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의 열정이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끊임없이 적을 찾는 마음, 적을 향한 분노와 혐오를 가득 품은 마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나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거나 제거하겠다는 마음, 이런 것들이 적의(敵意)다. 지금 우리는 적의의 열정이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나라와 세계 곳곳에서, 혐오와 적대감을 통해서 얻는 힘과 열정이 개인들의 이성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국가의 민주적 정치과정을 혼란시키고 위협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이민자들과 이슬람에 대한 혐오로 뭉친 극우 포퓰리즘 정치가 유럽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계속 듣고 있다. 윌리엄 코놀리가 “복음주의-자본주의 공진기계”(1)라고 불렀던, 미국에서의 극우 정치와 복음주의 기독교의 결합은 이미 오랫동안 유사 파시즘으로 발전해 왔으며, 대중의 혐오와 적대감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이용하는 트럼프의 미국으로 구체화 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종북 반국가 세력이라는 매우 이념적으로 고안된 가상의 적을 향한 적의로 뭉친 기독교와 극우 정치의 결합이 12.3 비상계엄 이후에 사실상 내전을 선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단 과정에서 기독교와 우파 정치의 결합이 만들어 낸 참혹하고 잔인한 결과들을 기억하면서도, 또 서북청년단이 재건 깃발을 거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부터 거리에 등장한 보수 기독교와 극우 정치의 결합을 보면서도, 지금처럼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예민한 관심이 역으로 그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극단주의나 파시즘 같은 용어조차도 주저하면서 사용해 왔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극단적 혐오와 적대주의 정치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흔들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적 정치과정을 전면 부정하면서 자신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수거하여 제거하거나 척결하기 위해서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대통령을 보면서 우리의 그리고 나의 안일함과 나태함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후 국회에 백골단이 등장하고, 적의와 혐오의 광기로 가득한 그들이 서부지검으로 난입하여 스스로 민주적 법질서를 전면 무시하면서 내전을 실제로 실연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 일부는 탄핵이 이루어지면 차라리 죽겠다고 말하면서 타협 불가능한 적의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보수정치는 이 혐오의 광기를 가라앉히려 하기보다는 편승하거나 오히려 기름을 붓고 있는 모습이다. 잠복해 있던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한순간 현실이 되고 있다. 넘쳐나는 적의의 열정들이 한국 민주주의를 흔들어 혼미하게 하고 있다.
적의의 열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0-30대의 남성 청년들과, 보수적 노년층과, 그리고 보수적 기독교와 우파정치를 결합하는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지금 묻고 있다. 그토록 강렬하고도 파괴적인 혐오와 적의의 힘과 열정의 뿌리는 무엇이며, 왜 그것이 개인들과 집단을 사로잡게 되는지 묻고 있다. 백골단, 남성연대, 애국청년, 순국 결사대, 특임(특수임무) 전도사, 국민 저항권 같은 용어들이 만들어지거나 받아들여지게 되는 조건과 상황은 어떤 것일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 명령만 내리면 달려가겠다고 말하는 사람들, 공수처 앞에서 분신한 사람을 열사로 치켜세우는 사람들, 그들의 신념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일까? 죽고 순교해야 할 때를 자신이 알려주고 있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그런 목사를 시대의 선지자나 메시아처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단순히 일시적인 오해나 무지나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하거나, 권력욕에 사로잡힌 지도자의 혹세무민(惑世誣民)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경제적 이유나, 이념적 혹은 교리적 이유로 환원시켜 보는 것도 충분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아킬레 음벰베는 이와 같은 극단주의적 운동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위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존 에너지로부터 그 힘을 이끌어 내고 있다고 해석한다.(2) 다시 말해, 극우 종교와 정치가 내뿜는 적의의 열정이 생명들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망과 결합하고 있기 때문에 예상 밖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존의 에너지 곧 살려는 힘은 두 가지 다른 방향으로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외부를 긍정하면서 그들과의 화해를 통해서 생존을 지속시키는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의 외부를 적으로 돌리고 혐오하고 배제함으로써, 외부와의 끊임없는 투쟁과 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지키려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유사 파시즘적 정치는 후자의 방식으로 생존 욕구의 실현 방식을 오도하는 정치다. 모든 존재하려는 욕망과 에너지를 외부를 향한 혐오와 적의로 변환시키는 정치다. 우리와 그들을, 친구와 적을 명확히 갈라놓고, 그들과 적을 향한 혐오와 적의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고 하는 매우 본질주의적 지향을 갖는 정체성 정치다. 극단주의와 파시즘은 이처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존재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망과 결합하고 있는 적의를 동력으로 하는 정치다.
존재와 생존을 향한 욕망을 외부를 향한 적개심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명확히 적을 지목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적을 끊임없이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적개심 그 자체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적은 언제든지 용도 폐기된다. 적을 생존에 대한 위협이라고 그들은 말하지만, 사실 적은 그들에게 생존의 에너지를 불러내는 촉매다. 적들과의 투쟁이 곧 존재이고 생존이다.
