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이 도심에 세워질 수 있을까? 아마 안 될 것이다. 이는 곧 도시를 위해 다른 지역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Wikipedia
원전이 도심에 세워질 수 있을까? 아마 안 될 것이다. 이는 곧 도시를 위해 다른 지역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Wikipedia

소수를 희생시켜 다수가 산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 이론’으로 문명의 폭력성을 고발한 탁월한 인류학자이다. 그는 ‘도시의 전체성(totality of the city)’ 개념으로 도시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과정에 숨겨진 폭력성도 밝혀낸다. 도시는 욕망들의 집합체이다. 서로의 욕망을 모방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과정에 욕망들이 충돌하며 질서가 혼란스러워진다. 그럴 때 무질서의 원인을 만만한 약자에게 전가해 약자를 희생시킴으로써 전체의 질서를 회복한다. 이것이 희생양 이론이다. 인류가 도시라는 문명을 건설해 온 시스템이기도 하다.

나는 이 당연한 논리를 여러 해 전 서울 ‘외곽’에 살면서 처음 실감했다. 이 글은 내가 경기도 광주에 살 때 이야기이다.

아주 사적이고 공적인 이야기

나는 1999년 초 서울을 떠나 경기 광주 퇴촌면으로 이사했다. 경안천과 팔당호가 만나고 관산, 해협산, 무갑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동네다. 1998년 가족과 함께 천진암 가는 길에 팔당호를 가로지르는 다리(광동교)를 지나면서 작은 감탄이 저절로 나왔었다. ‘서울 가까이에 이렇게 아름다운 동네가 있다니...’ 이것이 광주시(당시 광주군) 퇴촌면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얼마 후 아무 연고도 없었던 퇴촌으로 거의 무작정 이사했다.

좋아서 옮겼지만, 한동안은 이른바 ‘시골’의 실상이 잘 보이지 않았다. 멋진 풍광과 깨끗한 공기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무언가 나의 착각과 차별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는 ‘대한민국은 서울공화국’이라는 것이었다.

서울 살 때는 조간신문은 으레 새벽에 배달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서울까지 직선거리로 10km도 안 되는 곳이었지만, 조간신문조차도 한낮이나 되어, 그것도 우체부가 배달해 주었다. 신문은 종류를 가릴 것 없이 한 지국에서 다 담당했다. 집 근처에서 운전 중에 종로와 강남 어디가 막힌다는 교통방송 뉴스를 들으면 거기와 여기가 무슨 상관인가 싶었고, 전파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는 서울 중심적 사유가 당연한 양 큰 의식이 없었다. 나의 더 큰 착각은 내가 매료되었던 팔당호의 모순에서 왔다.

물을 옆에 두고 목이 마르다

서울 살 때는 팔당호도 으레 서울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가졌었다. 팔당호 주변에 집을 지으려 개발하는 장면은 종종 고발뉴스로 등장했고, 나도 그런 뉴스를 들으면 ‘상수원 보호구역에서 저게 무슨 짓이냐’며 내심 비판했었다. 서울이 서울 밖의 희생 위에 유지되고 있는 도시라는 사실을 그때는 잘 몰랐다. 2003년경 퇴촌의 어느 식당에서인가 몇 사람이 흥분하며 했던 이야기들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팔당호에 독극물이라도 풀어야 알려나.”

자기 땅인데 집도 짓지 못하게 하고 수억 톤이나 되는 물 주변에 사는 데도 그 물 한 모금조차 먹지 못하게 하는 실상, 남을 위해 자기 재산권이 제한받고 있는 이의 울분이었다. 그 호수가 누구의 희생으로 그렇게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를 서울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서울 살 때라면 ‘저런 망발이 있을까’ 하며 나도 분노했겠지만, 퇴촌 살면서 그 분노의 원인과 구조가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수억 톤이나 되는 물을 옆에 두고 정작 물가에 사는 이들이 그 물을 먹기는커녕 접근도 어렵다는 사실에서 모순을 강하게 느꼈다.

