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일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

‘만주국은 내 손으로 만든 작품이었노라’고 호언(豪言)하던 A급 전범(기시노부스께 岸信介)의 손주, 그리고 그 만주국에서 우리 독립군 부대 토벌에 전념하고 있던 만군 육군 소위(다까기 마사오 高木正雄)의 딸이 동시에 일본의 총리, 그리고 한국의 대통령으로 등장하게 된 모습을 내다 보면서, 이것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가꾸로 돌리려는 운명의 짓궂은 작란이 아닐까, 두려운 마음으로 문 목사께서 살아 계셨을 때의 지난날을 다시 한 번 되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4반세기의 세월이 흘러간 1989년 정월 초하루, 문 목사께서 평양방문의 결의를 굳히시고 읊으신 「잠꼬대 아닌 잠꼬대」의 구절들이 지금 절실하게 기억에서 떠오르고 있습니다.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바꾸며,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어 놓고서,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서 38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것」, 바로 그것이 역사를 다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스스로 사는 길이라고 문 목사께서는 말씀 하셨습니다.

역사를 스스로 살기 위하여 기어코 당신께서는 그 해 안으로 평양방문을 단행 할 것이나, 만일 평양 가는 길이 막힐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나? 「임진강을 헤엄쳐 가다가 총이라도 맞아 죽는 날이며,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겠노라」고 까지 문 목사는 말씀 하셨습니다.

문익환 목사는 무슨 이유로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평양 방문에 집착하셨겠습니까, 그 집착이 문 목사께서 ‘깡통 빨갱이’였기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고통의 근원이 분단에 있으며 남의 나라가 멋대로 그어 놓은 38선은 하루 속히 걷어치워야 되겠다는 단호한 결심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드디어 결심이 관철되어 평양에 도착하셨을 때 문 목사가 공항에서 발표하신 제一성은 “모든 통일은 선인가, 그렇다. 우리 민족에게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는 확신의 표명이었습니다.

▲ 도쿄 맥아더사령부에서 통역관으로 한국전쟁을 지켜본 2인. 1952년에 함께한 문익환 목사와 정경모 선생

문 목사께서 평양에 도착하신 다음날(4월25일)은 기묘하게도 그해(1989년)의 부활주일이었는바 문 목사께서는 평양 봉수교회 강단에 올라 목메어 우는 소리로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민족을 둘로 가르고 있는 38선의 굴레가 문 목사에게는 그토록 고통스럽고 저주스러운 질곡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그 38선이 눈에 안 보이는지, 그 질곡의 고통이 아프지 않는지,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갈 듯한 오늘의 모습이 오히려 역사의 축복이나 되는 듯이, 뭐 한류문화의 르네상스가 어떻고, 오바마까지 감상했다는 싸이의 강남스타일 말춤이 어떻고 하면서 그 천박한 겉모양의 근대화 바람에 철딱서니 없이 날뛰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의 난무를 보면서 한심스러운 느낌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생각컨대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말하자면 풍요를 베풀어 준다는 사신(邪神) 바알을 숭상하며 번쩍번쩍 빛나는 금송아지 앞에 절하고 있는 자들이요, 자기가 지금 있는 곳이 바로 바벨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이 어처구니없는 풍조에 마음이 어수선해지며, 19년 전 오늘(1994, 1, 18), 스파이라는 당치도 않은 누명을 쓰시고 천수를 다하지 못하신 채 세상을 떠나신 문 목사님의 지난날의 모습이 더욱더 그리워집니다.

일본에서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선생   1924년 서울 출생, 경기중학 졸업후 1945년 일본 게이오 대학 의학부 예과를 수료한 후 도미. 1950년 미국 에모리 대학 문리과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 애국의 일념에 미국군에 지원입대, 당시 맥아더사령부에서 통역요원으로 지내면서 문익환, 박형규 목사 등과 친분을 쌓았다.휴전 이후에도 유엔군 군사정전위원회 소속으로 56년까지 활동했으나 미국의 침략성과 차별에 분노하며 정전위원회직을 사퇴했다. 한국정부의 기술고문으로 활동하던 중 이승만 정권의 친미, 반민족성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그만둔 후 미국에서 10년간 생활하면서 브루스 커밍스등과 교분을 쌓으며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1970년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면서 활발한 문필활동을 통해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매진했다. 73년 『민족시보』주필을 역임했으며, 이 해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을 때 <세카이>9월호에 기고한 그의 글을 통해 그때만 하더라도 인지도가 없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사회에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1980년 '씨알의 힘'이라는 사숙을 열어 남북통일의 이론적 틀을 제공함은 물론, 재일조선인 문제에도 천착하면서 재일조선인 사회의 대표적인 통일운동가이자 이론가로 활약했다.   그의 주장 및 이론은 잡지 '씨알의 힘'(씨알의 힘 발간. 1-9호)에도 실렸는데, 6호 '삼선각 운상 경륜문답'(<찢겨진 산하>의 오리지널판)은 민족지도자 김구, 여운형, 장준하 선생 등이 사망 후 천상에서 민족의 미래를 논하는 희곡식을 구성되어 있다. <찢겨진 산하>는 80년대 중반 해적판으로 국내에 역수입돼 당시 운동권들의 필독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저서로는 『어느 한국인의 생각』『일본인과 한국인』『한국민중과 일본』『기로에 선 한국』『찢겨진 산하』『일본의 본질을 묻는다』등이 있으며, 역서로 『한국전쟁의 기원』등이 있다.   정 선생은 올해로 망명생활 36년째를 맞이하고 있으며, 현재는 요코하마 히요시의 자택에서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처와 2남이 있으며, 차남 아영은 '제주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오사카)'의 사무국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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