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길 공동대표는 서구에서부터 출현한 이성 중심주의적 근대가 생태계를 붕괴시키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유정길 공동대표는 서구에서부터 출현한 이성 중심주의적 근대가 생태계를 붕괴시키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토끼와 거북의 경쟁, 삶의 전투화

어린 시절 초등학교 입학에 무렵 배운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 이야기는 어린아이의 앞에 놓인 인생이 엄혹한 경쟁사회임을 각인시켜주는 교훈이었다. 물에서 더 빠른 거북이와 산에서 더 빠른 토끼의 생태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토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인 산(들?)에서 시작된 경쟁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 경쟁의 조건이 차별적이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더욱이 이 우화는 평상시라면 이길 수 없는 게임이지만 토끼가 실수로 잠을 자면서 거북이가 승리를 쟁취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백지의 어린아이들에게 이 우화는 ‘삶은 경쟁’이라는 엄혹한 교훈을 각인시킨다. 여기에 더해 ‘어떻게든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누군가의 실수와 실패는 나의 승리에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암암리에 주입한다.

이렇게 시작된 아이들의 교육 현장은 ‘협력과 배려’를 배우기보다 결국 ‘이기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 된다. 협동적 인성을 배우기보다 시험 잘 보는 괴물을 만들고 서울대를 보내기 위해 혈안이 된다. 어린 시절부터 영어유치원을 보내기 위해 7세 고시, 4세 고시에 몰입하게 만든다. 결국 위로 성공하는 위계 사회의 정점에 올라 모두에게 갑(甲)이 되는 삶을 추구한다. 친구들은 이겨야 할 경쟁의 적이 된다.

근대성의 핵심은 구분과 경쟁

신을 몰아낸 근대사회는 과학으로 대표되는 이성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조작할 수 있으며, 인간이 자연과 세계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물은 근본 입자와 요소로 쪼갤 수 있으며 세계는 그 요소들의 조립이라고 생각했다. 과학적 사고는 근본 입자에 천착하면서 분자, 원자, 소립자 등 근본을 찾는 분석에 집중한다. 분석(分析)이라는 말이 이미 ‘나눌 분(分)’에 ‘가를 석(析)’이 아니던가.

선과 악으로 세계를 분명하게 규정한 조로아스터교와 중세 기독교사상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강화했다. 더욱이 근대사회의 요소론과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사회에 반영하면서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는 인간 사회도 약육강식, 생존경쟁,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을 근본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상은 이후 식민지를 확대하고 자연을 지배 및 정복하게 하는 주요한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근대는 이분법적 분절을 기반으로 한 사유체계의 사회이다. ‘우리’와 ‘그들’, ‘내부’와 ‘외부’, 그리고 가장 극명하게는 ‘적’과 ‘아’를 구분하는 경계선을 그어 왔다. 이러한 구분은 단순한 인식론적 도구를 넘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질서를 구축하는 근본 원리로 작용해 왔다.

죽임의 사회에서 살림의 사회

근대성의 핵심에는 경쟁이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승리와 패배, 정복과 복종의 이항대립적 관계가 국가 관계에서부터 개인의 일상적 삶의 영역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다. 이러한 대립구조 속에서 ‘적’의 존재는 자신들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된다. ‘우리’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아(我)’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타(他)’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들’, ‘타인’은 바로 외부적 존재로서, 대립이 격화되면 쉽게 ‘적(敵)’으로 규정되었다. 특히 상대를 악마화할수록, 그들을 향한 적대감을 강화할수록, ‘우리’의 공동체적 결속을 다지는데 아주 유용했다. 이렇게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외부의 적은 내부의 단결을 위한 강력한 상징으로 활용되었다.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는 경쟁자의 패배가 성공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경쟁 구조는 사회 전반에 걸쳐 승자와 패자, 중심과 주변을 구분하는 위계질서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실제 사회는 승자보다 패자가 더 많다. 설령 한 게임에서 승리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 삶에 걸쳐 승리의 경험보다 패배의 경험이 많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이기고 지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결국 패배의 경험, 좌절과 상처의 경험들이 많아진다. 패배, 좌절은 심리적인 죽임이다. 이러한 심리적인 죽임이 누적되면 결국 물리적인 죽임으로 비화된다. 우울증 환자들, 돌연사, 과로사가 많아지고,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 자살률이 가장 높은 국가가 되었다. 구분을 통한 경쟁이 인간과 사회를 죽임의 문화로 만든 원인이 되는 것이다.

