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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배경의 진실고흐와 산책하기 (28)
최광열 목사(아리랑인문지식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24.03.09 04:06
▲ 빈센트 반 고흐가 고르디나 드 호르트를 모델 삼아 그린 그림들(위에서 시계방향으로) / 〈고르디나 드 호르트의 초상〉 (뉘넌 1885. 3-4, 판지에 캔버스 유채, 41×32.5cm, 개인소장), 〈감자 먹는 사람들〉 (부분, 1885. 4 뉘넌, 캔버스에 유채, 82×114cm, 반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흰 보닛을 쓴 여인의 두상〉 (1885. 4 뉘넌, 판지에 캔버스 유채, 47.5×35.5cm, 스코틀랜드미술관, 에딘버러), 〈여자의 두상〉 (1885. 3 뉘넌, 캔버스에 유채, 42.7×33.5cm, 반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빈센트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린 후 작품 속 왼쪽에 흰색 보닛(챙이 없는 모자)을 쓴 여인 고르디나 드 흐로트를 모델 삼아 몇 점의 초상화를 더 그렸다. 여성 농부들이 쓴 흰색 모자가 햇볕에 그을린 얼굴빛과 대비를 이루어 거기에 스민 진실을 묘사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델을 구할 돈이 없는 가난한 화가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위장한 진실을 표현한 화가는 많다. 네덜란드 황금시대에 풍속화를 그려 주로 일하는 사람들을 묘사한 헤라르트 테르 뷔르흐(Gerard ter Borch, 1617~1681)나 아드리엔 반 오스타테(Ostadf, 1610~1685), 심지어 에스파냐의 거장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 조차도 ‘일하는 사람’을 그린 것이 아니라 ‘모델’을 그렸다. 빈센트는 모델을 통해 실제보다 더 사실적 그림을 그리는 작위성에 의문을 품었다.

한 모델로 성녀를 묘사할 수도 있고 탕녀로 그릴 수도 있다. 화가의 재능이 변형과 재해석을 낳는다. 한 마디로 거짓이지만 사실보다 사실적이라는 점에서 우울하다. 빈센트는 실제 인물을 통해 진실을 묘사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흐로트는 아주 좋은 모델이었다.

그녀를 그린 그림들은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한결같이 검은 배경을 하고 있다. 어둠은 진실을 드러내는 최적의 배경이다. 빈센트의 심성은 어둠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 어렵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늘이 있어야 인생의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보닛을 쓰고 정면을 마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경건한 노동과 강인한 삶의 진실을 읽을 수 있다. 그가 그리고 싶었던 것, 바로 진실이다.

이 무렵 흐로트가 임신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평소에 빈센트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로마가톨릭교회 신부가 빈센트를 태아의 아버지라고 지목하였다. 진실을 추구하는 빈센트로서는 여간 당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농부의 진한 생명력과 건강한 노동에 담긴 진실을 찾는 화가에게는 모욕이었다.

이유 없는 고난이 더러 있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런 일을 겪으며 인생의 배경은 어두워지고 인생의 그림자는 짙어진다. 그리고 비로소 생명과 사랑의 진실에 근접한다. 빈센트도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었을까?

최광열 목사(아리랑인문지식연구소 연구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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