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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하나님과 야훼 하나님작은 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존재
홍주민 위원 | 승인 2009.04.15 03:56

히브리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야훼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다음으로 “규정”한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야훼 너희 하나님이다.”(출20,2) 하나님은 종살이를 하고 억압당하고 노예상태에 있는 백성을 위하는 출애굽의 하나님이시다. 종살이에 대항하고 자유를 향하는 하나님의 원 선택, 이러한 분명한 하나님의 편들음은 성서 전체에 하나의 맥으로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원 선택은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실천적인 응답으로도 규정된다: “외국 사람이 나그네가 되어 너희의 땅에서 너희와 함께 살 때에, 너희는 그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 살 때에는,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레19,33-34).

하나님이 그의 존재를 “섬기는 존재”로 규정한 두 번째 성서의 근거로 우리는 시편 82편에서 확인케 된다. 여기에서는 신들의 회합이 하나의 신화적인 언어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규준점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법정에 나오셔서, 신들을 모아들이시고 재판을 하신다. 언제까지 너희는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되풀이하려느냐? 언제까지 너희는 악인의 편을 들려느냐?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 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가난한 사람과 빈궁한 사람을 구해 주어라. 그들을 악인의 손에서 구해 주어라...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분별력도 없이, 어둠속에서 헤매고만 있으니, 땅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이를 통해 다음이 분명해 진다: 하나님은 하나님 존재를 위한 척도를 스스로“정의한다”; 그는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 고난당하는 사람 그리고 곤궁에 처한 사람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하나님 존재를 거부한다.

야훼 하나님은 작은 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요, 과부와 고아,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 그리고 나그네된 이들에게 권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와 반대로 당시 이스라엘 주변에 널리 성행하고 있던 신들은 거짓 신으로 폭로되며 이 거짓 신들은 권력의 오용과 법의 왜곡 그리고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곡해로 이끈다. 신앙은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결국 구약에 나타난 야훼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섬기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야훼냐 바알이냐

울리히 바흐(1931-)라는 독일의 디아코니아 신학자가 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다가 갑자기 소아마비에 걸려 휠췌어 신세가 된다. 발병이후 그는 자신에 대한 이해와 신학적 사유에 있어 대전환을 겪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과 피조물로서 이 땅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해 계속 묻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건강한 이가 장애인을 돕고 정상인이 비정상인에게 베푼다라는 사유의 틀 안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간의 철저한 구분을 한다. 이러한 식으로 사람들은 일상에서 말하고 행동한다.

바흐는 이러한 사유를 비인간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인식아래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건강한 이와 병든 사람사이에 연대적 파트너쉽이 생길 수 없다는 말이다. 돌봐주고 자비를 베푼다는 미명아래 자신의 행함의 대상으로 삼거나 동등한 파트너의식과 이웃의식없이 다가가는 것에 대해 바흐는 장애인과 병든 이들에 대한 금치산 선고나 마찬가지라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신학이란 중립적인 것이 없다. 신학은 삶을 촉진시키거나 망가뜨리는 역할을 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신학적 사유는 자신이 어떠한 삶의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휠췌어에 의존해 살아가는 이에게 신학이란 아주 구체적인 물음에서 시작된다.

바흐는 에른스트 케제만이 신학안에도 노인, 병자 그리고 장애인을 변두리로 밀어내고 소외시키는 신학이 있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그러한 신학을 “바알의 신학”이라 규정 한다. 케제만는 말한다:“성서안의 하나님은 항상 바알 아니면 야훼, 예수의 하나님 아니면 거짓 신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선택속에서 나타난다. 그런 이유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누가 하나님이고, 야훼이며 바알이냐에 대한 물음이 반드시 대답되어야 한다.”이러한 바알신학은 “인간이 일반적으로 건강하고, 강하고 그리고 노동력이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것을 강자의 이데오로기이자 힘있는 사람의 욕구의 표현이라 한다. 바흐는 이런 류의 신학을 어느 정도 능력있는 보통 그리스도인의 “소박한 신학”이라 규정한다.

