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이끄는 평화의 힘은 어디서 나오며 과연 누가 어떻게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던지며, 이 시대를 사는 인류의 한 존재로서 함께 사는 또 다른 이들, 난민•이주민에 대한 고민을 아니할 수 없다.
올 1월 처음으로 미얀마 난민이 국경을 넘어와 거주하는 태국 메솟지역을 방문하였다. 또다른 타자인 미얀마 이주 난민, 그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며, 현재 이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난민, 이주민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 그리고 더불어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시대적 조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2024년 후반기를 기준으로 난민(UNHCR보호대상) 약 3,680만명, 유사난민을 포함한 전체 난민 약 4,270만명, 국내 실향민(IDPs) 약 7,350만명, 망명신청자 약 840만명, 보호가 필요한 기타인구 약 590만명, 무국적자 약 440만명에 달하였고, 약 67%의 난민 및 국제 보호 대상 인구가 인접 국가에 머물고 있으며, 73%는 저소득 및 중저소득 국가에서 수용되고 있다. 가장 많은 난민 발생 국가들은 베네수엘라 620만명, 시리아 600만명, 아프가니스탄 580만명, 우크라이나 510만 명, 남수단 230만 명 순이다.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난민과 이주민은 단순히 이동하는 집단이 아니라, 정치적·종교적·문화적 갈등이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장(場)이 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난민·이주민을 ‘타자화(othering)’하는 정치·종교적 담론의 계보를 추적하고, 이를 넘어서는 ‘화해의 대안적 계보학’에 대한 구상을 해보고자 한다. 난민·이주민은 어떻게 ‘적대적 타자’로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이를 화해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시 써 내려갈 수 있을까?
난민·이주민 타자화의 계보학
먼저, 난민과 이주민을 타자화시키는 계보의 근거를 세 분의 철학적 사상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푸코의 계보학(genealogy)에서
난민·이주민은 “국민-비국민”의 경계 설정을 통해 끊임없이 타자화되고 있으며, 계보학적 분석은 이 과정이 필연적이지 않고, 역사적·권력적 산물임을 드러내고 있다.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환대(hospitality)철학에 따르면, 환대는 “조건적 환대”(조건·규제·동화 강요)와 “무조건적 환대”(타자를 무한히 수용하는 윤리적 요청)로 구분되는데, 오늘날 국가 정책은 대부분 조건적 환대에 머무르며, 난민을 잠재적 위협으로 규정하고 있다. 데리다는 이 두 환대가 단순히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항상 긴장 속에서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법과 제도의 ‘조건적 환대’ 없이는 사회적 안전망이 유지될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타자성의 진정한 윤리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적 과제는 이 불가능성을 직면하면서도 무조건적 환대의 요청을 계속해서 열어두는 데 있다. 데리다의 사유는 ‘타자화의 논리’를 전복하고, 새로운 환대의 언어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철학자,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 )은 정치철학, 법철학, 신학적 전통을 넘나들며 주권, 생명, 권력, 예외상태 같은 문제를 탐구한 사상가이다. 그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이론에 따르면, 난민은 법적 주체이면서 동시에 배제된 존재, 즉 법의 내부자이자 외부자이다. ‘캠프’(난민캠프, 구금시설)는 주권 권력이 ‘예외상태’를 제도화하는 공간이 되며, 난민은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채, 오직 생물학적 생존만 보장받는 존재로 전락함을 이름이다.