차이는 무시한채 목표 지향적 사회가 어떻게 붕괴되는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Getty Images
차이는 무시한채 목표 지향적 사회가 어떻게 붕괴되는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Getty Images

상관없는 세계에서 상관있는 세계로

인간끼리의 죽임은 곧 인간에 의한 자연의 죽임으로 확장된다. 기업 간의 경쟁, 국가 간의 경쟁을 위해 산과 강, 숲과 야생 자연을 남보다 먼저 개발하고 파헤쳐야 돈이 된다. 그린벨트나 개발 제한 등의 법적 제한을 남보다 먼저 해제시키고 선점해야 경쟁사회에서 이익을 볼 수 있다.

생산원가를 절감하고 이익을 얻기 위해 오염감소를 위한 시설이나 정화시설 등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몰래 불법적으로 방류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자연을 보존하고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우리와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지만, 오늘날의 모든 정치는 그저 4~5년 간의 임기만 책임지는 정치인에 의해 작동되며, 1년 간의 당기순이익만을 중시하는 경제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있다.

환경 및 기후 문제는 ‘단기적 관점’으로 편재된 전 시스템을 ‘장기적 관점’으로 재배치하라고 강제하는 메시지이다. 이러한 경쟁은 앞서 언급했듯이, 나누고 가르고 분절한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흔히 우리는 아마존의 밀림이 파괴되든 말든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네 이웃이 가난 속에 고통받든 말든 ‘나는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상관없다’는 말은 ‘서로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상관없는 세계라는 패러다임이 바로 경쟁과 대립, 전투를 가능하게 한다.

불교에서는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다’고 가르친다. 이른바 연기법이며,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환경 및 기후 위기 속에서 인류가 깨달은 것은 ‘모두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서로 상관있다’는 사실이다. 아마존의 밀림이 파괴되면 곧 인간의 삶도 파괴된다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고 관계맺고 있는 사회에서 타인의 행복은 나의 행복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흑백의 세계는 없다, 컬러가 현실이다

흑백논리는 사회를 무채색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누구나 자신을 돌아보면 100% 천사 같은 선성만 있지 않다. 또한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 해도 그에게 100%의 악마성만 있지 않다. 선한 마음이 70%라면 사악한 마음도 20~30%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은 흑과 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짙고 옅은 강도 차이 정도만 있는 회색 뿐일까.

많은 사람들이 중도를 말하면서 0과 100 사이의 가운데인 50 정도를 적절한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세상은 흑백이 아니라 컬러이다. 컬러는 다양성의 사회이다. 또한 사람은 일관될 수 없다. 마음 안에 선악이 교차한다. 다중적이다. 그래서 세계는 수많은 다양한 꽃들이 어우러진 화엄의 세계이다.

사람들은 나중에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후회하면서도, 행동하는 그 순간만은 자신이 가장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한다. 폭력과 살인을 하는 사람조차도 그런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타인에게는 물론 자신도 고통을 받는 어리석음의 과보를 받는다.

적은 없다. 악마는 없다. 개인이나 집단의 이념과 관념이 바뀌면 적도, 악마도 바뀐다. 적이나 악마는 사람이 만든 허상이다. 주관적 뇌피셜이다. 모든 사람은 그저 어리석을 뿐이다. 따라서 적이나 악마로 규정하지 않는 것, 승리와 패배, 이기고 지는 대상으로 상대를 바라보지 않는 것, 상대를 이겼다면서 환호하지 않고, 패배했다고 좌절하지 않는 것, 위로 성공하지 않고 옆으로 성공하는 것, 나아가 성공이나 실패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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