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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돌보지 않으면 안될 나약한 생명들"[조헌정 목사] 전태일다리에서 전한 하늘뜻 펴기
조헌정 | 승인 2010.11.01 10:56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안될 나약한 생명들

루가복음 24장 25-35절

이소선 어머니는 열사라 부르지 말고 동지라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열사라고 부르고 나면 우리와는 너무 동떨어진 분으로 여겨지는 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또 후배로서 그를 동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버릇이 없는 듯이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는 높임말도 되고 그리움도 담겨 있는 ‘님’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듯 하여 이후 님이라 부르고자 합니다.

저는 전태일님이 이 땅의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묻히었던 1970년,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이후 한국신학대학에서 교수님들로부터 자주 그의 이름을 접하기는 하였지만, 글을 통해 직접 마주하게 된 것은, 미국에서 다시금 신학공부를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님은 저의 삶을 저울질하는 사상가요 실천가로 자리매김하여 왔습니다.

전태일님은 35년간의 일제의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미소에 의한 남북분단과 대결로 인해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던 1948년 8월 어느 날 이 땅에 부름을 받아 태어납니다. 당시의 사회적인 혼란과 가정의 어려움으로 학교공부라고는 초등학교 4년이 전부이고 판자촌에 살면서 어려서부터 신문팔이, 구두닦이, 아이스크림, 우산장수, 손수레밀이 등 사회 밑바닥 일을 닥치는 대로 하다 16세 때에 평화시장에 시다로 발을 들여 놓습니다. 처음 그가 시다생활을 시작할 때의 기록입니다.

한 달 월급은 1,500원이었다. 하루에 숙박비가 120원인데 일당 50원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었지만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해야 했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희망과 서울의 지붕 아래서 이 불효자식의 고집 때문에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고 고파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막내 동생을 생각할 땐 나의 피곤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87쪽)

당시 커피 한잔 값이 50원이었으니, 하루 14시간 중노동의 값이 주인이 하루에도 몇 번씩 심심찮게 들려 먹는 커피 한 잔 값이라면 이는 노예노동이요 착취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당시는 그게 현실이었고, 박정희군사정권하에서의 수출국가로 몸부림을 치던 시기였기에 노동자의 복지 혹은 인권이라고 하는 것은 말 자체도 성립이 되지 않았다.

당시 업주들은 하루 열너댓 시간의 작업도 모자라 잠 안오는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아가며 철야작업을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휴일은 한 달에 두 번 그러나 이것도 꼭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매우 열악한 작업 환경이었습니다. 좁은 공간의 평화시장의 다락방은 매우 악명이 높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저희 집도 댓 명 정도가 일하는 조그마한 가내공업을 했는데, 집안 일로 평화시장 이 다락방을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자격지심이 들어 저보다 어린 소녀 여공들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곳은 노동지옥이었고, 인간 닭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당시 1만 명이 일하던 평화시장 건물에는 환기장치 하나 없었고, 남녀공용 화장실은 2천명에 세 개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들은 그 앞에서 항상 발을 동동거리며 긴 줄을 서야했고, 그리고 작업장으로 돌아가면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핀잔과 눈총을 받았던 것입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발을 들여 놓은지 2년이 지나면서부터 작업 환경과 업주들의 착취를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래 그가 취한 행동은 미싱사로부터 재단사가 되고자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더 높은 지위를 얻어 돈을 더 벌어보겠다는 욕심 때문이 아닙니다. 그때의 그의 기록입니다.

직공들이 대부분이 여공들이기 때문에 주인들의 이런 비위 사실을 직접적으로 따지는 예가 드물고, 대부분은 불만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나 또한 유일한 남자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 나도 어서 빨리 재단사가 되어서 노임을 결정하는 협의를 할 때는 약한 직공들 편에 서서 정당한 타협을 하리라고 결심했다.

인간 전태일의 눈물

그리고 그는 재단사가 되어 시다들에게 마음 착한 오빠로 인정을 받습니다. 전태일평전을 읽으면서 누구나가 감동을 받게 되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이소선 어머님의 회고입니다.

