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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평안을 구하다‘삶의 기쁨을 회복하다’ 6(빌립보서 4:6-7)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4.03.26 02:33
▲ 내적 평안은 자기비움의 시간이기도 하다. ⓒGetty Images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삶의 기쁨을 회복하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여섯 번째 시간으로 ‘내적 평안을 구하다’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늘 나라의 시민권자임을 확언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지만, 이 세상에 속박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 너머를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물론 이 땅의 산물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땅에 매여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늘을 품고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이 세상의 유행을 역행하여 하나님 나라의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신처럼 떠받드는 물질적 부에 대한 집착을 역행하여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을 향유해야 합니다. 사회적 성공을 영예로 삼고 그것을 욕망하는, 이 세상의 삶의 방식을 역행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삶의 방식을 좇아야 합니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에 몰두하는 생각의 방향을 역행하여 욕망 그 자체를 성찰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생각을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거룩한 역행을 실제로 시도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친히 우리를 변화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 거룩한 역행을 위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있고, 우리 몫의 일이 있습니다. 바울은 4장 1절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주 안에 서라” 권면합니다. 거센 바람에 맞서려면 무게중심을 앞에 두고 다리 자세를 안정적으로 취해야 합니다. 발바닥을 땅에 잘 고정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유행을 역행하려면 우리 내면의 무게중심을 주님을 향해 두어야 합니다. 우리 중심의 시선을 주님의 말씀에 잘 고정해야 합니다. 주 안에 서는 일은 다음의 세 과정으로 구분지어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멈춰 서기, 그 첫 번째 과정입니다. 주님을 향해 돌아서기, 그 두 번째 과정입니다. 마지막 과정은 주님 앞에 서서 주님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까요? 거룩한 역행을 시도하려면, 우선 주님 때문에 멈춰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을 예로 들어 봅시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회심하기 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처벌하고자 하는 집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가 생각할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율법의 파괴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붙잡히게 된 그 날도 그는 예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오려고 다메섹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로막았던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주님은 밝은 빛으로 바울의 눈을 가리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말씀하셨습니다(행 9:4-5). 주님의 그 밝은 빛과 음성 때문에 바울은 가던 길을 멈춰 섰습니다.

주변이 어두우면 못 보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주변이 밝다고 해서 다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눈이 보는 게 아니라 우리 내면의 의식이 보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식은 바깥 세계의 유형의 사물만 보는 게 아닙니다. 언어, 느낌, 이미지로 매개되는 내면 세계의 대상들도 볼 수 있습니다. 밖이든 안이든 주의를 기울이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의력은 안팎을 가리지 않습니다. 뭔가를 보고 살려면 안팎을 보고 살라는 하나님의 뜻이 엿보입니다. 우리, 제대로 못 보는 게 참 많습니다. 잘못 보는 것도 물론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못 보는 게 우리 마음속 생각과 감정입니다.

우리는 왜 그걸 못 보거나 잘못 볼까요? 사는 데 바빠서일 수 있습니다. 외적 행동에만 주의를 다 빼앗겨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행동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 먹은 대로 행동합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대개 우리의 통제의 영역 바깥에서 작동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자기 나름의 메커니즘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 먹으려면 그 마음에 우선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마음을 먹고 사는지에 잘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저 무의식적으로 이미 마음 먹은 그대로 행동하는 데만 바쁠 때가 많습니다.

