌 2:8). 무엇 때문에 그리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명을 따라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우리 모두를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겸손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해 자기를 던지고 쏟아붓는 행위, 곧 헌신의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2장 4절에서 이렇게 성도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그 일이 자기 기쁨의 원천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게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이기도 했고, 그 소명에 헌신하는 기쁨이 무엇인지도 그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했던 바울의 고백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바울은 성도들의 믿음의 제물과 섬김에 자기 자신을 다 쏟아붓는 일이 있더라도 그 일을 기뻐할 것이라 고백합니다. 성도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일,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그 믿음을 자라게 하며, 그 믿음으로 성도들이 서로 섬기도록 양육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헌신하는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명에 헌신하는 기쁨과 관련해 우리가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행복이 아니라 행복의 이유, 곧 삶의 의미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행복은 행복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고 추구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요소를 크게 세 가지로 꼽습니다. 삶의 목적으로서의 소명, 사랑의 관계, 고난에 대한 구속적 관점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표현한 기쁨의 원천과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바울은 앞서 고난 중에 기뻐할 것을 권면하면서 고난이 십자가 은혜에 대한 체험과 믿음의 진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또 바울은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존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기쁨도 강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명에 헌신하는 기쁨도 이야기했습니다. 삶의 의미와 관련된 이 세 가지 요소 중 소명은 그 모두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명은 항상 사랑의 실천, 하나됨의 관계의 맥락에서 주어집니다. 그 소명을 찾고 그 소명에 헌신하는 과정에는 분명 고난도 뒤따릅니다. 하지만 그 고난은 그저 괴로움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내적 성장과 참된 만족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가 시급히 되찾아야 할 것은 소명입니다. 제프 고인스는 ‘일의 기술’에서 현대인들이 자기 일에 헌신하지 못하는 행태를 꼬집으면서 그 근본 원인을 소명을 상실한 데서 찾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통계에 의하면, 조사 대상자 중 13%만이 자기 일에 진정으로 몰입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자기 일에 몰입하지 못한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자기 일에 온전히 헌신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하는 일이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먹고 살아야 하니, 그저 돈벌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에 불과하다면 헌신은 애초에 불가능할 것입니다.

자기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으면, 곧 소명이 없으면 헌신도 없습니다. 헌신이 없으면 진정한 만족과 기쁨도 없습니다. 제프 고인스는 자기 소명을 찾고, 그 소명에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면,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손해를 끼치고 세상에도 손해를 끼치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헌신이 주는 유익에 대해 대략 이렇게 말합니다. ‘헌신은 즉각적 만족을 장기적 보상으로 전환시켜준다. 헌신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변화는 시일이 소요됨을 깨닫게 된다. 헌신은 우리의 성품을 고양시켜 주고, 인내의 열매, 성장의 기쁨을 가져다준다.’

헌신을 무엇이라 했습니까? 소명에 나를 던지는 행위라 했습니다. 나의 시간, 주의, 노력, 재능, 힘, 에너지를 소명에 쏟아붓는 행위라 했습니다. 헌신과 열정에 관해 안도현 시인은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데 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 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

제프 고인스는 헌신은 소명을 찾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언급합니다. 그는 소명이 없어 헌신할 수 없다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헌신함으로써 그 소명을 찾으라 조언합니다. 이와 관련해 요셉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 질투로 애굽의 노예로 팔려 가 애굽 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종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했던 것은 제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상황을 받아들이되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동행하는 일에 주의집중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눈에 띄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헌신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감춰질리가 없지요. 보디발은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기 집안 살림살이 전부를 맡겼습니다. 의도한 것도, 계획한 것도 아니지만, 요셉은 자기에게 주어진 그 일에도 충실했을 터입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길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집안 살림을 맡은 이후 보디발의 집은 더욱 번창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한 가지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은 단호했습니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고, 하나님 앞에 범죄할 수 없다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화가 난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모함했습니다. 그 일로 요셉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일에 그저 정직하고 충실하게 일했을 뿐인데 요셉은 또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 상황도 받아들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 그 일에 주의집중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는 간수장의 눈에 띄었습니다. 간수장은 요셉에게 감옥의 살림살이 전체를 맡겼습니다. 의도한 것도, 계획한 것도 아니지만 요셉은 이번에도 주어진 일에 정직하고 충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왕의 심기를 건드려 감옥에 갇히게 된 고위관료였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수종을 들게 됩니다.

이 두 고위관료는 어느날 꿈을 꿉니다. 자기 운명에 관한 꿈이었으나 도통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요셉이 그 꿈 이야기를 해석해 줍니다. 꿈의 메시지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복권되고 떡 맡은 관원장은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2년 후 어느날 이번에는 애굽의 바로 왕이 해몽이 불가한 꿈을 꿉니다. 바로 왕은 전국 각지의  점성술가와 현인들을 불러 꿈 해몽을 요청했지만 속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꿈 해몽의 덕을 보았던지라 바로왕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요셉은 바로왕의 꿈도 해몽해 주었습니다.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에 관한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대처방안도 제시했습니다. 바로는 전격적으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요셉은 이번에도 이 상황을 의연하게 받아들였고, 훌륭하게 그 임무를 감당해냈습니다.

타국의 노예로 팔려 왔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 일 자체도 물론 놀라운 일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 역할을 의연하고 훌륭하게 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 비밀은 당연히 요셉의 앞선 삶의 행보에 있습니다. 요셉은 남의 집 종살이를 할 때도, 자기 일에 헌신적이었습니다. 그 집 살림살이 전체를 맡아 일했을 때도, 그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감옥의 살림살이를 맡아 일했을 때도, 그 일에 혼신을 다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는 순간, 요셉은 분명히 깨닫게 되었을 터입니다. ‘지나온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어떤 상황에 처해 있어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의도하며 그 상황에 주어진 일에 충실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이렇게 애굽의 총리 삼으시려 그 과정을 겪게 하셨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 이야기 속에서 우리 삶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그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주어져 있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헌신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이게 내 삶의 전부인가’는 내면의 소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이 바로 소명입니다. 이 부르심에 근거해 우리 삶을 다시 돌아보면 지금 할 일이 보일 것입니다. 지금 헌신할 일이 보일 것입니다. 자기를 던지고 자기를 쏟아부을 일이 보일 것입니다. 소명에 헌신하는 기쁨을 누리고 맛볼 기회가 열릴 것입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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