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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의 가능“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가복음 5:35-6:6a)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4.03.18 03:08
▲ James Tissot, 「The Daughter of Jairus」 (1886-1896) ⓒBrooklyn Museum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삶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렇기에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삶이 흘러가는 현상만 바라보면 늘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기에 평안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평안은 나의 밖이 아닌 안에서 발견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신 분이 누구신지,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기억하고 묵상할 수 있다면,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려고 하는 평안과는 다릅니다. 방향 자체가 다릅니다. 그렇기에 성도가 주님이 가르쳐주신 삶이 아닌, 세상을 좇으려 한다면 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느낄 수도 누릴 수도 없게 됩니다.

세상의 삶 자체가 불완전하기에 세상은 사람들에게 불완전한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삶을 망가뜨리고, 희생해야 겨우 이런 불완전한 평안, 거짓 평안을 누립니다. 하지만 주님이 주신 평안은 완전한 평안일 뿐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우리의 어떠한 희생 없이도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주신 이 완전한 평안, 우리 안에 거저 주어진 평안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을 경험하고 있을, 그 누구보다 고통스러울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야이로의 첫 등장은 이렇습니다. “회당장 가운데서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간곡히 청하였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셨다.”(막5:22-24)

당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죄를 용서하는 사건’(막2:5)을 통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막2:7)로 인식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고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한 사건’(막3:1-6)을 통해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미워하고, 죽이려 하는 이들이 회당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이들이었기에 회당에 소속된 누군가가 아니라 회당의 장인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와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건, 스스로의 지위, 체면, 목숨을 내놓는 것과 다르지 않은 행동입니다.

야이로는 자신의 딸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35절에서 사람들이 절망적인 소식을 전해줍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말하였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예수님을 찾아왔건만,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딸을 만나기도 전에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야이로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수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절망과 두려움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말씀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어쩌면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의 집으로 곧장 오지 않고 중간에 열두 해나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성과 이야기 나눔으로써 시간을 지체하신 예수님이 원망스러웠을지 모릅니다. 혹은 더 빨리 예수님을 찾아가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을지 모릅니다.

여러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을 야이로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무엇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무엇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중이겠습니까? 죽은 딸이 살아날 수 있다는 야이로의 목적에 관한 믿음입니까? 아니면 처음 예수님을 찾아왔던 ‘예수님을 향한’ 야이로의 믿음입니까?

이 두 가지는 큰 차이가 있는 믿음입니다. 죽은 딸이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은 목적 지향적인 믿음입니다. 누구라도 자기 딸을 살려주기만 하면 그만인 믿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자신들의 목적과 상관없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예수님 자체를 믿는 믿음, 예수님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리기도 한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열 명의 나병환자 치유’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아홉 명은 자신의 나병이 치유되자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한 명은 예수님께로 돌아와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이때 예수님은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눅17:19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나병이 치유됨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야이로는 어떤 믿음을 가졌겠습니까? 야이로는 자신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집에서 온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더이상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야이로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갑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셨고,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집에 들어가셔서 울며 통곡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39b)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마5:40a)라고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울며 통곡하는 와중에도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하지만 야이로는 예수님을 비웃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에 여전히 자신의 주파수를 맞추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야이로는 결국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달리다굼!’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는 말이다.)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막5:41-42)

오늘 본문의 ‘죽은 소녀가 살아난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이 ‘내 딸을 살려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가진 야이로의 믿음에 방점이 있습니다.

죽은 소녀가 영원히 살았겠습니까? 건강하게 평생을 살았겠습니까? 남들과는 무언가 다른 삶을 살았겠습니까? 성경 말씀에 이후 기록은 없지만, 살아난 다음 해에 다른 사고로 다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부모보다 먼저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살아났지만 누구보다 악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성도는 ‘와! 야이로처럼 나의 목적이 이루어질 것을 끝까지 믿으면, 결국 이루어지는구나!’라는 잘못된 믿음이 심겨서는 안 됩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예수님의 치유’가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기대와 목적이 모두 허물어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때에, 어떤 방식으로 임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도가 가져야 할 믿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나의 목적’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5장의 바로 다음 장인 6장 1-6a까지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을 방문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안식일이 되어서,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막6:2-3)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마리아의 아들 목수, 자신들이 오래전부터 봐왔던 이들의 형제, 그저 자신들과 같거나 못 한 이로 여겼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라고 기록합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예수님도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5-6a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는 다만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신 것밖에는, 거기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나의 목적을 이루어줄 분으로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이런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건,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은혜의 상징입니다. 그렇기에 성도에게 필요한 믿음은 어떠한 순간에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런 믿음을 가진 바보 같은 사람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지난 2월 29일에 파주에서부터 시작하여 고성까지 남과북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매일 20-30km를 걸으며 DMZ 순례를 이어가고 있는 분들입니다.

남과 북의 상황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남과북이 통일이 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남이 북을 바라보는 태도는 이미 절망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북한은 그나마 남한과의 통일을 희망적으로 보아왔지만, 2024년 북에 김정은의 총비서를 통해 이루어진 발표를 보면 북한도 남을 바라보는 태도가 절망적인 수준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현실을 인정하고 남조선 것들과의 관계를 보다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주적으로 선포하고 외세와 야합하여 정권붕괴와 흡수통일의 기회만을 노리는 족속들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여기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범하지 말아야 할 착오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동족이라는 수사적 표현 때문에 미국의 식민지 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들과 통일문제를 론한다는 것이 우리의 국격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다.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되었다. 이것이 오늘 북과 남의 관계를 보여주는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 정대일 박사의 <북의 대남정책 변화와 한국교회 통일선교의 과제> 발제 중

남이 북을, 북이 남을 바라보는 태도가 돌이키기 힘든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습니다. 통일의 ‘통’ 자라도 올리면 예수님이 죽은 야이로의 딸이 자는 중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비웃었던 것처럼 비웃을지도 모를 일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남과 북의 통일과 평화를 바라며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비웃고, 비현실적인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3월4일(월)-8일(금)까지 한 주간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걸으며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내일 월요일이면 이 평화의 발걸음이 진부령을 통과해 고성으로 들어옵니다. 이상중 목사도 남과 북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이 발걸음에 참여합니다. 우리 교회도 20일(수)-21일(목)까지 평화의 발걸음을 이어가는 분들이 주무실 수 있도록 교회를 숙소로 내어드리게 되었습니다. 식사도 제공할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그리고 3월21일 목요일 오후에 DMZ 평화 순례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는 모임을 민돈후 목사님과 함께 진행하는 영광스러운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에 왜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희망을 이어가는 것입니까? 두려워하지 않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반드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더라도 성도는 생명과 평화의 일을 위해서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적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바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요, 사랑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성도는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든, 그 목적을 뛰어넘어 역사하시고 은혜 주시는 하나님을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님들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십시오. 우리 인생의 창조자이자, 주인이신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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