밤 1시가 지났는데도 아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평화시장에 취직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별별 생각을 다하며 안절부절 못하여 문밖만 내다보고 있는데, 새벽녘이나 되어서야 태일이가 터덜터덜 걸어 돌아왔다. 온몸이 이슬에 젖어 어깨는 축 늘어지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얀 게 불빛 아래서 보니 마치 죽은 사람의 얼굴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나 싶었나 싶어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면서도 본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희미하게 웃는 표정이기에 그냥 두고 보았더니, 그 뒤로도 한 사흘씩이나 계속 그런 일이 있었다. 도저히 더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는 막 집에 돌아온 아들을 불러 앉히고 물어보았다. 아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오다 파출소에서 자고 왔어요. 어머니나 나 집 나올 때 차비 30원을 주잖아요. 시다들이 밤잠을 제대로 못 자서 낮이면 꾸벅꾸벅 졸고, 일은 해야 하는데 점심까지 쫄쫄 굶기에 보다 못해 그 돈으로 풀빵 30개를 사서 여섯 사람에게 나눠주었더니 한 시간 반쯤은 견디고 일해서 그래서 집에 올 때 걸어오다가 파출소에 붙잡혔어요.”

그때 그는 청계천 6가에서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 다녔던 것입니다. 그 또한 온종일 시달린 몸으로 주린 창자를 안고 피곤한 다리를 휘청거리며 미아리까지 걸어가면 밤 12시 통금시간이 되어 야경꾼에게 붙잡혀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다시 도봉산까지 걸어서 집에 당도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자 파출소 순경들도 사정을 알고 그냥 통과시켜, 밤 한시나 두시가 지나 집에 돌아오는 일이 버릇처럼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3,4년 동안 계속 되었던 것이었다.(113쪽)

급식기적 이야기의 진실

누구나 이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께서 빈들에서 배고파 방황하던 5천명을 먹이신 급식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를 복음서 저자들은 왜 기록해 놓았을까? 인간이라는게 하루 세끼 평생을 먹어야 하는 동물인데, 그래 한 끼 먹인 일이 뭐 그리 장한 일이라고, 아니 엘리야는 사렙다과부와 그 아들에게 한 끼가 아닌 가뭄이 계속되는 삼 년동안을 그 집의 뒤주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하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도록 하는 기적을 베풀었으니 이는 예수의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아닌가요? 오천명 급식이야기. 이것이 그냥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이야기라면 그건 예수가 단지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고, 이는 단지 예수 자신의 명예를 드높인 일에 불과한 이야기 그뿐입니다. 이것이 복음서 저자가 전하는 얘기의 진실이라면 오늘 우리에게는 별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걸 믿는다고 해서 오늘 우리에게 빵 한 조각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이상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빈들에서 사람들을 50명씩 백 명씩 줄을 지어 앉혔다는 이 얘기는 모세가 이끈 광야생활을 떠올리며 하늘에서 내렸다는 만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 만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만나라는 하얀 떡가루가 하늘에서 떨어져서 백성들이 이를 주어다 먹었다는 기적이 초점이 아닙니다. 거기에 시선을 빼앗기면 그건 신비를 강조하고 기적을 떠드는 다른 종교 이야기와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중요한 구절은 이것입니다. “많이 거두어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덜 거두어들이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결국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 들였던 것이다.”

광야생활에 기적이 있다면 저는 이게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많이 거둔 사람과 적게 거둔 사람이 되로 재어보니 다 똑같아질 수가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과정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모세광야 만나급식 기적이야기’나 ‘예수 빈들 급식기적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초점은 무엇인가요? 첫째는 물질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신앙의 고백이요, 둘째는 인간이 서로 제각기 더 많이 가지려고 수고하지만 결국은 똑같다는 얘기입니다. 이 말은 조금 더 해석하면 인간의 능력은 제각기여 많이 거두어들인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어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나누어 같게 하라는 하늘의 명령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성서가 우리의 골수를 쪼개고 영혼을 소생시키는 살아 있는 말씀이 되려면 바로 이러한 얘기가 과거의 얘기가 미래를 향한 하늘의 명령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전태일님이 30원의 버스비로 6명의 시다들의 배고픔을 면케 해주고 자신은 걸어서 새벽 녁에나 집에 돌아왔다는 이 이야기는 오늘날의 급식기적 이야기가 아닌가요? 전태일님은 21살이 되던 어느 겨울 그의 일기에 이렇게 씁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오늘 남한의 20대 재벌의 반 이상의 가정이 재산문제로 형제간에 법적 투쟁을 하였습니다. 그래 어떤 머리 회전이 뛰어난 재벌은 그 자식들에게 재산을 미리미리 떼어주기 시작했는데, 해외 부동산투기는 말할 것도 없고 2살도 안된 자식에게 1억원의 재산을 준 부모도 있고, 어떤 재벌은 이게 겨우 열 살인데 200억 이상의 자산을 주었습니다. 열 살 때부터 돈을 눈덩이처럼 굴리는 자본주의 방식을 배우라고 주었겠지요.