현시점의 ‘국민국가 형성 과정’의 측면으로 보면, ‘국민’을 규정하기 위해 타자(난민, 이주민)를 배제하는 전략이 작동하였다. 또한 이를 ‘종교적 담론’으로 보자면, “우리 vs. 그들”의 경계가 신앙적 정체성과 결합하여 타자를 위협적 존재로 호명하고 있다. 더불어, ‘현대 정치’의 측면으로 보면, 테러리즘·안보 담론이 난민을 잠재적 범죄자, 혹은 사회적 부담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난민·이주민은 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이중·삼중의 타자화의 대상이자 타자화의 계보학의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타자화의 오래된 그림자
요약하자면, 오늘날 난민과 이주민을 둘러싼 담론은 단순한 인도주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를 어떻게 규정하고 배제하는가라는 정치적·신학적 질문과 맞닿아 있다. 미셸 푸코의 계보학적 방법은 권력과 지식이 어떻게 특정 집단을 ‘정상/비정상’, ‘내부/외부’로 구분하는지 드러낸다. 유럽의 국경 통제와 아시아의 노동자 관리 시스템은 이러한 구분을 제도화한 대표적 사례다. 데리다가 지적한 ‘환대의 역설’처럼, 국가는 난민을 환대한다고 선언하면서도 동시에 배제하는 이중적 장치를 마련한다. 이는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 즉 법과 권리에서 배제되면서도 여전히 권력의 통제 아래 놓이는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 현장은 이 이론의 실험장이 된다. 한국의 한 이주 노동자는 합법적 고용 상태에서도 ‘잠재적 범죄자’로 감시당하며, 그 법적 지위가 언제든 취소될 수 있음을 두려워한다. 유럽의 난민 캠프에서 만난 한 시리아 청년은 “환대받았지만 언제 추방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간다. 이들의 삶은 제도적 언어 속에서 ‘인간’이 아니라 ‘통계’와 ‘보안 문제’로 환원된다.
다만, 푸코의 계보학이 갖는 방법론적 한계, 예를 들자면, 권력-지식 분석은 구조를 드러내지만 해방적 대안은 모호하다는 점, 데리다의 환대 개념의 불가능성 논의-윤리와 정치의 괴리-가 있는 점,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개념의 비관적 성격-주체성 회복의 가능성의 약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무시할 수 없기도 하다.
화해의 대안적 계보학
그러나, 기독교적·에큐메니칼 신학의 차원에서 우리는 또 다른 계보학을 요청받는다. ‘적의 계보학’을 넘어서는 화해의 계보학은 배제의 언어를 반복하는 대신, 억눌린 목소리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적 서사를 찾아내려 한다. 예수가 보여준 급진적 환대, 곧 사마리아인이나 세리와 식탁을 나눈 행위는 오늘날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대안적 정치신학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원불교의 사은(四恩) 사상 역시,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은혜의 관계를 강조한다. 타자화가 아니라 상생의 관점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나 불교·원불교에서 말하는 공생 사상(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에서 더 구체적으로 심화시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실천적 방향성으로 다문화 교육, 시민권 개혁, 종교 간 대화, 세계시민교육 등의 다각적 모델이 실지로 많은 지역에서 시행되고 있다. 나아가, 여성 난민, 아동 난민, 무국적 난민 등 교차적 타자화(intersectionality)를 고려한 더 깊은 분석과 연구가 향후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제이다.
난민·이주민 문제는 단순한 인도주의 과제가 아니라 권력, 종교, 주권의 정치신학적 문제로 알고 접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타자화의 계보학’을 밝히는 것은 이들이 어떻게 ‘적’으로 구성되어왔는지를 드러내는 일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통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화해의 대안적 계보학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즉,
• 권력의 작동을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 조건적 환대를 넘어 무조건적 환대의 윤리를 지향하며,
•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을 다시 정치적·윤리적 주체로 호명해야 한다.
이는 곧 “적의 계보학”을 넘어 “화해의 계보학”을 써 내려가는 작업이며, 오늘의 세계 정치·종교 담론에 필요한 전환적 시선임을 제공하는 새 역사의 시작이자 희망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난민과 이주민 문제는 단순한 자선이나 시혜적 환대를 넘어, 권력이 생산한 타자화의 역사적 계보를 성찰하고 이를 해체하는 신학적·윤리적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 푸코의 계보학이 권력의 얽힘을 드러낸다면, 데리다의 환대 개념은 그 균열을 확장하고,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 개념은 우리의 무관심을 비판하는 장치가 된다. 나아가, 화해의 계보학은 그 해체의 지점에서 새로운 ‘공동의 집’을 상상하게 한다.
오늘 우리가 난민과 이주민을 향해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는, 미래의 공동체 윤리를 결정짓는 거울이 된다.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곧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