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광섭 교수는 적을 사유하기 이전에 생명에 대한 사유를 촉구했다.
심광섭 교수는 적을 사유하기 이전에 생명에 대한 사유를 촉구했다.

종교평화학회를 주관하는 이찬수 교수로부터 ‘적의 계보학’과 관련하여 글을 부탁받았다. 적과 친구는 생각하기 나름으로 결정되는 것이 절대 아님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만, 종교평화학 공부 모임에 참여한 이후, 평화학과 폭력 및 적과 원수에 대한 논의들이 전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부탁을 망설이다가 주제를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다는 유연성을 얻고 수락했다. 흙탕물에서 맑은 물을 얻으려면 흙탕물의 불순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밖에서 맑은 샘물을 흙탕물로 흘려보내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살았다. 그러나 흙탕물 안에서 계속 휘젓는 운동이 멈추지 않는 한 모두 소용없는 일이다.

구약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이 천지를 하나하나 창조하셨다는 이야기, 인간을 만드신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다가 아담과 이브가 신의 말씀을 거역하고 곧바로 형 가인이 아우 아벨을 살해하는 이야기로 이어지는 성경은 동양 경전과 비교하여 정말 이상도 했다. 유학 경전인 논어는 학습의 즐거움과 멀리서 온 친구 만남의 기쁨으로 시작하고, 불경은 인간의 집착과 탐욕의 상들을 버리고 본래 부처라는 깨달음에 이르라는 가르침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다음으로 겪은 어려움은 족보가 종종 아주 길게 실려 있다는 것이다. 계보에 학을 부쳐 논의하는 계보학 담론이 생겼지만, 계보보다 족보가 더 살갑게 다가온다. 집안마다 대동세보라는 여러 권으로 된 족보가 대개 있으리라 생각한다. 심씨(沈氏)의 시조부터 700여 년을 지나 나에 이르는 족보가 거대한 나무와 줄기와 가지에 가지를 쳐서 나에게까지 이르는 과정을 정리해서 만든 이들의 재주가 참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족보는 씨족 사회의 흔적인바, 성서도 과연 한갓 씨족 혹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견지하기 위한 책이란 말인가? 깊은 의문이 들었다.

시인 최영미의 첫 시집 『서른, 찬치는 끝났다』의 시중에 두 편이 눈에 띈다. 「어떤 족보」와 「새들은 아직도⋯⋯」는 서로 상반된 느낌을 준다. 「어떤 족보」에서는 낳고, 낳고, 낳고 또 낳고, 그런데 그것이 그녀에겐 허무한 감정을 준다. 왜 허무하다고 했을까? 허무한 감정, 그 감정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 더욱 쓸쓸하고 씁쓸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을 야곱을/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고/베레스는 헤스론을 헤스론은 람을/람은 아미나답을 낳고/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허무하다 그치 ?)/어릴 적, 끝없이, 계속되는 동사의 수를 세다 잠든 적이 있다”_<어떤 족보> 전문

「새들은 아직도⋯⋯」에서는 짓고, 짓고, 또 짓고가 반복된다. “아스팔트 사이 사이/겨울나무 헐벗은 가지 위에/휘영청 쏟아질 듯 집을 짓는구나/.../무어 더 볼게 있다고/무어 더 바랄 게 있다고/사람 사는 이 세상 떠나지 않고/아직도/정말 아직도 집을 짓는구나/.../자꾸만 커지는구나/갈수록 둥그래지는구나/봄바람 싸한 냄새만 맡아도/우르르 알을 까겠지/.../내 가슴에 부끄러움을 박으며/새들은 오늘도 집을 짓는구나”_<새들은 아직도> 중에서

최 시인은 황량한 도시에서 새들이 오늘도 집을 짓는 삶을 보고서 내 가슴에 부끄러움을 박는다고 쓴다. 도시 한 복판에서 알을 까 새끼를 키우기 위한 새들의 생명력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인간의 ‘낳고, 낳고, 또 낳고’에서는 허무함을 말하더니 새들의 ‘짓고, 짓고’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감정의 모순을 드러낸다. 한스 요나스는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들은 자식을 낳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낳자마자 곧 독가스의 희생제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잔혹한 야만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새끼를 낳는 일, 얼마나 거룩한 생명의 행위인가! 집을 짓는 일은 새끼 까기 위한 짓인데...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적을 해체하는 첫 걸음이 아닐까. ⓒGetty Images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적을 해체하는 첫 걸음이 아닐까. ⓒGetty Images