행동하느라 바빠, 제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미 먹은 그 마음이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할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한 생각이 잘못됐을 수 있다는 생각도 못할 것입니다. 그 마음을 사로잡은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생각은 더더욱 못할 것입니다. 회심하기 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못된 성품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 박해한 게 아닙니다. 굳은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그 신념 깨질까 두려워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빴고 그래서 열심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잡는 데 바빴던 바울은 이미 품었던 그 마음이 잘못됐다는 생각같은 것은 품을 겨를이 없었을 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한 자기 마음속 분노와 두려움을 알아차리고 다스려볼 생각같은 것도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울을 밝은 빛과 음성으로 멈춰 세우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빛은 주님이 우리 안에 부여하신 의식의 빛을 상징합니다. 거룩한 역행을 시도하려면 우리는 의식의 빛을 밝혀 우리 마음속 생각과 감정을 주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쁘게만 살 게 아니라 주님을 의식하며 한 번씩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물어야 바삐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우리 마음속을 살필 수 있습니다. 행동하는 데 쏟았던 주의력을 내면으로 돌려야 우리 마음속 생각과 감정의 오고 감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먹은 대로 사는 데만 정신이 팔려 살 게 아니라 무슨 마음을 먹고 사는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도대체 무슨 감정에 사로잡혀 사는지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 생각은 대체로 내면의 이야기 형태로 오고 갑니다. 우리 마음속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수다를 떱니다. 우리 마음은 수다스럽습니다. 다양한 유형의 이야기들을 지어냅니다. 사물을 묘사하고 평가하는 이야기, 상황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이야기, 불평을 늘어놓는 이야기,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야기 등등. 우리 마음속 그 이야기들, 내면의 단편적 말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는 게 곧 생각을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생각은 그래도 비교적 알아차리기 수월합니다. 그런데 감정이 조금 더 까다롭습니다. ‘이게 무슨 감정인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잘 드러나지 않기도 하고, 적절하게 명명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감정을 알아차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좋은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유진 젠들러에 의하면, 우리 감정은 주로 몸의 느낌을 동반합니다. 우리 몸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 감정이 더 선명하게 알아차려집니다. 예를 들면, 화가 나면 심장이 빨리 뛰고 몸의 열이 오릅니다. 불안하면 손에 땀이 나고 어깨가 경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 이곳 저곳에 주의를 기울여 봄으로써 우리 내면의 감정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식의 빛을 밝혀 우리 마음속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다 보면, 그것이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생각은 감정을 낳고 감정은 기존 생각을 강화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저 사람 지금 나를 무시하네.’라고 생각하면 화가 나기 마련입니다. 화가 난 채로 그 사람을 다시 보면 ‘나를 무시하는 게 틀림 없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정의 역동을 조절하거나, 감정의 흐름을 바꾸려면 우리 마음속 생각을 전환하는 데도 힘써야 합니다. 생각과 감정의 내용을 알아차리는 게 다가 아니라 그것을 조절하고 적극적으로 전환하는 데도 힘써야 달리 마음을 먹고 달리 행동할 수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진리의 말씀으로 정화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방 안 공기가 탁하면, 창문을 열어서 환기를 하듯이, 우리 마음속에 진실의 언어, 진리의 언어를 자꾸 반복해 들려주어야 합니다. 이 진실과 진리의 언어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주님에게서, 주님의 말씀에서 찾습니다. 우리 마음속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렸으면,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 돌아서서 주님의 말씀에 주의를 전환해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멈춰 서서 마음속을 살폈다면, 다음으로 주님을 향해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빛을 받아 눈이 먼 바울은 주님의 명을 따라 다메섹에 거주하는 아나니아 선지자에게로 갔습니다. 아나니아 선지자를 통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주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는 일이 그것이었습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벌할 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을 더욱 확산시켜야 함을 깨닫게 되자 바울은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며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행 9:15-18).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행위는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속 생각을 정화하고 바로잡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생각에도 층위가 있습니다. 겉 생각이 있고, 속 생각이 있습니다. 겉 생각은 우리를 향한 지배력이 약한 생각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표면에 잠깐 머물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속 생각은 반복되고 굳어진 생각이자, 오래된 생각의 습성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사실이라고 믿어버린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지배력이 강합니다. 우리 내면의 목소리들을 듣는 데 익숙해지면 우리의 속 생각들이 주로 과거나 미래를 향해 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지나온 과거에 상처로 남아 있던 일들, 후회스러웠던 일들에 뿌리를 둔 생각들이 있는가 하면, 앞으로 벌어질지 모를 두려운 일들, 염려와 걱정거리들에 뿌리를 둔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 생각을 정화하고 바로잡으려면 우선 우리 내면의 시선을 지금 이 순간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현존하기’라 명명합니다. 현존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마음속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둘 수 있게 됩니다. 나더 모르게 하던 생각이 현존의 순간, 멈칫 하게 되고 나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 끝나고 무엇을 먹으러 갈까, 다음 스케줄은 어떻게 진행할까’를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 선포되는 말씀을 온전히 들을 수 없습니다. 생각을 바꾸고 생각의 방향을 전환하려면 우리의 의식이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야 하고, 지금 이 순간 주님께 주의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강조하는 깨어 있는 믿음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깨어 있는 믿음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놓아버리고 주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주님의 말씀을 기초로 우리 속 생각을 바로잡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우리 생각의 방향을 전환시킬 절호의 기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더 이상 우리가 이미 겪었던 암울한 기억들에 묶어 두어선 안 됩니다. 과거에 대해 생각하려면 차라리 성경이 증언하는대로 주님께서 이미 수없이 반복하여 행하셨던 그 은혜와 구원의 역사들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더 이상 우리에게 닥쳐올지도 모를 어떤 암울한 전망에 매어 두어서도 안 됩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려면 차라리 성경이 약속하는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앞으로 행하실 일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장 8절에서는 생각하려거든,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 받을 만하며 칭찬 받을 만하여 덕이 될만한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고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오래된 속 생각을 바꾸는 일은 우리가 하루 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임하시고 역사하셔야 우리의 오래된 속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행위는 주님 앞에 서서 주님을 기다리는 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주 안에 견고히 서는 일의 마지막 과정은 주님 앞에 서서 주님을 기다리기입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생각을 노출하는 일을 반복하는 행위이자, 주님의 말씀이 내 마음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내 생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생각을 형성하시기까지 기다리는 일을 의미합니다. 우리 때로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너무 빨리 떼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해 다 아는 내용이라고 대충 넘어가고, 잘 이해가 안 간다고 그냥 넘어가며,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다며 얼렁뚱땅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주님의 말씀이 나와는 별 상관이 없이 내 의식의 표면을 잠시 겉돌 뿐인 공허한 소리처럼 취급될 수 있습니다.

