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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행하다‘삶의 기쁨을 회복하다’ 5(빌립보서 3:20-21)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4.03.19 03:01
▲ Rembrandt, 「Paul in prison」 (1627) ⓒWikimediaCommons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삶의 기쁨을 회복하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다섯 번째 시간으로 ‘역행하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 나누겠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인해 기뻐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이 지식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식을 통해 우리가 부활의 권능을 알게 될 것이며, 이 지식을 따라 우리가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예수를 아는 지식은 그저 정보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대한 참여이자 실천이며 헌신이자 변화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해 공부하라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쏟아 부으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실제로 예수를 아는 지식 때문에 그가 내려놓고 포기한 게 얼마나 많습니까?

더욱이 그는 빌립보서 3장 17절에서 대범하게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요청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 앞에서 ‘나를 본받으라’ 말한다면 기분 나빠 하겠지요. 교만하고 건방지다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잘난 척 하려는 게 아닙니다. 교만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 대단한 사람이나까 인정해 달란 소리는 더더욱 아닙니다. 바울의 이 말속에는 주를 위해, 주의 나라를 위해 전념했던 지나온 삶에 대한 자기 확신과 진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 나 자신을 던져왔던 삶에 전혀 후회가 없습니다. 오히려 기쁘고 가슴이 벅찹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바울이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고 ‘나를 본받으라’ 말한 것도 아닙니다. 회심 이후 바울에게 ‘나’는 더 이상 독립된 개체가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육신도, 사회적 평가로 채색된 이미지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의존되어 있는 ‘나’이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입니다(갈 2:20, 고후 5:17). ‘나를 본받으라’ 할 때, 바울이 실제로 하고 싶었던 말은 그리스도 예수 말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그 ‘나’를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내가 왜 성공의 길을 놔두고 이렇게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지, 내가 왜 감옥에 갇혀서도 여전히 기쁨을 감출 수 없는지, 내가 왜 이렇게 확신에 차 있는지’, 날 이해하고 내 삶을 탐구해 보려면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나를 다 던져 넣은 예수를 알아야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내 존재와 삶을 설명하고 해석해 주는 키워드는 ‘오직 예수’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지나온 자기 삶을 설명하고 해석해 주는 삶의 키워드 같은 게 있을 터입니다. 예를 들면, 고등학생들에게는 성장통이나 대학진학 같은 것이 삶의 키워드일 수 있겠지요. 바울에게는 그게 ‘오직 예수’ 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바울과 똑같은 인생의 궤도를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바울처럼 하나님을 배경으로 우리 삶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 또는 위기의 순간에 또는 우리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개입하셨는지, 우리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과 태도를 품었는지, 우리의 신앙이 우리 삶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중심으로 우리 삶의 이야기를 재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런 맥락 속에서 ‘나를 본받으라’ 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연이어 3장 18절에서는 본받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런데 특이점은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말할 때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를 언급할 때는 애통한 심정을 드러냈다는 점입니다(빌 3:18).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자기 가슴이 무너진다는 뜻을 터입니다. 바울을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가?’ 싶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고통을 겪고 있지만, 바울이 언급한 사람들은 현재 기세가 등등한 상황 아니던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울은 자기 처지에 대해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하고, 자기를 조소하는 사람들에 대해선 오히려 마음을 졸이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태도는 나를 비난하는 사람에 대해 화를 내기보다 ‘어쩌다 사람이 이렇게 망가졌을까? 도대체 그동안 무슨 아픔을 겪었길래, 무슨 상처가 있길래 저럴까?’라고 생각하는 정도의 대응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이래도 두면 안 되는데, 저들 가만히 두면 정말 큰 일 나겠네,’ 이런 심정적이고 책임적인 대응입니다. 