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5천 년의 역사는 외세의 침입으로 점철되어 왔으며, 그때마다 이에 속하려는 세력과 맞서려는 세력으로 인해 당쟁과 분파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사를 통해서 현재를 조명하며 미래에는 어느 나라의 간섭도 받지 않기를 염원해 오고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현실적으로 자유하지 못하다.

1945년 9월 8일에 공적으로 한국에 주둔하기 시작한 미군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무려 60여 개의 미군기지를 이 땅에 배치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점유한 땅은 적게는 수천 평에서 많게는 수천만 평에 이를 뿐 아니라, 각 지역의 허브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점유한 땅의 면적을 정확하게 통계 낼 수는 없지만 대략 드러난 것만을 합산하다 해도, 우리나라 4천8백만 인구의 수십 분의 일에 해당하는 국민이 일년 동안 먹을 쌀농사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그들이 60년이 넘게 이 땅에 주둔하면서 우리를 얼르고 뺨치고 해온 정치적 역학관계는 차치하고라도 이번 평택으로의 이전에서 야기된 것들에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들이 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정부가 끝까지 외면한다면 이는 국민을 위한 정치가 이미 인륜을 저버리고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지구 역사 이래로 가장 근본이었던 것이 땅을 일구고 경작해서 낸 소출을 가지고 먹거리를 해결하는 것이었으며, 이 먹거리야말로 인간을 생존하게 하는 가장 근원이 되는 에너지이다. 인간의 생존을 해결하는 이같은 방식은 지구가 없어지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 중요성 또한 실로 큰 것이다.

인류 문명은 1차 산업인 농업에서 2차 산업인 공업으로, 3차 산업인 서비스업으로 발전해 왔지만, 인간 스스로 존엄성을 지키면서 생존하게 해주는 토대는 결국 1차 산업인 농경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인류 생존의 토대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지금 평택의 대추리 들녘에서는 이를 지키겠다는 농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메아리치고 있다.

농사를 짓는 것과 그 일에 종사하는 것은 천하의 가장 근본이다[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 이는 시대의 흐름이 바뀐다고 해서 변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농경지가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줄어들고 있고, 농촌의 노동인력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실정에서, 정부는 주민들이 갯벌을 옥토로 일구면서 60여 년 동안 뿌리내리고 살아온 터전을 박탈하는 데에 앞장서고 있다. 주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합의한 것은, 실로 반인륜적인 결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세월 “사랑의 인”이 박혀온 터전을 무엇과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떠한 보상도 있을 수 없음을 목청높이 외치고 있음에도 이를 외면하는 것이 과연 국민을 위한 정부로서 할 일인가?

▲이순임 목사 -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사무총장

헌법에도 명시된 생존권과 거주권, 행복추구권 등을 간과한 정부의 공권력 집행은 당장 철회되어야 마땅하다. 자국민의 안녕과 보호가 우선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외교안보의 미명하에 협상 테이블에서 이를 관철하지 못한 채, 국민들에게 힘의 논리만을 내세워 밀어붙이기식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정부의 처사에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대추리의 황새울 들녘에서 올해도 씨 뿌리고 농사를 짓겠다는 주민들에게는, 미군의 군사패권을 위한 전쟁 전진기지라든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등의 정치군사 외교안보 문제는 아무런 대의명분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어제 그랬듯이 오늘도 소박하게 내가 일구어온 그 생명의 터전에 씨를 뿌리고 싶은 것이고, 내일은 이를 거두어들이며 소출의 기쁨을 느끼고 싶을 뿐인 것이다.

이순임  soonim_l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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