그런데 이러한 적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지금 그 적들이 나와 우리 집단에게 위해를 가하고 있고, 권리를 빼앗고 있고, 또 앞으로도 더욱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가장 그럴싸한 위기의 서사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 적들에 의해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기고 희생당하고 있다는 희생자 서사를 설득력 있게 만들어 내야 한다.
만약 서사의 연결들이 부실하다고 보일 가능성이 있으면, 가짜뉴스와 음모론과 종교의 신화적 서사를 동원해서라도 위기 서사와 희생자 서사의 모든 빈틈을 강렬한 감정으로 메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적을 분명히 지목해야 적의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희생자 서사와 쇠퇴 서사와 증오 서사를 결합해 내는 과정에서 보수 기독교의 근본주의적 신학이 아마도 매우 중요하고도 효과적인 접착제의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실업과 고용의 위기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직면한 청년들에게 당신들의 문제와 불안의 원인이 페미니즘에 감염된 여성들에게 있다고 속삭인다. 노동자들이 처한 어려움과 오늘과 내일의 중요한 사회문제의 원인이 이주민들에게 있다고 은밀하게 말하면서, 대중이 적의가 향해야 할 대상을 일러준다. 다원주의자들과 다른 종교들 때문에 국가의 종교와 이념과 문화가 쇠퇴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 모든 미워해야 할 적들의 배후에 중국과 북한이라는 주적(主敵)과 그 주적을 돕는 세력이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희생자 서사와 쇠퇴 서사가 혐오해야 할 적을 명확히 가리키는 방향으로 생산되고 결합한다. 이 모든 서사 만들기 시도에서 사실은 중요하지도 않고 적의 실재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기본적인 존재와 생존의 욕망을 외부를 향한 적의를 통해서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의 실재 유무와 상관없이, 그들은 적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위협하는 적의 모습도, 그 적으로 인한 희생의 내용도 고정시킬 필요가 없다.
유럽에서 한 때는 유대인과 흑인이 적이었다면, 지금은 이민자들과 이슬람과 다원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이 과거의 적을 대치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종북이나 친중이라는 말은 그렇게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 내는 효과적인 적들과 이미 강하게 결합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적을 생산해 낼 준비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위협과 적이 있어야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외부를 향한 적의다. 적의는 그들에게 존재 이유를 주고, 마음껏 미워하고 적대하고 때로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도 준다.
이들의 희생자 서사와 쇠퇴 서사는 기본적으로 화해와 평화를 향해 있지 않다. 한쪽의 권리주장은 필연적으로 다른 쪽의 권리 상실을 가져온다는 제로섬 게임과 승자독식의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다. 여성이나, 성소수자나, 이주자들의 권리주장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권리 상실을 가져온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만 보다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뺏는 자들로 간주할 수 있고, 친구와 적을 명확히 가르는 전투적 이분법을 세울 수 있다. 그리고 그 적을 절대 악으로 만들 수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한쪽에는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와 위기의 서사가, 다른 한쪽에는 희생자 서사와 국가와 민족과 문화의 쇠퇴 서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둘이 서로를 증폭시키는 가운데, 가정된 적이 절대 악이 되고, 적을 향한 혐오와 적의는 더욱 강력한 순교적 신념이 된다. 이렇게 해서 혐오와 적의가 존재와 생존의 확고한 원리가 되는 것이다. 파시스트 독재는 이렇게 혐오와 적의가 대중의 생존 욕구와 긴밀하게 결합해 있을 때 가능하게 된다. 대중이 자발적으로 내 뿜는 적의의 열정에서 파시즘적 독재는 힘을 얻는다.
나치 시대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는 친구와 적을 명확히 가르고, 적을 향한 적의와 혐오로 뭉친 통일된 국민을 형성하는 것을 정치라고 하였다.(3) 이는 다양한 집단들 사이의 대화와 합의의 과정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적 정치와는 전혀 다른 길이다. 파시스트들에게 다양성과 지속적인 대화라는 것은 적과 자신들의 정체성을 흐리게 할 뿐이다. 명확하게 적을 정하고, 그 적을 추방하거나 죽여도 되는 이유를 명확히 말해 줄 수 있는, 모든 민주적 법적 대화 과정으로부터 예외적인 위치에 서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독재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12.3 비상계엄을 선포하던 윤석열에게서 우리가 보았던 것은 그런 예외적이고 초법적인 독재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파시스트적 정치와 독재를 정당화하는 근거를 칼 슈미트는 신학으로부터 가져오고 있다.(4) 과거의 파시즘 정치 안에서도 신학은 이미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극우 정치가 사용하는 “애국”, “순국”, “결사” 등의 표현도 슈미트의 말대로 세속화된 신학적 개념들이다. 가상의 위협을 절대 악으로, 가상의 희생을 거룩한 희생으로, 혐오와 적의를 거룩한 분노로, 자신들의 광기 가득한 폭력을 거룩한 순교와 거룩한 전쟁으로 조작해 내고 있는 파시즘의 정치신학이 거기에 있다.