바울의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자존감이 높은 사람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의 지경이 얼마나 넓은지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남의 평가에 쉽게 좌우되지 않을 만큼의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남의 평가로 자기를 재평가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자기로부터 자유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바울은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사람으로 불리든 나쁜 사람으로 불리든 사람은 다 사람입니다. 나쁜 사람으로 취급되더라도 그가 사람인 이상 그에게도 사람으로 대접받을 권리도 있고, 구원받을 권리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 점을 뼛속까지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본래 그리스도를 원수로 여긴 사람이었으니까요. 스데반 집사가 유대교인들이 집단으로 던진 돌에 맞아 죽을 때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던 잔혹한 인간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처럼 구는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안타까운 심정을 보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눈물을 지으며 바라보았던 사람들, 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울은 3장 19절에서 그들을 가리켜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적 강성 유대교인들을 말하는 것이구나, 자기 잇속을 따라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하고 속임수를 일삼는 거짓 교사들일 일컫는 것이구나’ 이렇게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구나’ 여길 게 아닙니다. 바울이 가리키고 있는 사람들이 혹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우리 삶의 키워드, 혹시 ‘돈’ 아닌가요? 우리가 영광으로 삼는 것, 혹시 ‘물질적 부’ 아닌가요? 우리 생각의 구심점, 혹시 ‘욕망의 성취’ 아닌가요? 바울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 모두 바울의 이 말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빌 3:18) 멸망, 듣기 좋은 소리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 우리를 저주하는 말도 아닙니다. 돈 신을 섬기고 졸부이기를 자처하면서 욕망에 매여 사는 이들의 영혼이 처한 현실이 그렇다는 걸 경고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놓치고 사는 참된 삶의 기회, 그들이 내팽개쳐 버린 삶의 참된 기쁨과 풍요이 곧 사라질 지 모르니 정신을 차리라는 경종의 말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는 그 삶의 궤를 달리하는 사람들이겠지요.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선 하늘의 시민권자라 표현합니다(빌 3:20). 바울에 논지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땅에 발붙여 살긴 해도 그 소속을 하늘에 둔 사람입니다. 하늘로부터 구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선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와 관련해 바울은 3장 21절에서 우리의 낮은 몸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형되는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몸은 그저 생물학적으로 정의된 육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육신과 혼과 영의 통합체를 말하는 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구체적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로 인해 발생하는 존재와 삶의 변형이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몸의 변형에는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방향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몸의 변화의 방향은 모두 당면한 시대와 상황과 사람을 역행하는 쪽을 향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그리스도인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자기계발서의 책 제목처럼 ‘역행자’들입니다. ‘역행자’의 저자는 ‘우리가 돈과 시간과 정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우리가 안고 있는 유전자와 무의식과 자의식이 작동하는 방향에 역행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시사하는 바가 있어서 잠깐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전자’는 인류의 생존의 역사 과정에서 유전자 깊숙이 내재된 생존 전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생존 전략이라는 건 주로 위험과 위협 요소를 우선적으로 민감하게 파악하고 대비하게 하는 두려움 회피 행동 전략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여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남으려면 무엇을 조심해야 하고 무엇을 대비해야 할까?’ 이런 식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삶의 전략을 취하는 뿌리 깊은 성향을 의미합니다.

‘역행자’라는 책에서 말하는 ‘무의식’은 주로 인지적 오류와 방어기제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덜컥 ‘너 그거 잘 할 수 있겠어? 지난 번에도 너 이것 비슷한 일 했다가 큰 낭패 봤잖아. 이번에도 실패하면 너 다시 일어설 수 있겠어?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아’ 등의 내면의 목소리들, 무의식적 판단들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의식’은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자아상,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생각들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너는 공부에는 본래 소질이 없어. 네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해.’ 등등의 자기평가와 자기진단에 대한 생각들 말입니다.

