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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아는 지식을 채우다‘삶의 기쁨을 회복하다’ 4(빌립보서 3장8-9)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4.03.12 04:20
▲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채워져 있는가. ⓒGetty Images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삶의 기쁨을 회복하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으로 ‘예수를 아는 지식을 채우다’ 이런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바울이 고난 중에도 기뻐하라 권면한 빌립보교회는 사실 당시 이중고를 겪고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안으로는 지도자들의 다툼과 허영으로 분열의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됨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 내부 분열을 조장했던 대표적 집단이 할례당이었습니다.

할례당에 관해 자세한 묘사는 없으나, 여러 정황들을 근거로 추론해 보자면, 이들은 대체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주장은 이렇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할례도 함께 받아야 한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통해 유대인의 신분도 획득해야 한다는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할례가 지닌 본질적 의미와도 상충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 관계를 맺으신 후에 그것을 확증하는 차원에서 할례를 행하라 명하셨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조건이 아니라 그 관계가 성사되었음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징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일은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는 무효한 일임을 그간 여러 차례 밝혀 왔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술된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였던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이방인들에게 더 이상 할례를 강요하지 말자는 결의도 이끌어 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내부에 침투한 할례당의 주장에 대해 단호하게 맞설 것을 요청했습니다(빌 3:2). 그러나 그는 할례 의식이 갖고 있던 본질적 의미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징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징표로 삼아야 할 요소를 세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그 첫 번째 요소가 ‘성령으로 봉사’입니다(빌 3:3). 여기에서 말하는 봉사는 예배를 포함해서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모든 헌신적 활동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본질적 활동에 대한 참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성령으로 봉사’에서 방점은 ‘성령으로’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는 우리보다 훨씬 더 이타적으로 선한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것을 다 내어주며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돌보는 사람들, 정말 많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도덕적 우월의식을 갖고 있어선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사람들의 봉사와 그리스도인의 봉사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단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사랑 때문에 봉사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봉사합니다. 곧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터치와 이끄심에 감격하여 그 성령께 순복함으로써 봉사합니다. 물론 이것을 다른 사람이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주의 이름으로, 주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봉사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주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 때문에 봉사하는 것인지, 정말 성령과의 교통 속에서 봉사하는 것인지, 겉으로 보아서는 구분이 안 갑니다. 오직 주님만이 아실 뿐입니다. 심지어는 자기도 모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위장과 자기 합리화의 귀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에 근거해 봉사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단서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봉사하면서 그 결과와 상관없이 봉사 그 자체 만으로 기쁘고 감사한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 저마다 감사의 이유들을 헤아려 볼 것입니다. 주로 우리 손에 쥔 것들, 우리 손으로 해낸 일들, 우리 노력 이상의 은혜로 성취된 것들을 감사의 이유로 제시하겠지요. 그 수많은 감사의 이유들 중에 만약 주를 위해 헌신하면서 누린 기쁨 때문에 감사하다는 이유가 있다면, 내가 행하는 봉사가 성령으로 인한 봉사라 확신해도 좋을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은 성령으로 인한 봉사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확인시켜 주는 징표라 말하고 있으니, ‘나 꽤 괜찮은 그리스도인이구나’ 자부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기 위해 바울이 제시한 두 번째 징표는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입니다(빌 3:3). 우리가 하는 자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랑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 맞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랑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뭔가 자랑하고 싶거든 예수님께서도 기뻐하실 만한 것을 자랑하라는 뜻일 터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 앞에 외모, 출신, 학력, 재력, 이력 이런 것들 자랑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믿음의 진정성, 정직함, 회개의 애통함, 은혜에 대한 간절함, 선의, 헌신의 태도, 고난 중에도 기뻐함, 이런 게 주 앞에 더 자랑거리 아니겠습니까? 자녀들 키우면서 우리 흔히 이런 말 많이 하지요? ‘성적을 칭찬하지 말고, 그 성적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칭찬하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취한 것들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떤 믿음과 어떤 태도로 살았느냐가 진정한 자랑거리일 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랑이란 동시에 우리가 취하거나 이룬 모든 게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서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것임을 인정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앞서 2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뜻을 소망하고 실천하게 하신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자랑이 예수 안에서의 자랑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뭔가 자랑거리가 생겼을 때, 그 자랑거리로 인해서 남들 앞에 우쭐한 마음이 드는지, 남들 무시하는 교만한 마음이 생기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확신이 깊어지고 더욱 겸손해 지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후자라면 예수 안에서의 자랑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자랑이란 게 감사와 서로 연결되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감사할 때 주로 자랑거리들을 이유로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곧 우리의 감사는 자기 자랑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건 곧 감사로 인해 나를 드러내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감사로 인해 내가 드러나는 게 아니라 주님이 드러난다면 그건 예수로 인한 자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논지에 따르면, 이렇게 우리의 자랑이 예수 안에서의 자랑이라면, ‘나 꽤 괜찮은 그리스도인이구나’ 자부해도 좋을 것입니다.