열악한 노동조건과 환경 개선을 고민하던 전태일님은 근로기준법이 있음을 알게 되고 뜻이 맞는 친구들과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기준법이 준수되도록 투쟁을 하다 해고를 당합니다. 이후 두 달가량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다 1970년 23세 9월 다시금 평화시장에 재단사로 취직을 하고 바보회를 다시 재조직하고 틈나는대로 서울시청, 노동청, 신문사, 방송국 등을 찾아다니며 평화시장의 근로조건 실태를 진정합니다. 10월 초순 그는 다시금 해고되고 이후 설문지에 근거로 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작성해 노동청장과 각 신문사에 투고합니다. 10월 7일 각 석간신문에 이 기사가 나고 노동청에서 조사관이 나와 모두가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는 말뿐 거의 실현되지 않자 여러 차례 데모를 계획하나 노동청의 회유와 경찰의 경비로 실패합니다. 결국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데모를 하기로 계획하고 이날 근로기준법을 화형에 처하기로 합니다. 13일 당일 오전부터 평화시장에서 불어난 경비원들과 경찰들에 의해 삼엄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낮 1시부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시장 앞에 모인 500여면의 노동자들과 경비원들과 경찰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오후 2시경 전태일님은 골목에서 석유를 온 몸에 끼얹고 근로기준법 책을 손에 쥔 채로 몸에 불을 당깁니다. 불길에 휩싸여 거리로 뛰쳐나온 전태일님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외침과 함께 쓰러집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일기와 그의 삶은 수배중이던 조영래인권변호사에 의해 책으로 만들어지고 이 책은 우리 노동운동사와 민중운동사에 굵직한 선을 긋습니다. 문익환, 서남동, 안병무를 비롯한 당시의 시대를 고민하는 지식인치고 이 전태일열사로부터 깨달음을 얻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죽던 해 1970년 초 그간 남긴 소설작품 초고의 한부분입니다.

<업주들은 한 끼 점심값에 이백원을 쓰면서 어린 직공들은 하루 세끼 밥값이 50원, 이건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들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각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 즉 인간입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종교는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법률도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부한 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합니다. 천지만물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다 고귀합니다. 죽기 싫어하는 것은 생물체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여기 본능을 모르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생명체가 있습니다. 선생님 그들도 인간인 고로 빵과 시간, 자유를 갈망합니다.> (전태일평전 215쪽)

18세기의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야 말로 모든 사회적 부를 창출해낸 당사자들이지만 자본주의의 부조리는 이들을 사회적 약자로 내어몰고 말았습니다. 오늘 남한은 400만의 실업자와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전체 노동자의 50%를 넘어섬) 그리고 88만원 청년세대라는 단어가 말해주듯이 자본주의 병폐의 가장 극심한 상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반면 거짓과 허위 투성이로 가득 찬 747공약의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부터 재벌들을 불러 어려움이 있으면 직접 전화하라고 합니다. 친 약자로서의 국가 권력의 기본을 상실하였을 뿐더러 감세와 친 부자정책으로 빈부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4년 전 평택미군기지를 반대하는 일로 인해 지난 1월 중순에 서울구치소에서 11일을 살다 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그곳에서 하루 5만원의 벌금을 내지 못해 들어온 우리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선량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고, 그 죄목 또한 생계곤란으로 인한 취중 감정 폭발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노동자의 인권을 말할 때에 대부분 일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권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권리조차 빼앗긴 밑바닥의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바로 저들이야말로 전태일님이 자신의 버스표로 풀빵을 사서 먹인 여공 시다들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이러한 차별과 부조리의 사회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 전태일님이 살아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실천을 하였을까를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예수

님은 이소선어머님의 영향으로 교회를 다녔고 학생회장도 역임했으며 일로 교회를 나가지 못할 때에 괴로워했습니다. 님은 성서를 읽어 예수의 삶을 알고 있었습니다. 님이 죽던 해 겨울에 다른 공사장도 있지만, 굳이 당시 어머님이 다니던 교회 목사님과 관련이 있던 삼각산 임마뉴엘의 건물 공사장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졸라 5개월간 인부노릇을 하게 된 것은 분명 예수를 따라 골고다의 십자가를 지려는 의도였다고 저는 믿습니다.

