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가르치셨던 스승님의 책 서문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도도한 민중 항쟁의 현장에 있지 못하고 머나먼 타국 땅에서 책에 파묻혀 지냈던 제게 민중신학을 강의해 달라는 요청이 오면 늘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분들에게 속죄할 길이 없으니 말입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참 마음 한 구석이 편안해 지는 경험을 했었습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뭐 그리 속죄 받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마음 한 구석에서 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공부를 하면서부터, 그것도 이 땅에서 ‘진보’라고 불리는 분들의 강의를 들으면서부터 커져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지 못하다고 알 수 있는 학문을 배우고, 그것대로 살 수 없다는 편하지 않는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휠체어를 탄 외국인 시위자가 신기했는지 방송국 카메라와 사진 기자들은 저를 찍기에 열이 올랐습니다.

그래서 옳지 못한 것을 위해 투쟁하는 분들을 보면서 늘 사모하는 마음은 눈덩이 처럼 커져갔습니다. 그 분들과 함께 그 현장에 있지 못하다는 것이 늘 죄송스럽게 생각되곤 했습니다.

그렇게 저렇게 살다가 우연하지 않은 기회에 에큐메니안 신문사 기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이제는 ‘취재’라는 공식적인 직무를 다한다는 마음으로 그러한 현장에 다닐 수 있는 특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시위가 있고 집회가 있는 현장은 정말 원 없이 돌아다녔습니다. 취재 기자라는 본분을 망각한 채 시위에 더 열중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곤 기사를 어떻게 쓰지 하는 걱정도 해 보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안 지구화 실천단'이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가봐야겠다'는 다짐을 속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또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홍콩행 비행기에 머리카락 나고 처음으로 한국을 벗어난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착한 첫날부터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CCA가 주최한 신학포럼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영어로 진행되는 포럼에 진이 빠질 정도였고, 아예 참석하지 않고 시간만 나면 주위를 돌아다녔습니다. 이런 저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분이 계셨습니다.

저희 대표단을 이끄셨던 김종맹 목사님(기장 교회와 사회 위원장)은 둘째 날 저녁에 제법 젊은 측에 속하는 저희들을 보시면서 하시는 말씀, “우리는 여기 신학포럼 하러 온 거 아니니까 투쟁 계획 잘 세워서 낼부터 시작되는 시위에서 열심히 해 보자고!” 저도 속으로 그랬습니다. “위원장님 제가 바로 그 마음입니다!!!”

시위대가 지나가는 길가에는 이렇게 대규모의 시위행진을 처음 보는 것 같은 표정의 홍콩 시민들이 늘어서 시위행렬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막상 첫 집회 행진이 시작된 12월11일(일)의 동이 터 오고, 집회 현장으로 다가갈수록 4km가 넘는 거리를 어떻게 행진할 지가 막막했습니다. 행진을 위해 CCA에서 대여해 온 휠체어를 타고 빅토리아 공원까지 갔지만, 걱정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정말 기우였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최의팔 목사님께서 그날 삭발을 하신 농목 목사님들과 같이 기장 대표단의 제일 선두에 휠체어를 밀고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저 부담스러운 데요” 하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말입니다. 비록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해도 부담스러운 지경인데, 시위대만 7천명이 넘고 길가에 늘어서 홍콩 시민들에, 연신 카메라 후레쉬를 터뜨리는 외신 기자들의 눈까지!!!

그 덕분에 세상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찍어도 못 찍을 만큼의 사진을 찍어봤습니다. 기자들은 뭔 영문인지도 모르고 휠체어에 “노동자와 농민을 다 죽이는 WTO를 반대한다”는 글귀가 쓰인 팻말을 들고 행진하는 최의팔 목사님과 저를 향해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사진 기자들 때문에 앞의 시위 행렬과 잠시 거리를 두게 된 상황이 있었습니다. 저희 대표단 시위대를 인도하던 도우미들이 앞쪽과의 거리를 좁혀 달라는 요구를 해왔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최의팔 목사님께서 “스크램을 짜서 달리자!”고 하셨습니다. 순식간에 우리 대표단은 서로 어깨를 걸고, 제가 있는 앞줄에서는 “해체”를 외치고, 뒷줄의 대표단은 “WTO”를 외치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나서 시위 현장을 제 두 다리는 아니지만 몸으로 그렇게 달려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속으로 무척 신이 나기도 했지만, “도로에 튀어나온 돌이라도 있어서 걸려 휠체어가 뒤집어지면 어쩌나? 저를 밀고 있는 최의팔 목사님이 지치시면 어쩌나?” 하는 별의별 생각을 다해봤지만, 다 쓸데없는 생각이었습니다. 오히려 신나게 달려가는 저희 대표단을 홍콩 시민들은 신기하게 바라보며 박수까지 쳐 주었습니다.

카메라 기자들 덕분에 앞 행렬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스크램을 짜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해체 WTO”를 외치면서 말입니다.

한참을 그렇게 행진하다보니 그것도 적응이 되더군요. 제법 아닌 척하면서 카메라 쪽으로 시선을 줄줄도 알고, 표정도 심각하게 그릴 줄도 알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겠다고 제게 포즈를 취해달라고 요청하면 거기에 맞춰 주기도 했습니다. 최의팔 목사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하여간 첫 날 시위대의 중심 인물 중 하나는 분명 저였습니다.

시위에는 이골이 난 우리 대표단 목사님들과 함께 신나게 시위 행진을 마치고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오던 때와는 다르게 지하철이 아닌 배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함께 한 배에 타지 못한 분들이 계셔서 선착장에서 잠시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대형 전광판에 저희 대표단 모습이 생생하게 방송되고 있더군요. 저를 비롯해서 농목 목사님들의 삭발을 하시는 장면이 말입니다. 그렇게 사정없이 저에게 들이대던 방송 카메라가 편집 당하지 않고 방송된 것이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함께 그 장면을 보던 분들도 함께 많이 웃었습니다. 특히 전광판 가득하게 삭발 장면이 등장했던 기장 농목 총무를 맡고 계시는 신민주 목사님도 말입니다.

또 첫날 행진이 끝나고 나중에서야 들은 이야기이지만, 기자들이 저희 대표단에게 물었던 질문들이 제가 “WTO 때문에 저렇게 휠체어를 타게 되었냐?”고 물었다고 하더군요. 그 질문을 받은 목사님께서는 매우 망설이셨지만, “그건 아닙니다!” 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고 하더군요. 다른 분들도 그러셨지만, 저도 많이 웃었습니다.

▲이정훈 기자

숙소로 돌아와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 ~ 장애라는 것이 그렇게 불편하고 피해만 끼치는 것은 아니구나!” 하고 말입니다. 아니 오히려 장애인이기 때문에 유리한 것이 있고, 그것이 더 크게 작용할 수도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세삼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첫날 시위행진은 제게 충만한 자신감을 선사하며 막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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