‘역행자’의 저자는 현대인들의 삶을 구속하는 돈과 시간과 정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우리 내면에서 역동하는 이런 유전자, 무의식, 자의식의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유를 추구해야 하고 그 자유를 위해 무엇에 대해 역행해야 합니까? 바울이 앞서 안타까워 눈물을 보였던 사람들, 곧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물질적 부와 풍요, 사회적 성공 그 자체를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것에 열광하고 그것 때문에 삶이 요동치며 때로 우쭐하기도 하고 때로 우울하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들에게 사고는 욕망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만을 생각하지, 내가 원하는 것을 도대체 나는 왜 원하고,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이지를 묻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겉으로는 기세가 등등했지만, 속으로는 사실 바울을 위협적인 경쟁자로 여기며 적대할만큼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의 삶에 역행해야 할 터입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눈에 보이는 부를 좇는 세상의 흐름을 역행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부요함을 좇았습니다. 세속적 성공과 영예를 좇는 사람의 길을 역행하여 기꺼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욕망에 지배당한 삶의 양식을 역행하여 사랑에 압도된 삶의 양식을 취했습니다. 정리하자면, 그리스도인은 바울처럼 이 세상이 신처럼 떠받드는 갖가지 우상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욕망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실 우상, 욕망, 두려움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벌인 행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의하면,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시내산에 오른지 한달이 넘게 아무런 소식이 없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을 부추겨 각자 소지하고 있던 금붙이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그것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릅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면서도 여전히 버리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분명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저마다 금덩어리 하나씩을 가슴에 품고 나왔습니다. 이 금덩어리는 곧 물질적 부와 풍요에 대한 욕망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모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금세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눈에 보이는 의지처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 눈앞에 두었습니다. 이렇게 욕망과 두려움이 투사되어 만들어진 게 바로 금송아지요, 우상입니다. 금송아지로 대변되는 우상에 대한 숭배행위는 그들의 정신과 영혼을 애굽 땅에 가둬놓는 처사나 매한가지였습니다. 동시에 그 행위는 가나안 땅이 상징하는 하늘의 비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상실과 망각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우리를 이 땅에 묶어 두려고 조장하고 길들여 놓은 욕망과 우리 맘에 각인시켜 놓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욕망과 두려움을 가중시키는 우리 마음속 거짓 생각들을 간파하고 그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돌파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진리의 메시지를 우리 몸에 새기고 새겨야 합니다. 바울이 강조한 대로 우리는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임을 재확신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길을 역행하여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당당하고 의연하게,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잘 사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힘과 권세가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총과 사랑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제대로 한 자리 차지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생각을 역행해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물러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것이란 확신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최선의 일은 우리 자신을 지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구하고 구현하는 데 있음을 우리는 재확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참된 만족과 행복은 이 땅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재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 땅의 것을 움켜쥐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하늘을 향해 손을 펴는 데 있음을 재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가능합니까? 우리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합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면서 이 세상을 역행하는 사람이 되길 결단하고, 실제로 그 역행을 시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하면서 이 세상이 우리 내면에 새겨놓은 욕망과 두려움과 거짓 신념들을 역행하려는 마음을 먹고, 실제로 그 역행을 시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실제 변화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로 통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백열전구가 빛을 밝히는 원리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백열전구에서 빛을 내는 부분은 필라멘트입니다. 백열전구가 빛을 낼 수 있는 것은 필라멘트에 발생하는 열이 빛 에너지로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필라멘트에선 왜 열이 발생합니까?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고 그 흐름에 저항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전선을 타고 빠르게 흐르던 전류가 갑자기 필라멘트라는 저항체를 만나면서 전자들이 맞부딪혀 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이 빛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갖가지 삶의 논리에 저항하고,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의심과 혼란과 갈등과 불편함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오래된 마음의 성향과 생각과 행동의 습관에 저항하는 일은 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의 양식을 역행하기를 시도하는 순간, 우리 안의 그 뜨거운 내적 투쟁에 그리스도의 빛이 임할 것입니다. 그 빛이 우리 안을 환히 비추어 역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이 우리를 변화로 이끌 것입니다. 그 빛이 우리를 자유케 하고, 그 빛이 우리에게 참 기쁨과 만족과 풍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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