죽어야 할 때를 결정하겠다는 그 목사의 모습 속에서는 자살 테러를 미화하고 성스럽게 포장하던 극단적 근본주의자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가 하면, 칼 슈미트가 신학적으로 정당화했던 예외적인 위치에서 삶과 죽음을 결정하던 독재자의 모습도 보인다. 이렇게 신학적 매개를 통해서 개인들의 생존을 위한 욕망과 결합하는 극우 파시즘적 정치는 결코 쉽게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병증이 깊은 만큼 치유를 위해서도 보다 집요하고도 끈기 있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적의의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지혜와 실천을 모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듯이, 탄핵이 이루어지고, 대선을 통해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고 해도, 그 이후가 더욱 두렵고 걱정스럽다. 파시즘과 내전의 열정과 병증이 이미 깊이 스며들었다. 적의가 발하는 열정이 이미 모든 민주적 과정을 흔들어 대고 있고, 선거를 통해서 쉽게 해소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국제환경도 매우 부정적이다. 지금은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와 그들, 친구와 적을 나누는 분열의 정치가 노골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파시즘적 혐오와 적대감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민주주의는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안에도 차별과 배제가 있을 수 있고 분열과 갈등도 있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서로를 나누는 어떤 경계선들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해소된 이상적 민주주의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는 이미 완성된 해결책이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대화와 참여의 가능성을 확대하기 위한 지속적인 과정이고 노력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분열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우리 사회 내의 수많은 경계선들을 건널 수 없는 장벽으로는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신념이다. 민주주의는 갈등과 분열 조차도 민주적 과정을 더욱 심화화고 확대하고 개방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서로를 구별하는 경계선들을 장벽으로 만들고 갈등과 분열을 절대적 선과 악의 대결로 만드는 것은 민주주의의 포기다.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는 수많은 경계선들과 그 경계선 상에서 표출되는 갈등과 분열들을 견디면서, 새로운 관계와 질서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진정한 모습이다.
민주주의는 소화불량이 주는 속쓰림과 불편함을 견디면서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실현해 가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절대적인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대결을 전제하는 파시즘적 혐오와 적대의 정치는 민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고, 정죄하기 보다는 용서할 가능성을 찾으라고 하였다. 칼 슈미트는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때 그 원수는 정치적 적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하면서, 적을 향한 적의를 분명히 하는 것이 정치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예수의 이 말씀을 적을 향한 적의와 전쟁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화해와 평화를 향해서 살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뜻으로 읽는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 안에 있는 명백히 모순되는 두 단어 “원수”와 “사랑”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겪어야 할 속쓰림과 불편함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안정과 편리를 주었던 경계선과 울타리를 허물어야 하는 아픔이 거기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일방적인 희생의 과정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과 질서의 탄생을 위한 아픔이다. 새로운 관계와 연대와 사랑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모든 생명체가 가진 생존의 욕망과 의지를 진정으로 실현하는 길은 적에 대항하여 끊임없는 싸움을 지속하는데 있지 않다. 그것은 살려고 하면서 스스로를 죽이는 길이다. 자기 울타리를 넘어 그 밖의 세계와 화해하고 연대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정말로 살 수 있다. 예수가 추구했던 영원한 생명의 길은 바로 그런 길이 아닐까?
파시즘적 적의의 열정에 분명히 맞서는 행동과 실천이 지금 당장 매우 시급하게 필요하다. 혐오와 적의의 정치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는 일은 반드시 막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탄핵 이후를 생각하면, 우리의 깊은 성찰과 반성도 동시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중이 혐오와 적의의 열정이 아니라, 민주적 과정에 기대를 걸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정치를 해 왔는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의회 정치의 무대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민주적 연대의 가능성을 더욱 확대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위기와 생태적 위기가 중첩되고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위기가 방치되는 이 상황은 매우 위험하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과대 포장되고, 파시즘적 정치가 힘을 얻을 수 있는 위험한 가능성이다. 지금은 이러한 위기의 상황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사람들과 집단들이 구체적으로 지혜와 실천을 모아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를 가르고 있는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차별과 구별의 선들이 결코 장벽으로 굳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민주적 과정을 통해서 서로 보다 깊이 화해하고 연대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와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희망이 허구가 아니라 진정한 약속임을 실현해 보여주지 못한다면, 혐오와 적의의 정치는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미주 |
| (2) William W. Connolly, Aspirational Fascism: The Struggle for Multifaceted Democracy Under Trumpism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7); “The Evangelical-Capitalist Resonance Machine,” Political Theory 33(6)(2005.10), pp. 869-886. (2) Achille Mbembe, “The Society of Enmity”, Radical Philosophy, 200 (Nov/Dec, 2016), pp. 23-24. (3) Carl Schmitt, The Concept of the Political, expanded ed., trans. George Schwab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7 [1996]), 26. 29. (4) Carl Schmitt, Political Theology, trans. George Schwab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5), 3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