2003년 봄, 집으로 배달된 한겨레신문을 읽다가 한 기사에 눈이 확 꽂혔다. 아직도 생생하게 생각나는 제목, “팔당호 주민 30년 만에 팔당호 물 먹는다.” 지금까지 20년 이상 뇌리에 박혀있는 문장이다.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니 한겨레 기사는 안 보이고, 같은 내용의 ‘경향신문 기사’가 있었다.

폭력으로 건설된 아름다움

팔당댐은 1966년 착공해서 1974년 완공된, 2억 4천만 톤의 물을 보관할 수 있는 댐이다. 서울시 용수 공급을 위한 다목적 댐이다. 팔당호 위쪽은 ‘수도권 상수원 보호구역’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모든 개발이 제한되었다. 팔당호와 가장 넓게 인접해 있는 광주시 전체가 개발 제한으로 묶여있었다. 팔당호를 건설하면서 광주시(당시 광주군), 특히 퇴촌면과 남종면 여러 마을이 수몰되었다. 팔당호가 건설되기 전 그곳에 내내 터 잡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천지가 뒤집히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평생 살던 집과 마을이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는 아주 슬픈...

호수 주변에 땅이나 집을 가지고도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 수억 톤의 물은 오로지 서울 사람을 위한(나중에는 인천과 수원 등 서울 주변 큰 도시를 위한) 것이었다. 팔당호에 가까운 주변에는 건물을 새로 지을 수도 없었고, 기존 건물은 수리나 개축 정도만 허락했다.

풍부한 물 옆에 살면서도 한결같이 지하수를 먹고 있었다. 팔당호의 물은 그냥 관상용이었다. 퇴촌 사람들이 그 물을 먹게 된 것은 2003년 이후였다. 그러니까 팔당호수가 완공되고 30년쯤 지나서였다. 위의 신문 기사는 그 상황을 담은 짧게 담고 있다. 

그 뒤 오염총량제라는 명분으로 광주시의 다른 지역은 개발의 가능성이 켜졌지만, 퇴촌면과 남종면은 여전히 수도권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각종 개발이 제한된다. 서울을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서울 밖을 희생시키는 논리는 계속 진행 중인 것이다.

서울을 보호하는 데 왜 서울 밖의 지역을 볼모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그 희생을 같이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그 희생의 대가를 충분히 보상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오래전 이야기이다. 그 덕에 퇴촌이 비교적 차분하고 깨끗한 지역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겠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부 그렇게 된 것과, 애당초 모두를 살리려는 계획적 정책으로 깨끗하게 조성한 것과는 너무 다르다.(광주에서 25년을 살다 작년에 양평으로 이사했는데, 이런 모순은 양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강변 핵발전소는 왜 안 될까

다른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김문수 대선 후보가 핵발전소는 관리만 잘 하면 가장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원이라며 핵발전소를 지지하고 있다. 핵발전소가 정말 안전하면 전기가 가장 많이 필요한 곳에 지어 잘 관리하면 되지 않을까. 원자로에서 나오는 증기의 냉각을 위해 물이 많이 필요하다면 한강변에 지으면 되지 않을까. 왜 핵발전소는 사람이 가장 적은 곳에 지으려 할까.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아닌가.

만일 사고가 나면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그러니까 소수만 희생시키면 된다는 의도의 반영 아닌가. 원자로 냉각수가 ‘오염수’가 아니라 ‘처리수’라면, 그냥 강에 흘려보내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수의 욕망을 정당화시키고 도시의 문명은 확대되어 간다. 그리고 ‘수도권 상수원 보호구역’ 사람들, 수도권 멀리에 있는 바닷가 작은 시골 동네는 계속 희생되어 간다.

소수자를 희생시켜 다수의 질서를 유지해 온 것이 인류 폭력의 역사이다. ‘희생양 논리’가 그것을 말해준다. ‘도시의 전체성’이 그것을 대변한다. 희생양의 논리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인간들의 여전한 현실이다. 그렇게 희생자는 만들어지고, 그 목소리는 묻히며, 도시의 욕망들은 정당화된다. 도시의 소리 없는 아우성은 문명의 동력으로 찬양되고, 소수 희생자의 적대감은 땅속 깊은 곳에 묻어두려 한다. 그렇게 내부의 소외와 차별은 노골적으로 이어지고, 다수에 대한 소수 희생자의 적대감은 땅 밑에서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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