바알 신학에서 하나님과 그의 존재는 위의 것, 영광, 빛, 전능, 강함 그리고 깨끗함으로 서술된다. 반면에 병든 사람, 고난에 처한 사람 그리고 장애인은 결핍된 존재, 하나님에 거역하는 세력으로 처리된다. 이런 종류의 신학적 유형에 따르면 말구유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낮아짐과 무기력은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와 거리가 있다. 바흐에 따르면 이러한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에 적응하고 투사된 하나님인 바알이다.

바흐에 의하면, 신학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즉 강자의 시각에서 발현되어 나온 ‘지배신학’과 작은 자의 시각에서 나온 ‘섬김의 신학’이 있다. 인간이 된 하나님은 도움을 주는 존재이자 도움을 필요로 하고 도움에 의존적인 분이시다. 인간, Humanum의 정의 안에는‘결핍’이 내재하여 있다. 이러한 인간이해의 바탕에서 모든 이들은 도움을 주는 자이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섬김의 주체이자 대상이다.

나가는 말

“한국 소득분배 OECD 중 가장 취약”, 최근 어느 일간 신문의 제목이다. 2009년 가계 가처분 소득대비 공적이전 비율 스웨덴 32.7%, 한국 3.2%... 한국이 세금과 공적 부조를 통한 소득 재분배하는데 있어 오이씨디중 꼴찌란다. 쉽게 얘기하면, 한국은 자신의 소득으로 가난한 이웃과 연대하는 마음과 행동이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이다. 삽질로 온 나라를 들쑤셔서 토건경기를 살려 전체 국민소득지표를 올리려는 안타까운(?) 마음은 안다.

하지만 그 돈이 다 어디로 흘러가는 건가? 소수의 건설업자나 기업으로 들어가고 품꾼인 이들은 일용할 양식도 허덕이는 가난, 아무리 뼈빠지게 일해도 가난한, 신빈곤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성찰로부터 우리 기독교의 신앙적 진실에 대해 되물어 본다. 사회적 약자인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야훼의 요구를 우리는  얼마나 따랐던가? 야훼는 이러한 현실속에서 한숨을 내쉬신다. 하나님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야훼, 그분을 진심으로 신앙한다면...

나는 독일에서 10년간 공부하면서 거의 등록금을 안내고 다녔다. 아예 등록금 개념 자체가 없었다. 아이가 셋이면서 온갖 일을 하면서 학위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교육복지가 잘된 독일연방공화국의 혜택이라 할 수 있다. 독일 만하임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인 딸로부터 얼마 전 연락이 왔다. 요즘은 사정이 변하여 한국 돈으로 한 학기에 약 80만원 정도 등록금을 내는데 자녀가 2-3인 가정에 속한 학생들은 그 마저 다시 돌려준다하여 돌려받았다는 얘기다.

엊그제 청와대 앞에서 대학생들이 등록금인하를 촉구하면서 집단삭발식을 한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대표자 49명이 강제연행되었다. 인터넷 뉴스에 하얗게 삭발하는 어느 여대생의 눈물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한국의 민간부담 공교육비는 1.8%로 유럽연합 평균(0.1%)의 9배, 오이씨디 평균(0.4%)의 4.5배란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는 공부 좀 하려는 대학생들이 사회적 부담을 온통 짊어진 사회적 약자들이라는 사실이다.‘반값 등록금’을 공약으로 내세운 이명박 장로의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야훼 하나님의 하나님됨은 사회적 약자들과의 관계에서 판가름난다. 하 - 나 - 님 이라고 불리우는 신 모두가 야훼가 아니란 말이다. 구약성서안에는 시종일관 야훼 하나님과 바알신과의 투쟁사가 이어진다.

야훼는 어떤 분이신가?‘섬기는 존재’ 야훼는‘애굽의 고깃가마를 그리워하는(출16,3)’생각을 떨쳐 버리고 과감히 광야로 나가는 신이시다. 고난 받는 신만이 도울 수 있다는 본훼퍼의 말처럼, 고난 받는 신인 야훼의 섬김은 풍요와 강함, 번영과 성장만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하는 바알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섬김이다. 야훼 하나님은 위에 있는 신이 아니다. 오히려 아래에, 말구유와 십자가에 달린 분이시다. 바알적 지배에서 야훼의 섬김으로 나아가라!   

홍주민 위원  juminh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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