신구약 성경(창세기, 레위기 등)에 이따금 족보가 길게 실린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예수 탄생에 이르는 계보는 아주 길다. 핵가족화된 현대 아파트의 홀 세대, 혹은 두 세대에게 주는 족보의 의미가 무엇일까. 사회의 수평적 관계만이 중시된다면 결국 세대는 전통과의 단절되며 세대들 사이의 관계도 단절될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도 단절된 지 오래되었다. 한 가정에 홀로 살거나 부모와 자녀 단지 두 세대만이 함께 살 경우, 인류의 기억은 점점 사라지며 하루살이와 같은 순간의 인간들만이 남게 될 것이다. 

린 마굴리스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생명은 다음 세대, 다음 종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확장이다. … 생명은 세포나 생물체보다 더 큰 무엇이다.”라고 말한다. 세포나 생물체보다 ‘더 큰 무엇’인 生命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수천 년, 수만 년 지속된 반복적 행위인 ‘낳음과 지음’, 이 동사에 축적된 두께의 비밀은 무엇일까? 여기에 더 큰 무엇이 숨어 있을 것만 같다. 성경은 더 큰 초역사적인 무엇을 ‘성령’(생명의 숨)으로 설명한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 1:18)

그래서 마태복음을 펴자마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아브라함의 자손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유대 역사적 맥락에서 그리스도임의 유일회성을 찾기보다는 반복되는 ‘낳고 낳음’의 연속성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메시아임을 반드시 족보를 들어 해명해야 할까?”라는 물음이 생길 수 있다. 새로운 해명이 필요하다. 족보에 등장하는 40명의 사람 이름뿐만 아니라 “낳고”(ἐγέννησεν)라는 동사가 “부모-자식”의 연결을 위해 39회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말하자면 생명의 행위인 ‘낳음’이 반복되고 지속되며, 마침내 생명의 지속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 순간의 생명사건”(기타로 니시다)을, “지금시간(Jetztzeit)으로 충만된 시간”(발터 벤야민)을, 초역사적인 생명인 ‘뜻밖의 사건’(serendipity)의 출현을 위해 필요로 한 것이다. 마태 사가는 1장 16절의 중요한 지점에 이르러 요셉과 예수의 관계에서 “낳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마리아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를 태어나게 한” 장본인으로 기록한다. ‘성령잉태로 인한 낳음’은 “한순간의 생명사건”이며 세런디피티(serendipity)의 출현인 것이다.

베드로에게 적의 귀를 베지 말고, 제자들을 향하여서는 원수까지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남긴 예수를 평화 구현의 왕, 구세주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같은 생물학적이고 역사적인 ‘낳음’의 역사적 지속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수평적인 지속만이 아니라 초역사적이고 수직적인 ‘한 순간의 생명사건’이 생명에 숨어 있는 큰 무엇의 드러남이 생명의 계보학에서 결정적이다. ’낳다‘(γεννάω)는 생명의 다차원적 활동이고 ’기원‘(γενέσις)은 생명에 통일성을 주는 성령(생명의 숨)을 의미한다. 메시아적 예수 생명의 기원은 성령이다. 예수의 기원은 아브라함이나 다윗의 이름이 아니라 성령의 창조적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진 신적 기원, 즉 ’신령한 기운‘(神氣)에 있음을 마태 사가는 말하려는 것이다.

아득하게 잊혀져가는 인류 생명의 잠자는 풍부한 경험을 깨우고 소환하여 현재화하며 창신(創新)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죽임을 몰아내는 메시아적 생명사름과 강고하게 응축된 것처럼 보이는 적의 계보학에 틈을 내는 원수 살림의 길, 여기에 통시적 족보의 현재성(Jetztzeit)인 “낳음” 의미가 있다고 본다. 발터 벤야민의 말이다. “토라와 기도는 그 미래를 회상 속에서 가르친다. 유대인들에게 미래는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미래 속의 매초는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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