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의 계절이 돌아온 것 같다. ‘정치 보복’이라는 어구가 한국 언론 매체에 자주 보이는 까닭이다. 그것이 정말 복수이고 보복인지는 국민이 판단하고 또 시간이 지나면 분명해지겠지만, ‘적의 계보학’ 차원에서 이 말들을 헤아려보기로 하자.

2. 복수나 보복을 뜻하는 단어 하나가 전 세계 언론에 퍼졌던 적이 있다. 미국 뉴욕에 있는 국제무역센터가 비행기로 피격되어 무너졌던 이른바 ‘9.11사건’ 때, 미국을 비롯한 세계 언론에 떠돌던 핵심적인 단어가 바로 retaliation이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사실 ‘이러한’, ‘이와 같은’을 의미하거나 같은 형태나 모양을 가리키는 라틴어 지시형용사 talis에서 유래한 말이고, 더 직접적으로는 탈리온법(lex talionis)이라는 라틴어 형법(刑法)의 명칭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명칭의 유래를 짐작하게 하는 법규가 로마의 십이판법에 나오기 때문이다.

십이판법의 제팔판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나온다: “만일 그가 팔다리를 꺾었는데, 그와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너는 ‘그렇게/그와 같이’ 하라”(Si membrum rupsit, ni cum eo pacit, talio esto). 여기서 ‘그렇게’ 또는 ‘그와 같이’는 팔다리를 꺾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법은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입은 것과 똑같은 형태로 형을 가하라는 형법상의 상해규정인 것이다. 그런데 ‘같다’는 뜻이 어느 사이엔가 복수나 보복의 의미로 인식되어 사용되기 시작해서 법의 이름도 ‘복수법’(law of retaliation)이라고 번역되어 왔다.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라는 법의 취지가 복수/보복으로 뒤바뀐 셈이다.

3. 성경 연구자로서 필자가 여기서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하려는 것은 성경에 수록된 법에 대해서도 별다른 성찰 없이 바로 그 명칭을 그대로 적용해 왔다는 점이다. 성경의 법이란 다름 아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이 어구는 오늘날 복수와 보복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정말 복수하라고 가르쳤던 것일까.

성경의 이 어구는 일종의 ‘법규’이니 다른 고대 법전에도 수록되어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고대법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성경에만 있는 것이고, 그것도 네 차례나 나타난다(출 21.24; 레 24.20; 신 19.21; 마 5.38). 이 성경 본문에 나오는 같은 어구들을 ‘복수법’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면, 성경이 복수하라고 가르친다는 뜻으로 헤아리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러나 하느님의 선민이라던 유대인들조차 그 어구들을 복수의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렇지 않다고 본뜻을 해석해서 바로잡아 주셨던 것이 아닌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에 맞서지 말아라’”(마 5.38,39, 개인역). 그것이 이천 년 전의 일인데도 여전히 ‘복수법’으로 여기고 있다면 이 무슨 해괴한 일일까?

4.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다, 악에 맞서지 말라!” 이 가르침에 대한 탁월한 해석으로 톨스토이의 것을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용하면 이러하다. “악에 맞서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을 때 생겨났을 것인데, 갈등이란 다투는 상대를 악하다고 여기면서 저마다 힘으로 저항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이전에 사람들은 서로 악하다고 여기는 상대를 힘으로 저항하는 것을 해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것이 다툼의 한 방법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전혀 힘으로 저항하지 않는 다른 방법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The Kingdom of God).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너희는 악으로 ​​악을 파괴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불합리하다. 악이 없도록 하려면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가 사회생활 속에서 바로잡아야 할 악한 모든 것들을 열거한 후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다르게 행동하라고 권고하신다”(What I Believe). 서로 맞서는 갈등 상황에 대한 해결책은 맞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서로 맞서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한 것은 톨스토이의 탁월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이러한 해석을 기반으로 평화사상과 평화운동을 전개했고, 그것은 간디에게 전파되어 19~20세기 평화운동의 한 기틀이 되었다.

Abraham de Blois, 「Man Who Blasphemes God’s Name Is Stoned」 ⓒRijksmuseum.nl
Abraham de Blois, 「Man Who Blasphemes God’s Name Is Stoned」 ⓒRijksmuseum.nl

5. 그러나 똑같은 성경 말씀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살육의 현장에 ‘자랑스럽게’ 적용할 뿐만 아니라 복수의 대명사가 되게 한 장본인은 따로 있다. 우리는 그를 오늘의 가자 문제를 촉발시킨 원조쯤으로 여겨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그를 모세 다얀으로 헤아려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이차대전 이후인 1948년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국경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수천 년 살고 있던 사람들을 밀어내고 사람들이 몰려와 땅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웠으니 분쟁은 당연할 것이다. 특히 가자 지역에 살고 있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마찰이 빚어졌다. 그런 시기에 이스라엘에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모세 다얀이다.

그는 군인으로 하급장교였다. 그는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국경분쟁이 심했던 가자 인근의 부대를 맡았을 때 그는 새로운 싸움 방식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바로 보복전투였다. 당하면 당한 대로 똑같이 응해준다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는 그의 방식이 ‘효과적’이었다고 스스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군사령관이 되고 또 국방장관이 될 때까지 그러한 방식으로 싸움을 계속했다.

모세 다얀은 세계적으로 점점 더 유명해지고 또 그의 전쟁방식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전쟁방식에 ‘눈에는 눈’이라는 성경 말씀을 적용하려고 했다. 여기서 보복전쟁이라는 말과 함께 ‘눈에는 눈’이라는 성경의 어구가 복수의 뜻으로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된 사정을 헤아릴 만하다.

6. 똑같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한 사람은 박해를 감수하며 생명을 살리자는 평화운동을 전개했고, 다른 사람은 수많은 피를 흘린 대가로 전쟁영웅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7. 이제 ‘적의 계보학’이라는 관점에서 내용을 마무리해 보자.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또 ‘팔다리가 부러졌으면 팔다리로’라는 형법이 정말 복수하고 보복하라고 규정된 법인가? 오히려 ‘남에게 피해를 입히면 너도 똑같이 피해를 입는다’는 경계의 뜻으로 제정된 것이 아닌가? ‘말라’에 강조점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는가?

여기서 필자는 먼저 이 법의 이름부터 바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본다. 개념이 바로잡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법을 여전히 ‘복수법’(law of retaliation)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학술적으로는 대개 ‘탈리온법’(lex talionis)이라고 바꾸어 지칭하고 있다. 우리말로는 똑같은 모양으로 형을 가한다는 의미에서 ‘동태가형’(同態加刑)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다음으로 이 법의 정신을 인간존중, 생명중시로 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더 이상 이 어구들을 폭력적 수단의 보복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증오와 적대를 ‘미워하지 않음’으로 전환하는 한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법은 분노하지 않고, 재판관은 복수하지 않는다”(non Lex irascitur, nec Judex vindi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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