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었던 말은 “평화는 경계를 넘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우리에게 있는 경계의 상대방, 즉, 적은 누구인가? 불교의 탐진치에서 진, 즉 분노의 감정은 탐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원하지만 얻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분노하게 된다. 관계하고 싶지만 관계할 수 없을 때도 그러하다. 라투르가 더블 클릭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관계를 시도하기도 전에 혹은 소심하게 시도했다가 관계할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즉 인류에게 주어진 적, 즉 경계의 상대방으로 제시할 수 있는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플라스틱 아닐까?
“지금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보다 플라스틱을 더 자주 만진다. 플라스틱은 어디에나 있다. 공기에도, 물에도, 대지에도. 플라스틱은 세계화의 도구이며, 무제한적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이다. 플라스틱은 이익을 위해 비용을 시민들과 환경에 전가하는 시스템”이라고 하인리히 뵐 재단의 <플라스틱 아틀라스>는 시작한다.
이러한 플라스틱은 내 몸 안에도 있으며 도처에 있다는 사실은 매우 끔찍한 감정을 야기한다.
이러한 플라스틱의 끔찍함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바로 우리가 플라스틱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비록 감추고 싶지만 괴물같이 스물스물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플라스틱은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지속이 플라스틱을 괴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낸 이러한 지속은, 지속에 대한 욕망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지속에 대한 욕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혹은 죽음에 대한 거부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왜 이렇게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일까? 오히려, 요한복음 12장 2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한다고 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과연 자기 목숨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미워할 수 있을까?
“죽을 자들은 땅을 구원하는 한에서 거주한다... 땅을 구원함은 땅을 지배하지 않고 또한 땅을 복종케 만들지도 않는다... 죽을 자들은 하늘을 하늘로서 받아들이는 한에서 거주한다. 죽을 자들은 태양과 달에게는 그것들의 운행 과정을 별들에게는 그것들의 궤도를, 또한 사계절에게는 그것들의 축복과 매정함을 일임하며, 그리고 밤을 낮으로 만들거나 낮을 고달픈 부산함으로 만들지 않는다.”고 하이데거는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에서 말하고 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것은 죽을 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하지만 죽을 자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망각하고 거부하고자 하는 탐욕이 바로 플라스틱에 대해 우리가 가지게 되는 끔찍함의 근원이다. 플라스틱의 끔찍함은 우리의 끔찍함이다. 우리 자신이 플라스틱의 끔찍함을 만들어낸 것이다. 마치 스메르자코프와 같은 사생아인 것이다. 알료샤에게는 망나니와 같은 드미트리나 냉혈한 지식인 같은 이반 뿐 아니라 끔찍한 괴물같은 스메르자코프와 같은 형제도 있는 것이다. 다만 드미트리나 이반은 드러난 형제인 반면에 스메르자코프는 감춰진 형제인 것이다.
플라니도 <거대한 전환>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새로운 희망의 샘이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쌓아올리는 법을 배웠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은 언제가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 하지만 죽음보다 더 끔찍한 상태가 존재한다는 진리 앞에서 스스로를 체념했고, 그러한 진리를 자신의 자유의 기초로 삼은 것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인간이 그러한 스스로의 과제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권력이나 계획과 같은 것들을 도구로 삼아 자유를 건설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인간의 원수로 변하여 자유를 파괴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플라스틱이 인간의 원수로 변하여 자유를 파괴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플락스틱이 인간의 원수로 변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인간의 탐욕의 산물인 플라스틱과 함께, 새로운 자유를 창조해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플라스틱은 끔찍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과 함께하는 존재이다. 즉, 플라스틱은 인간의 지구 속의 물질과의 관계성을 대표한다. 지질학계에서 인류세를 논의할 때, 인간의 활동이 지구의 지층에 보편적으로 검출되어야 하는데, 이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물질이 방사능 잔재와 플라스틱이다. 인간의 활동을 지구에 물질적 지층으로 과학적으로 규정하는데 바로 플라스틱이 사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과 플라스틱의 애증의 관계는 많은 예술의 소재가 되었다. 예술이란 공존의 세계관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그 뒤의 많은 비판이 언급하고 있듯이 투쟁과 대립의 세계관이다(물론 이렇게 퉁치기 힘든 측면도 내재해 있다). 이에 비해 화이트헤드의 미학적 세계관은 대조contrast 혹은 차이difference를 바탕으로 강도intensity를 통해 창조성creativity으로 가는 새로운 공존의 길이다.
사실 플라스틱에 대한 이와 같은 느낌은 인간의 비인간에 대한 관념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비인간 자연에 대한 개념은 일반적으로 3단계의 발전이 있는데, 첫 번째는 공해, 두 번째는 환경, 세 번째는 생태이다. 공해와 환경은 모두 주체와 구별되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다. 다만 공해는 그 대상의 범위가 한정되는 반면, 환경은 그 대상의 범위가 확장적이다. 이에 비해 생태는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없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창조의 작업 하나하나는 우주 전체를 활용하는 사회적 노력이다. 새로운 현실태는 저마다 새로운 조건을 추가하는 새로운 일원partner이다. 새로운 조건은 모두 추가된 달성의 풍요함 속으로 흡수된다. 이에 반해 각 조건은 배타적이며,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예외가 되는 것은, 그것이 배제하는 것들을 대비로 전환시키는 조건들의 그물web 속에 그것이 들어가 있게 되는 경우이다... 일련의 사실은 마치 보초barrier reef와 같은 것이다. 그 한쪽에는 난파의 잔해가 있지만, 그 건너편에는 피난처와 안전이 있다. 사물의 결정성을 지배하는 범주들은 어째서 악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되며, 또 세계의 전진에 있어 특정의 악한 사실들이 어째서 최종적으로는 극복되는가에 대한 이유가 된다.”
이처럼 플라스틱은 인간의 지속에 대한 탐욕의 감추어진 측면이고, 이를 바라볼 때 경계를 넘는 평화가 일어나, 창조의 작업에 함께하는 새로운 일원이 된다. 플라스틱은 나이자 너이다. 나와 너 안의 탐욕을 볼 때 창조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요한 갈퉁에 의하면 평화는 갈등의 창조적 변형이다. 평화는 경계를 넘어서는 창조성이다. 인류세의 징표인 플라스틱은 인간에게 경계를 넘어서는 계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