바울이 제시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세 번째 징표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입니다(빌3:8). 바울은 3장 4절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흔히 자기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내세우고 자랑하는 것들은 대개 육체를 신뢰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음을 꼬집어 비판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교회에 침투하여 거짓 궤설을 늘어 놓는 많은 거짓 교사들은 권위 있는 누군가가 써 준 추천장과 이력서를 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출신과 학력을 권위로 내세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육적인 자랑을 하려 들자면 그도 뭐 하나 빠질 것이 없긴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빌 3:5-8).

정말 그랬습니다. 사도행전의 보고에 의하면, 바울은 지금의 튀르키예 중남부에 위치한 다소의 디아스포라 유대 공동체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를 일찍이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당시 유대교 최고의 학자로 알려진 가말리엘 문하에 들어가 율법을 철저히 공부했습니다. 그는 헬라의 언어와 학문에도 밝았고, 히브리어와 율법에도 정통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얻었을 만큼 좋은 가문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전도유망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순간, 이 모든 것에 대한 자부심과 의존성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비난과 조롱, 박해와 핍박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예수를 아는 지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예수를 구원의 통로로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빌 3:9). 이때 구원은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는 일입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져 하나님과 다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안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일이요, 예수의 십자가 사랑에 근거해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은총을 받는 일이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함께 사는 일을 의미합니다.

둘째, 예수를 아는 지식이란 그분의 부활의 권능을 믿고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빌 3:10). 그분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신 기적 사건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분의 부활 사건은 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분의 삶과 인격과 가르침에서 드러난 모든 것이 무의미하거나 무용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것임을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그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요, 실패가 아니라 성취임을 하나님께서 보증해 주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부활의 권능을 믿고 수용한다는 것은 그분의 삶과 인격과 가르침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고 내 삶의 것으로 삼아 살아내는 데 헌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은 셋째,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을 의미합니다(빌 3:10). 그분이 구원의 통로요, 그분이 부활의 권능이니, 그분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나도 함께 걷는 게 예수를 아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나도 나의 옛 자아, 죄와 사망에 얽매여 있는 나의 옛 자아에 대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이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부활로 이어짐을 확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도 예수님처럼 결국 부활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아는 지식은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쓰는 정보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관계 형성이고, 지속적 실천이자 헌신이며,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취득한 지식이란 건 대부분 우리 삶의 도구로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예수를 아는 지식은 우리 삶 자체를 재형성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취한 이 세상의 지식은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그칠 때가 많지만, 예수를 아는 지식은 우리의 욕망 자체를 전환시키는 힘이자, 욕망 그 자체로부터 자유케 되는 능력입니다.

