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광수 명예교수
▲ 박광수 명예교수

인류 역사 속에서 ‘적(敵, enemy)’과 ‘동지(同志, friend)’는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해체되면서 정치적 목적을 수행해왔다. 실제로 적은 위협적 존재이며 폭력적 대상이다. 나와 내 민족(국가)을 지키기 위해 적에 대한 폭력과 전쟁을 통한 살상은 애국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오늘날 문명국가는 ‘나’와 ‘우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자’를 구축하고, 그 타자를 적대적 존재로 구성하여 제거하거나 굴종시키고 있다. 식민주의와 신자유주의 글로벌 경제질서는 모두 이러한 ‘적의 계보학(genealogy of the enemy)’과 연관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적의 계보학을 넘어서는 길은 가능한가?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적과 동지의 설정 등 이분법적 사유는 인류사회가 지속적으로 갈등과 대립의 구도를 벗어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 시대와 이후 세대에 적의 개념을 넘어서는 ‘공존’과 ‘협력’의 철학적 사유가 더욱 요구되고 있다.

근대 서구 문명국가는 18∼19세기에 걸쳐 산업혁명을 통해 ‘근대화’의 중요한 발판을 만들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가치관의 변화와 사회중심축의 변동이 일어났다. 정치적으로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전제주의에서 점진적으로 입헌제도와 대의제도에 의한 권력분립이 이루어지고 의사결정구조가 국민의 기본권을 중시하는 시민중심의 사회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한 자유와 인권이 신장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유럽의 근대화를 통한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의 강화와 제국주의적 식민정책은 전세계에 침략적 전쟁과 수탈이 자행되는 역사를 만들었다. 서구사회는 이를 ‘문명화’의 확산이란 명분으로 포장하면서 세계 전반에 파급하였다. 월러스턴(Immanuel Wallerstern)은 서구유럽에 계몽주의가 팽창하던 시기에 프랑스의 미라보(Mirabeau)와 영국의 퍼거슨(Adam Ferguson) 등에 의해 ‘문명(Civilization)’의 의미가 빠르게 전파되었다고 보았다.(Immanuel Wallerstein, 1994) 서구 문명국가는 보편적 가치—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국가로 자임해왔다.

유럽의 ‘근대화’와 왜곡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미국 대륙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서구적 ‘문명’세계 개척을 정당한 명분으로 삼고, 식민지를 확산하였다. 이를 통해 축적된 경제적 부는 산업혁명의 기반이 되었으며, 군비(軍備)를 강화시킬 수 있었다. 서구적 근대화와 ‘문명관’은 아시아 특히 일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근대화를 추구하는 주변 국가에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유럽중심의 세계관과 문명관이 파급되어 교육의 시스템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유럽과 미국 따라 하기를 근대화와 문명화의 척도로 여겼다. ‘근대화’와 ‘문명화’는 서구중심의 강대국가들이 힘없는 국가와 민족 침략과 식민화를 통한 ‘미개한 문명’을 문명화시키는 정당한 ‘의로운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The Violence of the Global”(2024)에서 지적했듯, 현대 문명은 표면적으로 ‘평화’, ‘인권’, ‘민주주의’라는 보편가치를 표방하지만, 그 이면에는 구조적 폭력이 존재한다. 현대의 글로벌 시스템은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비폭력적 폭력(violence without violence)” 즉, 거대한 기술과 자본,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전 지구적 차원에서 타자를 동화·말소시키는 정형화된 폭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 전쟁의 양상과는 다르지만, 그 파괴력은 오히려 더 치명적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오늘날의 ‘글로벌 시스템’은 폭력이 아닌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상은 문화적 동질화, 상징의 탈취, 타자의 소멸이라는 과정을 통해 더욱 치밀하고 비가시적인 폭력을 실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가장 특징적인 양상은 ‘가상의 적’을 설정하고, 그 적을 희생양(scapegoat)으로 삼음으로써 체제의 정당성과 무오류성을 지속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는 고전적 희생의 논리와 결합된, 이른바 구조화된 ‘비폭력적 폭력’이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1923년 도쿄 대지진 당시 조선인 수천 명이 학살된 사건을 문명국가가 위기의 순간 어떻게 비이성적 폭력으로 이행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있다. 관동대지진은 일본 사회 전체에 극심한 혼란과 불안을 초래했다. 지진 직후 퍼진 소문에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불을 지르는 폭동을 일으켰다는 등의 가짜뉴스였지만, 당시 일본 당국은 이를 방관하거나 조장했고, 자경단과 군경에 의해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하였다.

