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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교회 운동 소고(1)민중 교회 운동의 배경은 무엇이엇나?
편집부 | 승인 2005.07.26 00:00

정상시 목사

안양 안민 교회

 

초대교회는 민중교회였다. 초기 한국 교회도 민중적 교회였다. 특히 민족의 고난, 민중의 역사와 함께 교회도 온갖 고난을 겪었다. 함께 고난을 나누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1919년 3.1운동에서의 한국 교회의 역할은 민족과 민중의 고난 속에서 함께 했던 초기 한국교회의 모습을 잘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앙이 득세하면서 교회의 민족 민중적 전통은 후퇴하고 탈 역사적 대중화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특히 남북 분단과 6.25 전쟁의 상황 앞에서 한국교회는 분단을 넘어설 평화의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지 못했다. 친미 분단 세력의 지지기반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70-80년대 군사 독재 시대 기독교는 자본화, 권력화 되어갔고 민중성을 상실해 갔다. 그 가장 적나라한 모습이 1980년 광주민중항쟁 사건에서 드러났다.

민중교회운동은 초대교회와 한국교회의 풍부한 민중적 전통에 그 뿌리를 두면서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다시 민중의 고난 공동체이자 희망 공동체로 거듭나려는 몸부림이라 할 것이다.

 

1. 민중 교회 운동의 배경은 무엇이었나?

민중교회 운동은 민중성과 교회성과 운동성을 통전적으로 실현하려고 하였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듯이 신음하는 민족 민중의 삶과 유리되지 않는 교회이고 싶었던 것이다. 무슨 민중교회 운동론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억울하게 죽고 감옥가고 해고되는 민중 현실이 먼저 있었다. 그러고 “민중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기뻐한”(히11:25) 예언자들이 있었다. 감옥과 민중현장에서 민중을 만났다. 함께 고난의 연대를 체험하였다.

성경을 새롭게 읽었고 성경에서 민중(오클로스)를 재발견하였다. 초대교회도 새롭게 조명되었다. 민중 신학이 나왔고 민중, 민족의 교회를 말하였다. 이미 1970년대에 민중적 교회의 단초들이 만들어졌다. 그 시점은 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이후 일 것이다.

그러나 민중교회가 운동으로서 성격을 가지고 대두된 것은 1980년대 이후 즉 광주민중항쟁 이후였던 것이다. 민중신학에 의해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지만 민중교회가 민중신학의 산물은 아니다. 하나님의 민중 계시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것이다.

어쨌든 민중교회는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될 민중성과 교회성을 다시 일치시키려고 한 것이다. 실천적 성과는 쉽지 않았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중의 고난의 흔적(스티그마)를 지닌 교회가 되려는 몸부림의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반론적으로 민중교회의 원형이 초대교회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여기서 민중교회라고 할 때는 1980년대를 전후해 한국에서 출현한 특정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민중 교회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민중교회는 왜 하필 이 땅의 특정한 시대에 출현했던가?

한마디로 1980년대를 전후해 한국에서 민중교회가 출현된 것은 그럴만한 주, 객관적인 상황이 있었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여기서는 두 세 가지만 언급하겠다. 일반적인 역사적 상황은 논외로 한다하더라도, 당시 제도권의 많은 교회가 민중성을 상실했다는 객관적 상황은 지적되어야할 것이다. 민중의 외마디와 신음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성이라는 몸은 상실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그 단적인 사례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자살한 전 태일의 죽음에 대해 많은 제도교회가 관심조차 없었고 信者이었던 전태일의 장례식을 교회에서 치루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문전박대 당했던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자살한 자를 교회에서 장례식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또, 1980년 서울의 봄을 비상계엄으로 진압하고 그해 5월 광주민중항쟁을 피로 진압하고 새 독재자로 등장한 전두환 장군을 위해 교회 지도자들이 조찬기도회에서 축복의 말을 하며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 여호수와”에 비견하였던 데서도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객관적 상황은 제도적 교회의 권력 편향적인 흐름에도 불구하고 민중신학을 비롯해서 70년대부터 민중사건을 증언하고 함께 하려는 기독교내의 새로운 물줄기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산업선교회 활동, 수도권 특수선교회 활동 등이 그 대표적인 例일 것이다.

민중교회는 한편으로는 이런 흐름을 止揚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 측면보다 이들에 의해 배태되고 촉발되고, 훈련된 측면이 있었다. 그 동안 민중교회의 독자성이 강조된 나머지 이들과의 연관성이 다소 과소평가되었던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그 다음으로 이 같은 객관적 조건을 배경으로 하여 민중교회를 시작할 주체, 즉 사람들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것은 주로 청년 학생운동, 혹은 수도권 특수 선교 등을 통해 민중체험과 역사체험, 감옥 체험 등을 하였던 신학도 들이 집단적으로 생겨난 현실에서 확인될 수 있다.

또 기존 제도교회에 실망한, 일반 대학의 기독학생으로서 위의 역사체험이나 민중 신학 등의 영향에 힘입어, 신학도가 되고 새로운 교회에 대한 비전을 구체화하게 된 경우들도 있었다.

이 점에서는 基長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진보적 교회의 배경이 많기도 했지만 서대문 기장 선교교육원의 위촉생 과정은 이들의 훈련의 장으로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예장의 경우는 산업선교회를 통해 조직적 훈련을 통해 민중교회를 목회할 주체가 형성되었다. 감리교의 경우도 산업선교회 활동이 중요한 인적 배출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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