죽음을 결심한 어느 날 일기장에 그는 이런 글을 씁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삶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평전 239쪽)

저는 이 기도야 말로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던 그 기도라고 믿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생각하셨을 때, 죽어서 하늘나라 가는 것을 목표로 하셨을까
요? 아닙니다. 예수께서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 땅에 영원토록 머물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님이 고백한대로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한 방식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죽기 직전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이것이 자신의 몸과 피임을 말씀하시면서 이 일을 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곧 우리는 성찬의 예식을 행하면서 예수가 바로 우리 곁에 아니 우리 생명 안에 살아 있음을 고백합니다. 스승 예수가 붙잡혀서 사형 언도를 받자 제자들은 도망을 쳤고,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여기 엠마오가 고향인 두 제자 역시 낙담 속에서 터벅터벅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의 스승 예수와 더불어 가졌던 새 역사를 향한 모든 꿈과 이상을 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없이 걸어가던 그 두 사람에게 어떤 나그네가 접근을 하여 말을 겁니다.

어디서 내려오는 길입니까? 예루살렘에서 내려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힘이 없이 걸으시오. 아니 당신은 지난 주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을 모르시오? 그렇게 해서 시작된 대화. 그리스도는 영광을 얻기 전에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예언자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목적지 엠마오에 도착을 했고 날이 어두운 가운데 헤어짐이 섭섭하여 함께 식사를 나눕니다. 나그네가 떡을 떼며 감사기도를 하자, 그때 그들의 눈이 밝아지며 이 나그네가 부활한 예수임을 깨닫습니다. 예수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들은 곧 다시금 걸어왔던 그 길을 거슬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다시금 그 어둠의 시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까요? 스승 예수를 죽였던 자들이 득의만만하게 축배의 잔을 펼치고, 눈에 가시 같은 예수를 죽였으니 이제 그들을 따르는 자들을 이 기회에 일망타진하자고 결의를 드높이던 그 죽음의 도시로 말입니다.

부활, 그건 무엇입니까?
 
예수의 부활 그것은 빛이 나는 하얀 옷을 입고 계시는 단순히 신비의 현상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들 가운데 함께 했던 한나절을 걸어가며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그 나그네가 부활 예수로 판명된 그 나그네가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분이었다면 그들이 알아채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 예수는 평범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부활한 예수는 어디에 계신가요? 오늘 그들과 같이 있겠다고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저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나요? 아니면 여기 어디에 계신가요?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 거하면 자신이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생명입니다. 불의한 세력 저 어둠의 세력 앞에 당당히 맞서는 저항의 생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불의한 세력에 눌려 그냥 엠마오로 내려간다면 우리는 그저 하나의 이유 없이 왔다가는 인생으로 그쳐지고 말겠지만, 그러나 만약 우리가 저 불의한 세력들에 의해 희생당하는 저 나약한 생명들을 바라보며 저들이야 말로 내가 돌보아야 할 생명체임을 깨닫고 저들을 향해 나아간다면, 저 예수를 살해했던 저 죽음의 도시를 향해 다시금 촛불을 켜고 나아간다면 부활 예수 부활 전태일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40의 상징

올해는 전태일님을 기억하는 40주기를 맞는 해입니다. 기독교 성서에서 40이란 숫자는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개입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노아홍수 40일 이는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심판하는 기간이었지만, 동시에 이는 제2의 창조라 말할 수 있는 무지개로 상징되는 새로운 구원약속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본래 애굽의 노예였던 히브리족속들, 그 당시에 가장 하층계급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님에게 울부짖으며 노예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곤 모세의 영도 아래 광야 40년의 삶을 보냅니다. 고난에 찬 세월이요 힘든 여정이었지만, 거기서 그들은 앞으로 그들이 살아가야 할 하늘의 약속 말씀을 받았고, 그 말씀에 따른 새 백성으로서의 훈련을 받았고 결국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곧 40은 새로운 계약 백성으로 출발하는 감격의 시간이었고, 노예로부터 자유민으로 탈바꿈하는 해방의 시간이었으며, 제국이 갖는 힘과 자본과 계급의 차별을 없애고 오직 하느님만을 왕으로 섬기는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함을 외치는 인간 역사에 새로운 장을 펴는 새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의 금식 광야기도 40일. 이는 물질 욕망을 이겨내고 남을 누르는 권력욕망과 명예욕망을 떨쳐내고 정의평화생명진리의 하느님 나라 실현이 그 어떤 가치보다도 앞선다고 하는 인간선언이자 자유해방선언이었습니다.

보냄의 말

그대가 자유를 찾아서 떠나려고 하거든
그대에게 정해진 목표를 찾아 거기에 복종하고 또 순종하십시오.
마음대로 행하지 말고 정의를 행하십시오.
가능성 속에서 동요하지 말고 현실을 담대히 붙잡으십시오.
자유는 생각의 도피 속에 있지 않고 행동 속에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에 대한 계명과 자신의 믿음에 의지하여
두려움의 주저함을 깨고 사건의 폭풍 속으로 나서십시오.
-본 훼퍼-

조헌정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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