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은 주로 서구사회에 해당되는 일이고, 단군 이래로 한국은 단일민족을 유지해 왔다고 생각되었던 적이 있었다. 약 20년 전 필자가 캐나다의 한인 공동체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인 이민교회를 석사논문의 주제로 선택했을 때 “이런 주제는 한국보다는 유럽이나 북미 같은 서구사회에서 적합할 것”이라는 의견을 한국종교 전문가에게 들었었다. 어느샌가 이태원이나 강남, 홍대 등 외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수도권 지역의 관광명소 외에도 섬, 산골 장터, 소도시 골목길, 지방 농장 등 전국 곳곳 예상치 못한 것에서 거침없이 한국말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 학생, 판매원, 가정주부 등과 마주치게 된다.
인구절벽으로 대한민국은 지속가능성의 위기에 처해있으며, 감사하게도 외국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이후 한국에 와서 온갖 불편함과 심지어 차별도 경험하면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노동력에 우리 사회와 경제는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한국이 앞으로도 번영과 성장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적어도 전인구의 10%까지 외국인 이민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도 한다. 한국은 이민자의 경제적 기여 없이는 지탱하기 힘든 나라가 되었고, 앞으로 이러한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새로운 꿈을 찾아서, 또는 K-pop이나 한국드라마, 한국음식과 문화에 매료되어 한국을 찾은 이주노동자, 외국인 학생,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에 도착한 이후 곧 마주하게 되는 현실은 아직도 녹록지 않다. 임금을 떼먹거나 육체적 또는 언어적 폭력 등 눈에 쉽게 보이는 차별이 외형적으로는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교묘하게 진행되는 경우도 많다. 사회적 약자로서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묘한 문화적 차별들, 특히 종교적 차이에 따른 혐오도 대한민국이 보다 공정한 사회로 도약하는데 반드시 짚어봐야 할 문제이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을 넘어, 종교적 차별도 지구화된 대한민국이 이른바 선진국이 불리고 싶다면 반드시 심각하게 짚어봐야 하는 사안이 된 것이다.
이는 단지 2001년의 “9.11” 테러가 보여줬던 것처럼 종교들 간의 또는 문명들 간의 충돌이 21세기의 하나의 시대적 이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종교 전통들과 상이한 종교적 정체성들이 서로 어우러져 형성되는 종교적 다양성은 우리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대한 이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21세기의 한국인들 상당수는 한국 사회가 종교적 소수자들이 숨지 않고 당당하게 숨 쉬고 스스로의 종교적 정체성을 펼칠 수 있는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종교적 소수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불편한 감정을 여전히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주술, 미신, 유사종교 등의 개념들을 활용해서 이들에게 접근할 때도 많다.
종교적 다양성은 이민 사회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다. 근대한국의 종교 지형은 하나의 종교가 지배하기보다는,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는 다종교성으로 특징되어 왔다. 그러나 정말로 한국이 다양한 종교들이 공평한 자유를 누리는 민주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은 “종교백화점” 또는 “다종교 사회”라고 하지만, 인구의 50% 이상이 종교적 소속이 없는 상당히 세속적인 사회이고, 불교, 개신교, 천주교가 종교 인구의 95%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균형적이기보다는 ‘편향된’, 수평적이기보다는 ‘수직적’인 종교시장을 가진다.
