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사오카 미사유키 선생은 적은 실체가 없는 사회적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 니사오카 미사유키 선생은 적은 실체가 없는 사회적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적’은 실제로 존재하는 타자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축된 개념적 환상이라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편견’을 해체해 보겠다. 사회적으로 구축된 개념적 환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편견이기 때문이다.

편견으로 인해 차별이라는 폭력이 발생하고, 차별받는 쪽에는 신체적 또는 정신적 고통이 초래된다. 특히 언론이 만들어 낸 스티그마(stigma: 낙인)의 표적이 된 집단에 속한 사람이 차별을 겪는다. 예를 들어 정치적 적대세력에 대한 ‘빨갱이’, ‘공산주의자’라든가 신종교에 대한 ‘컬트’(cult), ‘사이비종교’라는 라벨이 만들어낸 스티그마가 그것이다.

또한, 언론은 특정집단 자체의 이미지를 악화시키기도 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무슬림에 대한 이미지 조성이다. Pew Research Center가 2013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11개국에서 67%라는 중앙값으로 “이슬람 과격주의를 어느 정도 또는 매우 우려한다.”고 대답했다.

무슬림의 평화로운 태도는 뉴스 가치가 낮아 보도되는 일은 많지 않다. 드물게 테러가 발생하면 대대적으로 보도되는데, 그것이 특정 테러조직의 소행이며 그 조직이 이슬람 어느 파 흐름에 속해 있다는 식으로 전해진다. 이런 보도만 접한 일반인이 이슬람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을 경우 ‘무슬림 = 테러집단’이라는 단순화된 이미지만 남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흔히 보도를 접하는 우리에게 미디어 리터러시가 필요하며 또한 반대로, 보도하는 측의 윤리가 중요하다는 식의 처방이 제시되곤 한다. 물론 이러한 대책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편견의 뿌리인 우리의 내면이 전환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미지(未知)의 타인에게 어느 정도 두려움을 느낀다. 예컨대 도시에서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 약간의 긴장감이 생긴다. 엘리베이터 안의 일시적 긴장은 금세 사라지지만,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공포심은 오래 지속된다.

낯선 집단에 대한 공포가 언론의 ‘테러집단’, ‘공산주의자’, ‘컬트’와 같은 라벨을 만나면 공포는 증오와 혐오로 바뀌기도 한다. 어떤 정치 지도자는 이 시스템을 활용해 지지기반을 넓힌다. 그러나 국내 다수파는 표적이 되지 않는다. 다수를 공격하면 정치생명을 잃기 때문이다.

국내 소수집단은 정치적 표적으로 삼기 쉽다. 예를 들면, 국내 거주 외국인이나 소수민족, 종교적 소수자 등이다. 나치가 유대인을 겨냥한 것이 전형적 예다. 국외에 적을 만드는 방법도 자주 쓰인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02년 1월 29일 국정연설에서 북한·이란·이라크를 ‘악의 축’이라 부른 발언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국내 소집단이나 국외 적대세력을 공격하는 것은 언론과 정치 지도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시청률과 조회 수가 오르고, 정치 지도자는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다. 대다수 국민은 그 영향을 받아 사회적 편견을 내면화한다.

이 구조에 맞서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그러한 라벨링에 속지 않도록 사실(fact)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나라를 방문하거나 그 집단에 속한 사람과 대화해 보면 언론과 정치 지도자의 라벨링이 편견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지 방문이나 직접 대화의 기회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그 집단의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감정과 가족 관계가 있음을 떠올려 보자. 그들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며 딸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누군가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편견의 라벨을 넘어 그들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1759)에 따르면, 인간은 상상력을 통해 타인의 처지에 자신을 두고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느낄까”를 떠올리면서 공감을 형성해야 된다고 한다.

▲ 이른바 뉴스와 소셜 미디어에 의한 낙인 효과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Getty Images
▲ 이른바 뉴스와 소셜 미디어에 의한 낙인 효과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Getty Images

이 해결책의 보편적 타당성은 동서 종교전통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의 혁신적 가르침 가운데 하나인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44)는 상상력을 통한 편견 제거의 극적 사례를 제시한다. 이는 상상력을 통해 적 안에서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는 공통의 인간성을 발견하라는 요구다.

공자의 핵심 교훈인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논어』, 위령공편 제15편 23장)도 상상력을 통한 타자 이해의 구체적 실천을 보여준다. 이 가르침들은 모두 상상력을 통해 ‘적’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해체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공자의 ‘서(恕)’에 기반한 공감적 상상력은 표면적 대립을 넘어 공통의 인간성을 인식하게 한다.

이 지혜를 평화학의 창시자인 요한 갈퉁의 구조적 폭력론과 결합하면 사회변혁의 구체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갈퉁은 폭력을 ‘외부의 영향으로 사람의 신체적·정신적 실현 가능성이 잠재능력보다 저해된 상태’로 정의한다. 폭력은 단순히 물리적·정신적 해악을 넘어, 사람이 본래 지닌 잠재력을 온전히 펼치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모든 제약을 포괄한다.

이 폭력을 인식하려면 타인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공통의 인간성에 대한 상상력은 편견의 근원을 차단한다. 또한, 갈퉁이 강조하는 적극적 평화(구조적 폭력의 부재)를 실현하려면, 현재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을 상상력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 사람이 나의 ‘아들·딸’이라면, 나의 ‘아버지·어머니’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은 적대관계에 있는 타자 사이에 공통의 인간적 기반을 상상으로 구축하는 기반이 된다. 가족의 역할에 대한 상상에는 보편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인지적 이해가 아니라 평화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는 상상력의 실천이다.

이와 같은 과정은 종교평화학자 이찬수가 강조하는 ‘감폭력’(減暴力, minus-violencing)과도 통한다. ‘감폭력’은 ‘폭력’(violence)에서 멀어져 가는(minus) 과정(~ing)이다. 감폭력 실현을 위한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공감(empathy)이다.

‘적’은 세 단계의 구조적 과정을 통해 인위적으로 생산되기도 하다. 미디어가 특정집단을 라벨링하고, 그 결과 스티그마가 형성된다. 정치 지도자는 스티그마를 적대적으로 이용하며 대중이 그것을 비판 없이 수용함으로써 본래 ‘아들·딸’, 때로는 ‘아버지·어머니’라는 가족적 역할을 지닌 구체적 인간이 추상적 ‘적’으로 변환된다. 이는 갈퉁이 말한 ‘사회구조에 내장된 폭력’의 전형이다. 진정한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편견이라는 구조적 폭력이 만들어낸 ‘적이라는 허상’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적은 공통의 인간성에 대한 상상력의 결핍이 빚어낸 개념적 산물이며, 공감적상상력을 통해 그 허구성을 인식하고 해체해야 할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진정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편견을 낳는 구조적 폭력 그 자체이자 이를 낳는 공감적 상상력의 빈곤이다. 동서의 종교적 지혜가 보여 주듯, 공감적 상상력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편견과 폭력의 파괴적 패턴을 넘어 더 관용적인 인간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근본적 변혁의 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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