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이 어지럽다. 전쟁과 혼란이 그치지 않는다. ‘소국과민(小國寡民)’의 평화로운 나라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구촌에서 평화를 누리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주변 상황이야 어떠하든지 자신만은 내면의 평화를 누린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회와 집단 국가와 세계로 눈을 돌리면 이내 평화를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이러한 차제에 인류에게 평화의 빛을 던져준 성현들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는 일도 오늘의 갈등과 적대적 긴장 관계를 풀어 가는 작은 해법의 하나라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자문해 보면서, 유(儒), 불(佛), 도(道), 기(基)의 성현들의 어록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2.
우선 노자는 원수를 어떻게 보답하라고 했을까? <도덕경> 63장에서 노자는 “원한을 덕으로 갚아라(報怨以德).”라고 했다.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는 일은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노자는 원수, 곧 적에 대해 응답하는 방식의 최선책으로 ‘덕(德)’을 말한 것이다. 노자에게서 덕은 도(道)의 실천이다. 노자에게서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의 실천적 덕목은 천지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인간의 탐욕이 배제된 무위(無爲)의 경지에서 일체 모든 언행이 이루어지는 경지다. 한마디로 사심(邪心) 없는 깨끗한 행위로 일관하는 것이다.
<도덕경 79장>에서도 “큰 원한은 해결해도 반드시 원한이 남는다(和大怨, 必有餘怨). 그러니 어찌 그것을 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安可以為善)?”라고 했다. 설령 원한을 해결하려 해도, 덕이 아닌 다른 법적 강제적인 방식이라면 원한은 남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덕으로 원수를 갚는다.’라는 내용이 중요하다. 문제는 덕의 함양과 실행을 통해서 적(敵)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도덕경 38장>에 “훌륭한 덕(上德)은 덕을 내세우지 않는다(不德), 그래서 덕이 있다(是以有德).”라고 했다. 덕을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덕이 있게 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인데, 자본주의 경쟁 산업사회에서도 이러한 말이 통할까?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 실행의 가능 여부는 차치하고 다음에서 공자의 경우를 살펴보자.
3.
공자는 노자보다 한 단계 더 구체적인 실행 가능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논어> ‘헌문(憲問)’편에서 “바르게 함으로써 원한을 갚아라(以直報怨).”라고 했다. ‘바르게 한다’라는 것은 당시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나라가 도와 예(禮)를 어기고 부정과 착취와 억압이 횡행하던 시대의 일체 불공정한 행위를 바로잡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요즈음 표현으로 말하면 ‘공정(公正)과 상식’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윤석열’이 그 스스로가 내세운 ‘공정과 상식’을 무너뜨리고 ‘내란수괴’ 혐의로 구치소에 들어간 꼴이다.
공자의 경우 원수를 보답하는 방식이 ‘바르게 함(以直)’에 있었는데, 노자의 경우는 ‘덕으로써(以德)’ 원수를 갚는 방식이었다. 상호 간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공자는 원수를 맹목적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태도(直)로 원수를 갚는 것이었으니, 예와 법을 더 중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노자는 ‘예와 법’ 이전의 더욱 소중한 근원적 가치인 도에 입각한 덕의 실현이었다.
4.
원수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석가의 경우는 어떠한가? 초기 불교 경전인 <법구경, Dhammapada> ‘쌍서품(雙敍品)’에 의하면, “원한은 원한으로써 풀리지(멈추지) 않는다(Na hi verena verāni). 오직 자비(averena, 원한을 없앰)로써 풀린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라고 했다.
팔리어로 된 이 <법구경>을 후진(後秦) 시대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 한역(漢譯)으로 번역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원증지원증(怨憎止怨憎), 불이원지원(不以怨止怨). 이덕지원증(以德止怨憎), 시즉위영지(是則為永止).” 다시 우리말로 해석하면, “원한은 원한으로 멈추지 않는다. 오직 덕(德)으로써 원한을 멈출 수 있다. 이것이 원한을 영원히 멈추는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 적이나 원수를 대할 때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면 악순환이 지속된다는 뜻이다. <숫타니파타, Sutta Nipāta>에서도 “모든 존재에게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라. 원수조차도 사랑으로 감싸라.”라고 했다. <맛지마니까야, Majjhima Nikāya>에서도 “누군가 그대에게 화를 내고 모욕하더라도, 그것을 받지 않으면 상대의 악행은 상대에게 돌아간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원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보복보다는 용서와 자비, 지혜를 통한 초월을 강조한다.
5.
이제 원수를 대하는 예수의 경우를 살펴보자. 예수는 <성서>에서 원수를 대하는 방법에 대해 사랑과 용서를 강조했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43-44).” 이는 기존의 유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모세 율법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출 21:24)와 같은 보복법과는 정반대되는 가르침이다.
예수는 또 보복보다는 인내와 용서를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마태 5:38-39).” 이 말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폭력을 참으라는 뜻이 아니라, 악을 악으로 되갚지 않고 사랑과 인내로 대하라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일련의 예수의 주장은 비폭력 저항과 평화운동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6.
이상에서 원수를 대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방안에 대해, 노자와 공자, 예수와 석가라는 성현들의 견해를 각각의 경전을 통해 살펴보았다. 노자는 ‘덕으로 원수를 보답(報怨以德)’하고, 공자는 ‘바름으로 원수를 보답(以直報怨)’하며, 예수는 ‘사랑으로 원수를 보답(報怨以愛)’하고, 석가는 자비의 ‘덕으로 원한을 그쳐라(以德止怨)’라고 했으니, 모두가 ‘덕과 바름 그리고 자비’로 원수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했다.
오늘날 나와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갈등과 시비 그리고 원한이 그침이 없다. 윤석열 정부로부터 빚어지는 ‘원한(怨恨)-내란(內亂)’에 입각한 적대(敵對)적 한국의 국내 정치 상황도 그렇고, 분단 한반도의 남북 민족 모순과 남한 내부의 남남 관계도 그렇다. 산적한 원한의 문제를 하루아침에 풀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 지도자일수록 먼저 겸허하고 온유한 자세로 백성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관계의 각성과 회복이 절실한 시점이다.
‘바름(公正)과 자비(慈悲)’의 덕은 말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공자가 말한 ‘바름’은 현대적 의미로 ‘정의(正義)’에 해당한다. 이 ‘정의’는 다시 인간 생명의 존엄과 그에 따른 ‘복지’ 개념도 같이 간다. 노자가 말하는 ‘위도일손(爲道日損)’의 수행을 ‘무위(無爲)’에 이르기까지, 너나없이 뼛속 깊이 ‘바름’이 맥박치는 심장의 뿌리로부터 상호자비(相互慈悲)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적대적 긴장 관계가 ‘애대(愛對)적’ 평화 관계로 변하기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