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암 박은식 선생

“역사가 보존된다는 것은 곧 나라의 혼(魂)이 보존된다는 것이다.”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이 국권 상실의 처절한 역사의 현장에서 뼈아픈 고통을 삼키며 써 내려간 『한국통사(韓國痛史, 1915)』에서 내린 결론 중의 결론이다.

이렇듯 한 나라의 역사 인식은 국가의 존속과 번영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도 불구하고 요즈음 질 낮은 정치가들의 역사 ‘갖다 붙이기’와 ‘억지 부리기’로 국민들은 혼란스럽고 또 고통스럽다.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은 선거철이면 더욱더 기승을 부린다. 난장판이 따로 없다. 이런 표현 좀 그렇지만 정말로 머리가 나쁜 건지 가슴이 나쁜 건지 구별하기 힘들다. “지금 한국은 온 국민이 역사 공부 열풍 중!” 뭐 이런 보도가 세계 언론에 도배되는 상상을 하면서 글 문을 열어본다.

1919년 3월 1일에 시작하여 전국 곳곳에서 많은 국민들이 참여하였던 독립 만세 운동은 단순한 시위운동 차원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이라는 구체적 정치 행위가 역사적 사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해 4월11일 중국 상하이에 터를 잡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이 공포한 대한민국임시정부 헌장은 대한민국이 명확하게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임을 선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 독립국은 왕이나 황제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인민이 주체이며 삼권이 분립된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고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완벽한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왕조적 질서가 사라지고 이제 새로운 민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그리고 이 조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물론 1948년에 수립된 실제 대한민국 정부의 헌법으로 계승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서양에 프랑스혁명이 있다면 동양에는 대한민국의 ‘3·1혁명’이 있다. 민주주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혁명과 민주·민본주의의 기초를 놓은 3·1혁명이 나란히 어깨를 견주고 있다. 동양에서 일본이 메이지 유신(1868)을 통하여 근대화의 선두 주자로 기록되기는 하나 민주주의 역사로 보면 메이지 유신은 왕정을 복고하고 중앙집권을 확립하여 정치권력을 통일하는 기제였을 뿐이다. 지금도 여전히 천황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내각을 운영하는 일본 정부의 행태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모습 측면에서 어쩐지 어설프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가? 독일이 전후에 빌리 브란트 총리가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어 사과하고 금전적 배상을 시행하여 깔끔하게 정리하는 당당한 모습을 보인 반면 일본은 사과와 배상을 외면하고 모른 척하는 쪼잔하고 비굴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홍익인간》이나 《자유·평등·우애》 같은 진귀한 가치관은 배울 기회가 별로 없었고 사무라이 무사 정신만 잔상으로 남아 그들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시작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내각의 국무총리는 이승만이었다. 그러나 행정수반의 명칭에 불만이 있었는지 이승만은 직에도 없는 대통령 호칭을 사용하다가 안창호 등 구성원들과 불화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후에 임시의정원의 추대에 따라 초대 임시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분열과 혼란이 계속되었고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강하게 주장했던 이승만은 직무 수행 방치 등의 이유로 탄핵 되어 대통령직을 박탈당하였고 이때 박은식이 2대 임시대통령에 취임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는 신채호, 조소앙, 박은식 등 기라성 같은 학자급 정치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는데 최고 지식인들의 적극적 참여가 특징이라면 특징일 것이다.

이들 중 박은식의 인물을 거론할 때 흔히 사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애국계몽운동가 그리고 정치가라고 한다. 대통령까지 하면서 통합적 정치력을 발휘하였으니 최고의 정치가임이 틀림없지만 그의 인물됨에는 역시 역사학자로서의 탁월성을 빼놓을 수가 없다. 모두에 이야기한 『한국통사』 외에도 마치 혈서처럼 피로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1920)』를 비롯하여 다수의 보석 같은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독립운동사가 아닌 빛나는 광복사(光復史) 쓰기를 소망하였으나 “나는 본래부터 우리나라가 반드시 광복하는 날이 있을 것을 믿는다.”는 신앙에 가까운 고백을 남기고 독립을 미처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한국통사에서 백암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인데,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역사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아픔의 역사(痛史)를 남김으로 지통감(知痛感)의 정신을 역설하였다. 백암의 뜻은 남북분단으로 깨어진 평화에 신음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생한 교훈으로 다가온다. 아프니까 사람이다. 아플 줄 알아야 인간이고 시민이고 국민이다. 무감각하게 내뱉는 평화를 깨뜨리는 말일랑 제발 멈추고 신나는 듯 전쟁을 외치는 짓은 이제 정말 그만하자. ‘말이 씨가 된다.’ 하여 말조심을 강하게 경고하였던 우리 조상들의 깔끔한 언어생활을 마음에 담아야 할 것이다.

백암 박은식의 삶은 현재의 고통 속에서도 미래의 희망을 응시하는 시련과 극복의 지혜를 안겨준다. 아프고 피를 말리는 한계상황 속에서도 광명을 향한 상상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뼈아픈(痛) 역사, 피맺힌(血) 역사의 긴 터널을 지나 이제 빛나는(光) 역사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려가자.

양재섭(평화수필가)  peace-essayist@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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