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필원 교수는 개인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증오심을 다스리는 것이 적대감 해소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한다.
▲ 이필원 교수는 개인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증오심을 다스리는 것이 적대감 해소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한다.

만연된 한국사회의 적대감이 던지는 화두

오늘날 한국 사회는 전례 없이 심각한 적대감으로 얼룩져 있다. 정치적 진영 논리를 넘어선 이념 갈등, 성별 간의 첨예한 대립, 그리고 지역 간의 뿌리 깊은 불신은 우리 사회의 통합을 저해하고 있다. 이러한 적대감은 단순히 의견 차이를 넘어,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배제하려는 깊은 심리적 기제로 작동하며, 이는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와 공감 능력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특히 최근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둘러싼 움직임 이후 극우 세력의 준동은 이러한 사회적 적대감의 위험도를 더욱 높이고 있으며, 이는 사회 통합을 저해하고 민주주의 근간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진단이 나온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정치적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깊은 병폐의 징후로 이해될 수 있다. ‘적’이라는 개념은 이처럼 해결되지 않은 사회적 불안과 역사적 상처, 그리고 차이를 건설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집단적 무능력의 투영으로 기능하며, 이는 근본적인 사회적 치유와 신뢰 회복의 과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자아관념의 형성과 적의 출현

이른바 인류는 인지혁명이란 사건과 조우하면서,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서 인류의 문명은 자신과 세계의 파편을 모아 퍼즐을 맞추듯 조직되었다. 자신과 세계의 파편이라고 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세계와 구분지으며, 분리될 수 없는 관계망에서 벗어나 파편화한 일종의 자기 기만의 형태를 말한다. 나와 구분된 세계 역시 다시금 하나하나의 요소로 분해되어 생명을 잃은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구분짓고, 해체되면서 레고의 조각으로 전락한 자신과 세계는 아주 편협하고 작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석되면서,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분을 아주 명확하고 예리하게 재단하였다. 그리고 ‘나’를 위협하는 어떤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대상으로 설정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적’이란 개념의 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초기 불교는 ‘적’의 개념을 외부의 대상이 아닌, 우리 마음의 작용과 연관짓는다. 고따마 붓다는 외부의 누군가보다 스스로의 마음에 잘못 길들여진 번뇌가 훨씬 더 큰 해를 끼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담마빠다(법구경)』에서는 “적이 적에게 혹은 원수가 원수에게 어떤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나쁘게 의도된 마음이 자신에게 끼치는 해보다 크지는 않다.”고 말한다.

적 혹은 원수에게 원한을 갚는 것은 단순한 분노를 넘어 증오의 적극적 실천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나쁘게 의도된 마음’이 해악이 더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나쁘게 의도된 마음’은 달리 표현하면 ‘사견(邪見)’ 곧 잘못된 견해이다. 객관적 사실을 편협한 자기 주관적 입장이나 사적 이익을 위해 일부러 왜곡하여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실로 포장하여 퍼트리는 일련의 악의(惡意)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 ‘나쁘게 의도된 마음’의 일차적 희상양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이차 희생은 불특정 다수가 된다. 따라서 초기 불교는 “적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장 무서운 적은 우리 내면의 왜곡된 증오심이라는 답을 제시한다. 증오는 외부의 ‘적대자’를 겨냥한 마음이지만, 그 자체가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의 뿌리이기도 하다.

이상의 내용을 불교 학자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그의 저서 What the Buddha Taught에서 모든 악의 근원이 ‘자아(自我)’라는 잘못된 관념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자아가 존재한다는 관념은 개인적 갈등에서 국가 간 전쟁까지 세상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설명된다.

▲ 십우도의 여덟 번째 그림 ‘인우구망(人牛俱忘)’. 나와 남을 모두 잊어버리는 상태이자 깨달음의 완성을 표현한 것이다. 원상으로 표현한 법당 외벽 벽화. ⓒ불교신문
▲ 십우도의 여덟 번째 그림 ‘인우구망(人牛俱忘)’. 나와 남을 모두 잊어버리는 상태이자 깨달음의 완성을 표현한 것이다. 원상으로 표현한 법당 외벽 벽화. ⓒ불교신문

대립하는 세계에 대한 원한에서 적대감이 발생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도덕 그 자체가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통찰을 제시한다. 그는 “노예 도덕”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에서 억눌리고 약한 사람들이 자신을 억압하는 강자를 ‘악’이라 규정하고, 자신을 ‘선’이라 정당화하는 도덕 체계를 창조했다고 분석한다. 여기서 약한 사람이란 단순히 힘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가치를 외부에서 찾고,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능동적인 의지를 결여한 사람을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노예도덕은 처음부터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가치의 시선을 이렇게 전도시켜 반드시 밖을 향하게 하는 것은 원한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노예도덕의 발생은 언제나 먼저 대립하는 어떤 세계와 외부세계를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이러한 가치전도가 기능하는 기제는 다름아닌 ‘자아’와 ‘타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이다.

이는 ‘적’이라는 개념이 자신을 규정하기 위한 수단이며, 외부에 대한 증오와 원한(ressentiment)을 통해 정체성과 도덕을 구성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른바 ‘피해자 의식’이 도덕적 우월감과 결합되어 미워하는 대상을 ‘악’으로 정의하고 그 미움 자체를 정당화하는 심리를 설명하며, 이는 우리가 적을 미워하면서 오히려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니체는 이러한 원한 도덕을 반응적이고 생명 부정적이며 자신을 초월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는데, 이 점은 원한과 증오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무지이자 고통의 원인으로 보는 불교의 가르침과 어느 정도 상통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불교와 니체의 관점은 ‘적’의 근원에 대해 각기 다른 출발점을 가지면서도, 인간 존재와 적대감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접점을 갖는다.

내면의 전환과 영원한 진리

외부의 적은 일시적인 피해를 줄 뿐이지만, 내면의 미움과 분노는 영혼을 갉아먹는 독이며 우리의 평화를 끊임없이 소모한다. 니체가 경고하듯, 누군가를 미워함으로써 정체성을 형성하는 도덕은 결국 원한에 갇힌 자기 정의이며, 생명 부정적인 속성을 갖는다. 반면, 불교는 원한과 적대의 고리를 끊고 자비와 이해로 응답할 때 비로소 진정한 해방과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이 둘의 통찰은 적대감의 근원과 해소의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깊은 분열을 치유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적대감의 해소는 개인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데서 시작된다. 불교의 가르침처럼 개인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증오심을 다스리는 것이 적대감 해소의 첫걸음이다. 이는 자기 기만과 이기적 욕망에서 비롯된 ‘자아 관념’을 넘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포함한다. 개인이 내면의 증오를 해체하고 자비심을 기르는 것은, 사회적 적대감의 근원적 동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담마빠다』의 “이 세상에서 증오는 결코 증오로 가라앉지 않는다. 오직 사랑에 의해 증오가 사라진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라는 구절은, 적대감 해소가 내면의 변화와 자비의 실천이라는 두 축에서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는 영원한 진리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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