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ygmunt Bauman’(지그문트 바우만)이라는 영국의 사회학자가 있다. 1925년생이니 올해로 88세가 되셨다. 폴란드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 소련군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가담해 바르샤바로 귀환했다고 한다.

폴란드 사회과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이후에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진학해 철학을 공부했다. 1654년 바르샤바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캠페인의 절정기에 교수직을 잃고 국적을 박탈당하고 조국 폴란트를 떠났다.

그의 정신적 고향인 이스라엘로 향했지만, 시온주의의 공격성과 팔레스타인의 참상에 절망을 느꼈다고 한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1971년 영국의 리즈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해 영국에 정착하기에 이른다. 1990년 정년퇴임 후 리즈대학교와 바르샤바 대학교 명예교수로 지내면서 왕성한 집필 활동과 학문활동을 하고 있다. 

▲ 근대성에 대해 탁월한 관찰을 수행한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재미있는 것은 은퇴하기 직전 해인 1989년에 출판된 『Modernity and the Holocaust』(근대성과 홀로코스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80년대 초까지는 마르크스주의를 중심적으로 연구했고 90년대에 들어서는 탈근대 문제에 천착한다. 그리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Liquid Modernity’(액체 근대) 시리즈를 출판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여갔다.

번역상의 문제이지만,  ‘Liquid’라는 단어를 ‘액체’로 번역하는 분들도 계시고 ‘유동성’으로 번역하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바우만의 책 『액체 근대』에서는 ‘Liquid’를 ‘액체’로 번역했었다. 그런데 번역되어 출판된 시기로는 먼저이지만, 내가 접하기로는 『액체 근대』보다 늦게 읽게 된 『유동하는 공포』에서는 ‘Liquid’를 ‘유동’으로 번역했다. 어느 것이 좋은 번역인지는 전공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내 개인적인 어감으로는 ‘유동’이 더 나은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액체 근대

어쩄든 『액체 근대』라는 책에서 바우만은 근대를 20세기 근대와 21세기 근대로 나눈다. 20세기의 근대를 근대라고 한다면 20세기 근대는 이차 근대, 탈근대 등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바우만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로 확장시켜 간다. 고체 근대가 견고하고 무거운 근대라면 액체 근대는 유동적이고 가벼운 근대라는 것이다. 

근대가 “무겁고, 고체 같고, 농축되고, 체계적인 근대성”이며 포드주의적 공장과 관료제로 상징된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바우만은 문명의 역사를 ‘유목민에 대한 정착민의 승리’라고 정의한다. 유목민이 원시적이며 자연적이며 비공간적이라고 한다면 정착민은 문명적이고 지배적이며 공간적이라고 보았다. 정착민의 공간에 대한 지배를 통해 문명화를 가속화시키고 고체 근대를 앞서 언급한 대로 포드주의적 세계로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이 체제는 우연성, 불명확성, 다양성을 공공의 적으로 삼았고 전체주의적인 획일화와 단일화의 충둥에 따라 사회를 ‘철창’으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체 근대’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무시하면서 공간을 지배했다. 따라서 근대의 비판이론들은 어떻게 이 철창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의 자율성과 개인성을 해방시킬 수 있는가에 몰두했다. 

▲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

하지만 근대는 시작에서부터 ‘액화’라는 특성을 갖고 시간을 따라 유동하는 성질도 내포하고 있었다. 유동성의 배치에서 공간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액체는 공간을 차지하지만 고체처럼 고착적으로 점유하지는 않는다. 액체의 공간 점유는 언제나 순간적이다. 그러나 견고한 것들을 무너뜨리고 변화의 속도를 추동한다. 

이것을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목민의 가치가 새삼스럽게 조명되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유목민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공간의 지배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 화두가 되었고 ‘더 빠른 것과 더 느린 것 사이의 게임’으로 보았다. 공간이라는 지속성보다는 시간이라는 순간적인 만족을 추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탈-육체화된 노동인 소비자 사회의 특징이다. 

액체 근대, 사람을 소비자로 만드는 세상

고체 근대는 고정되어 있지만 ‘액체 근대’는 흐르면서 견고한 것들을 녹이면서 이동한다. 이 지점에서 두 근대 사이에서 단절이 일어난다. 과거를 회고하는 근대성과 오늘날을 사는 세대들이 겪는 근대성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와 단절이 존재한다.

액체근대는 모든 결속에서 벗어난 개인화로 특징지어진다. 법적인 자율성을 얻는 근대의 개인은 자신 스스로를 사회공간에서 유일하게 적법한 주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이상 얽매이지 말자”고 외치며 자기계발의 주체가 되었다. 

액체근대에서 자본은 감원, 규체 철폐, 유연화, 재정과 부동산 및 노동시장의 자유화를 위해 국가, 민족, 지역, 성별, 계급적 정체성의 벽을 뚫고 개인들을 적시고 말랑말랑 하고 가벼운 소비자로 변신시킨다. 결국 지도자와 추종자 간, 자본과 노동 간 결속과 상호의존이 종말을 맞게 된다. 엘리트들은 ‘도망가고 미끄러지는 기술들’을 통해 모든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비자로서 상품 선택의 다양성을 자유의 확장으로 인식하게 된 개인들은 꼬드김, 욕망, 일시적 바람에 요동하지만 대문자 정치에서는 자유방임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 전지구적 자본의 질서는 불안정성과 불확정성, 불안감이라는 거대한 구조를 일상화시켰다. 그러나 사회적 모순과 위험을 해결할 의무와 필요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남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공간은 신뢰와 참여, 헌신 대신 도피와 무관심만 넘쳐나는 빈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비자로서의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삶의 불안 사이의 깊어가는 부조화에 대한 반응으로 개인은 확실성과 안정을 갈망하게 된다. 돈 많은 소수는 삼엄한 경비로 보호되는 ‘요새 주택’에 안주하는 길을 택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형적인 공동체주의로 회귀했다. 

바우만은 공동체주의의 대표격인 민족주의가 내부의 갈등을 무화시키고 동질성의 신화를 만들기 위해 외부의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폭력을 수반한다고 보았다. 그는 최근에 일어난 인종학살이나 전쟁이 바로 민족주의의 결과물이며, 액체근대가 ‘화약고 사회’라는 출생시킨 근대임을 주장했다. 

이 책은 이런 면에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계승하며 “세상과 정치적 다리 놓기”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성의 ‘녹이는 힘’에 대항해 어떻게 진정한 정치적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이 책 전반에 근대에 대한 통찰력은 넘쳐나지만, 현란하고 반복적인 수사에 무기력해지거나 지루해 지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정훈 기자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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