다시 바울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곧장 아라비아로 향해 전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갈 1:17). 하지만 이 첫 전도 활동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 주었습니다. 당시 아라비아 땅에는 나바테아 왕국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바테아 왕국은 당시 유대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전도 활동을 하기 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의욕만 앞섰지 아직 주님의 말씀으로 탄탄하게 다져지지 못했던 바울은 큰 실패를 맛보고 고향 땅 다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다소에서 안디옥교회의 부름을 받기까지 무려 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에게 이 시간은 기다림의 시간이자, 주님의 말씀으로 자기 내면을 재형성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산모가 아이를 잉태하고 십 개월을 기다린 끝에 새 생명을 맞이하듯 말입니다.

바울에게서 확인할 수 있듯이 주님 안에 굳게 서는 일은 주님을 기다림의 산물입니다. 주님의 임재와 역사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과정의 산물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께로 자라가야 이 세상을 살되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맞이한 대림절은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이자, 주님께서 우리의 존재와 삶에 더 깊이 임재하시고 더 온전히 다스리시길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주님을 기다림이 가져다 주는 은혜를 경험할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결코 초조한 시간일 수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퇴근을 기다릴 때 혹시 안 오시면 어쩌지 초조해하진 않습니다. 때 되면 당연히 오실 걸 알기 때문에, 신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며 기다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한 주님을 기다림은 초조함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설레임으로 이어집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고역스런 시간일 수도 없습니다. 주님은 멀리 계시지도 않고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4장 5절에서 모든 사람에게 관용할 것을 권면하면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음을 상기시킵니다. 주변 사람들을 내 식대로 통제하고 꺾으려고 할 필요 없을 만큼, 주님께서 가까이에서 우리 모두를 당신의 뜻대로 다스릴 것이니 열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 주변 사람들과 우리 처한 상황을 바꿔주시려나’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주님이 가까이 계시니 염려하지 말고 우리가 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이미 받은 것으로 알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아뢰라’ 권고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릴 때에는 주님이 이미 가까이 오셨다는 사실을 기초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폴라 구더는 ‘기다림의 의미’에서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미 행하셨던 일들을 오늘 우리 현실에서 다시 맞이하는 일이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2천년 전에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하여 이미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은 2천년 전 과거에 묻힌 사건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 우리의 현실에 끊임없이 재현되는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행하셨던 수많은 은혜의 사건들은 오늘 우리의 삶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재현될 사건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역사하셨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은 여전히 오늘 우리의 삶을 향해 있고, 오늘 우리의 삶에 내재해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의 그 구원의 역사, 주님의 그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을 우리 삶의 희망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희망으로 우리의 암울하고 어둔 현실을 재조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폴라 구더에 의하면,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께서 앞으로 우리 삶에 행하실 일을 기다린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현실의 변화가 아무리 더디더라도 이 현실은 완성을 향한 과정중에 있으며, 그 완성의 때는 반드시 오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고난과 박해 중에도 흔들림 없이 사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주님이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니 그때를 앞당기기 위해 현재를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 약속의 실현에 걸맞은 생각과 행동을 지금 취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4장 1절에서 우리에게 ‘주 안에 서라’ 권하였고, 4장 4절에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강권했습니다. 주 안에 서는 일을 기쁨으로 여기고 기꺼이 그 일에 참여하라는 의미입니다. 주 안에 서려면 세상에 얽매인 생각과 세상 염려를 멈추고 주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주님께 기도와 간구로 우리 자신을 내어맡겨야 합니다. 주님이 이미 가까이 계시니 감사함으로 주님을 기다리고 기대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바울이 확언하는대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빌 4:7).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때로 위태롭고 허무맹랑한 우리 마음과 생각이 주님의 온전하신 통치하심으로 인해 질서있고 조화롭게, 안정되고 진실되게 전환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내적 평안입니다. 주 안에 온전히 서 있어야 이런 내적 평안을 누립니다. 그리고 이 내적 평안에 이르러야 이 세상을 역행하여 하나님 나라를 지향할 수 있습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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