또한 유교를 종교로 신봉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유교문화권에 속한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주된 사회적 관념은 전국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무종교인들과 주류 종교인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공공의 영역은 종교 권력이나 가치, 제도로부터 분리된 세속적인 공간이어야 하고, 종교들은 건전한 신관과 학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신학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1990년대 이후 증가하는 이주민들, 특히 이웃 아시아 지역으로부터 들어오는 이주민들의 유입은 단일민족으로 상상되던 한국 사회의 성격을 크게 변화시키면서, 한국의 종교적 다양성을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동남아시아나 중앙아시아, 남아시아로부터 유입된 무슬림 이주민들, 중국풍 대승불교를 계승하면서도 전통신앙·유교·도교를 융합해 온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의 이주민들, 동아시아 불교와 대비되는 테라바다 불교를 정체성으로 하는 태국 이주민들, 힌두신앙을 가진 인도 및 네팔 등 남아시아 출신의 이주민들, 가톨릭 공동체를 매개로 정체성을 유지하고 종족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필리핀 이주민들, 그리고 이러한 이주민들을 상대로 ‘다문화선교’를 수행하며 ‘해외선교’를 준비하는 기독교인들 등이 뒤섞이면서, 현재 한국 사회는 점점 더 증가하는 종교/문화적 역동성을 경험하고 있다. 벌토벡(Vertovec)은 ‘초다양성’(super-diversity)이라는 용어로 기존 사회-경제-문화의 범주 밖에서 살아가는 초국적 이주민들의 증가와 사회적 상태나 일상을 기술하는 기준들의 복잡성이 증가하는 지구화 현상을 설명한다. 이민과 지구화에 따라 종교적 다원화가 극대화되면서 기존의 ‘종교적 다양성’ 개념으로는 포괄하기 어려운 ‘종교적 초다양성’ 현상이 증가하고 있다.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캐나다에서는 ‘다양성’을 캐나다가 앞서서 추구해 가야 할 자랑스러운 가치로 널리 인정하고 있다. 다양성은 이념, 지역, 언어, 출신, 성 등 다채로운 지리적, 문화적, 생물학적, 이념적 차이들로 형성된 이민 사회를 통합하는 주요한 개념이다. 매년 수십만 명의 외국인들이 영주권자가 되면서 캐나다에 죽을 때까지 거주할 수 있는 합법적 권리를 취득한다. 하지만 보다 낳은 삶을 꿈꾸며 정든 고향을 떠나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나이지리아, 이디오피아 등 아프리카,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남아시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멕시코, 베네주엘라, 엘살바도르 등 중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이주민들은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줄 ‘자연스런’ 끈이란 사실상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양성은 그 모든 차이를 엮어줄 수 있는 이념으로서 ‘어쩔 수 없이’ 선택된 캐나다 사회의 핵심적 준거점이 된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먹고살기 위해 독일에서 부모와 함께 온 유럽계 이민자인 종교사회학자 바이어(Beyer)에 따르면,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이민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 196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옆집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그 집 큰아이 성적이 올랐는지 내렸는지 다 알고 지냈다고 한다. 같은 놀이터에서 놀고, 동네의 같은 교회를 다니고, 같은 동네 시장이나 슈퍼에서 장을 보니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땅은 북극, 태평양, 대서양에 맞닿아 있을 만큼 넓은데 인구는 적다 보니 기회가 닿는대로 캐나다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돕는다. 즐거운 마음으로 옆집 농사를 돕고,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을 봐도 웃어주며 인사하고, 도로변에 차라도 서 있으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가가서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다. 영하 35도로 내려가는 겨울철 나와 내 가족이 외출을 나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기회가 닿는대로 부지런히 돕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는 옆집 이웃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 수가 없고, 내 맘대로 편하게 추측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사안이나 상황에 처했는지 나와 완전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여기는 것이 서로에게 안전하다는 것이다. 유럽으로 열려있던 이민의 문호를 전 세계로 개방함으로서 캐나다는 번영을 지속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어떠한 가능성’도 열어놓고 이웃과 맞춰가며 관계를 유지해야 상황 속에서, 이러한 모든 변화와 불편을 ‘다양성’이라는 가치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큰 어려움이 생기기라도 하면 우리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든 외부 이민자, 특히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주요한 타겟이 되기 쉽다. 물가가 너무 빨리 오르거나, 주거 공간이 부족해지거나, 직장을 잡기가 어려워지는 등 사회경제적 문제가 생기면, “이민자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확산된다는 것을 보게 된다. 지난 10년대 캐나다에 유입된 이주민들 가운데 유럽계는 소수이고 인도, 아프리카, 남미, 중동 또는 아프가니스탄 등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에서 주로 오다 보니, 사회적 위기감이 고조되면 이들이 우선적으로 ‘공공의 적’이 되기 쉽다. 그들의 색다른 종교적 신행의 양식들은 신기하면서도 무섭기까지 하다. 트로이의 목마처럼 우리의 관용을 활용해 내가 익숙한 캐나다 사회를 내부에서부터 파괴시킬지 모른다는 의심이 혐오범죄로 이어지기가 부지기수다.
종교적 다양성은 양날의 검처럼 한 편에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며 사회적 저력을 내보이는 가치일 수 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낯선 종교와 문화를 통합해야 하는 정치적 과제를 내포한다. 대부분의 캐나다의 오피니언 리더들, 다문화주의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 어떤 불편함이 있더라도 다양성은 오랫동안 캐나다의 정체성을 이루고, 미국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해온, 캐나다의 장점이고 자원이며 저력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계절풍처럼 먹고살기가 팍팍해지면, 기성종교를 믿고 있거나 종교적 소속 없이 세속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 특히 이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 또는 그런 사람들에게 위협이 가해지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게 된다. 요새 K-pop으로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나고, 공부하거나 일하는 외국인들이 늘어나는 오늘 한국 사회에서 반면교사로 삼아볼 지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