이 세상의 지식은 우리 육신의 생존을 위한 도구에 그칠 때가 많지만, 예수를 아는 지식은 우리 육신의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능력입니다. 이 세상의 지식은 우리 자신을 높이고 강화하고 도구로 그칠 때가 많지만, 예수를 아는 지식은 우리 자신을 놓아버리는 힘이자, 우리 자신으로부터 초월하는 능력입니다. 이 세상 지식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잘 적응하여 살게 하는 도구로 그칠 때가 많지만, 예수를 아는 지식은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힘쓰도록 이끄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꽤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를 아는 지식에 자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인해 경탄하며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사의 내용도 사실 달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취한 것들, 내 손에 쥔 것들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게 아니라 바울처럼 예수를 아는 지식 때문에 내가 내려놓은 것들, 포기한 것들, 버린 것들, 십자가에 못 박은 것들, 양보한 것들을 헤아리면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인해 그간 무엇을 내려놓고 버리셨습니까? 그 때문에 괴롭고 절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감사하고 자유로우십니까? 스스로 되물어 보아야 합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예’라고 대답하신다면 우리는 꽤 괜찮은 그리스도인, 맞습니다.

이 세상 지식과 예수를 아는 지식은 그 지식을 얻는 방법도 다릅니다. 이 세상 지식은 감각, 관찰, 계량화, 수리화, 언어화를 기초로 획득됩니다. 풀어 말하자면, 눈으로 보고 그 현상을 잘 관찰하되 양적으로 측량하고 수적으로 환산해서 수나 언어로 표현하는 식으로 획득됩니다. 하지만 예수를 아는 지식은 이와는 다릅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 영의 눈으로 보아야 인식됩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으려면 현상 너머 본질을 보려 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고, 관찰과 논리적 추론을 넘어서서 성찰과 상상과 직관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에는 정확한 측량, 정밀한 계산이 필요한 게 아니라 신뢰와 회개와 헌신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영적 훈련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귐과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아는 지식은 곧 사랑의 인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능력을 참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면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고 실제로 그 능력으로 인해 성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능력을 얻고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공부합니다. 너도 나도 어려서부터 그렇게 공부를 강조합니다. 우리 대체로 공부 잘 하는 아이를 최고로 여깁니다. 공부 잘 하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을 가치 있게 여깁니다. 그런데 이 세상 공부는 신앙의 공부와는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이 세상 공부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확장될 순 없습니다. 신앙의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계산과 암기가 아니라 신뢰와 사랑과 겸손과 섬김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공부는 성공하는 능력로 이어지겠지만, 신앙의 공부는 사랑하는 능력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우리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성공하는 능력입니까? 사랑하는 능력입니까? 올 한 해 누구를 사랑했는지,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감사한다면, 우리는 꽤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맞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를 아는 지식은 우리 자신과 유리된 지식도 아니고, 닫힌 지식도 아님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와 뒤엉킨 지식이며, 우리 내면의 지속적인 성장에 따라 그 깊이가 달라지는 열린 지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장 12-14절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곧 우리가 예수님의 손에 붙잡힌 순간부터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부여하신 삶의 궁극적 목표를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후회 없이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 권면을 따르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 삶의 푯대를 재검토해야겠지요? 예수님의 푯대로부터 과연 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우리의 현 위치를 진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장 15절에서, 삶의 푯대를 달리 생각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는 어느 단계에 도달했는지를 살피고 그 단계를 고려해 행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는 징표, 예수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한 정진을 논하기에 앞서 3장 1절에서 기뻐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 참 기쁨이 있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이 세상 지식은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님 없는 이 세상과 결속시키고 그 속에 터를 잡아 안주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세상 지식의 무용성과 위험성을 간파하고 예수를 아는 지식을 지향하는 곳에 참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돌아보십시오. 이 세상은 수많은 지식과 정보로 넘쳐납니다. 우리는 매일 이 지식과 정보의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세상 지식은 자꾸 늘어가지만 우리 삶은 여전히 위태롭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이 세상 지식을 채우고 채워고 우리 가슴은 여전히 허무합니다. 세상 지식을 의지해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는 여전히 외롭고 불안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예수를 아는 지식에 눈을 돌려야 하겠지요. 예수를 아는 지식을 위해 지금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지식과 능력과 성공을 통해 취했던 것들을 꺼내놓으며 감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예수를 아는 지식 때문에 무엇을 내려놓았고, 무엇을 버렸는지를 확인하며 감사하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아는 지식 때문에 우리가 어떤 변화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돌아보며 감사의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 그 자체에 참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온전한 감사의 제사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아는 지식을 채워 온전한 기쁨과 감사의 제사를 드리길 소망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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