이는 단순한 민간 차원의 광기나 오보가 아닌, 근대국가의 위기 통치술의 전형이었다. 근대국가는 불안과 혼돈을 해소하고자 제도화된 적, 타자, 이단자를 만들고 제거함으로써 자국민에게 질서 회복의 환상을 제공하였다. 그 피해자는 일제식민지하의 조선인이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성과 홀로코스트』(1989, 2013)에서 홀로코스트가 근대성과 계몽적 이성의 논리, 즉 합리적 관료제와 도구적 이성이 낳은 산물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대량학살이 근대성 자체에 내재된 폭력성과 타자의 비인간화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 이스라엘의 가자지역 침공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차별적 살상을 초래하고 있는 것은 자국의 안보차원을 넘어 자칭 문명국가의 야만적 폭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21세기에 들어 적은 무역의 적이 되었다. ⓒGetty Images
▲ 21세기에 들어 적은 무역의 적이 되었다. ⓒGetty Images

오늘날 21세기 세계화시대에 패권적 종속주의와 탐욕적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전세계에 만연하고 있다. 군사력에 의한 식민화가 아닌, 보이지 않는 제 3의 식민화와 정치적 경제적 종속화가 매우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고율 관세 정책은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적대 구도를 만들고 있다.

한국은 물론, 중국, EU, 캐나다 등 수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의 표적이 되었으며, 이러한 미국만의 ‘국가이익을 위한 경제정책’은 상호 의존과 협력이 필요한 세계 경제 영역을 뒤흔들어 무역조차 ‘전쟁’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세계경제를 미국중심으로 종속화시키는 무도한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명의 가장 깊은 폭력은 타자를 적으로 전환하고 힘으로 굴복시키거나 종속화시키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 이를 근본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불교의 연기(緣起)사상과 원불교의 사은(四恩)사상은 이러한 이분법적 적대 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조화적 문명전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불교의 연기설(緣起說)과 무아(無我)의 사유는 적의 허구성에 대한 철학적 해체를 촉구한다. 불교는 존재와 관계의 본질을 '연기'(pratītya-samutpāda)로 설명한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지진다.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도 멸한다.”는 내용은 존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조건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의미한다.

무아(無我)는 곧 ‘나와 타자’ 즉 모든 존재 자체가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는 관계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적대적 이분법 구조를 깨뜨려 적이라는 환영을 소멸시키는 근거를 제공한다. 따라서 적(enemy)은 본질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무명(avidyā)과 분별심에서 생겨난 관계적 환상일 뿐이다. 연민(karuṇā)과 자비(maitrī)를 통해 상호관계의 긍정적 전환을 가능케 한다.

원불교는 불교의 연기사상을 바탕으로 ‘사은(四恩)’을 중심 윤리로 삼는다. 사은이란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으로, 모든 존재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자각이다. 타자에 대한 혐오나 배제를 가능하게 하는 ‘적대적 분리’의 구조를 철저히 해체하며, 모든 존재를 은혜적 관계망 속에서 재구성하는 윤리적 실천이다. 가상의 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고 상호은혜의 원리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조화의 정신문명을 촉구한다.

이는 전쟁이나 폭력의 종식을 넘어, 근원적인 ‘원한의 역사’를 은혜로운 ‘상생의 역사’로 전환하는 실천적 개벽철학이다. 진정한 평화는 적을 폭력적으로 제거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 관계를 상생적 관계의 구조를 만들어갈 때 가능하다. 우리는 ‘적 없는 사회’를 향해 인식의 전환과 실천이 요구되는 시대에 서 있다.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