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갚는 삶”

레위기 19:9-18; 누가복음 6:32-38

이병일 목사

 레위기 19장은 율법 중에서 성결법전(레 17-26장)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대근동의 법은 왕이 법의 제정자이고 선포자이지만, 이스라엘에서 입법자는 항상 야훼 하느님이고 왕도 법률을 엄격히 지켜야 했습니다(신 17:14-20; 삼상 8:11-18). 왕은 이러한 종교적 율법의 반포자가 된 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해방된 평등공동체를 포기하고 왕정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이 왕정은 왕권을 법에 의해 제한하는 성격을 가진 ‘법에 의한 왕정’이었습니다. 이 법은 계급사회의 법이면서도 평등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평등공동체를 떠받들고 있던 야훼는 이제 왕정 아래에서도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법의 하느님이 됩니다. 구약의 율법들은 평등한 사회를 지켜 나가고 유지하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경제적 기반을 잃고 이 평등구조에서 이탈되어 나가는 사회적 약자들을 다시 평등적 사회 구조 안으로 복귀시키려는 노력의 결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야훼신앙의 본질과 율법의 역할은 약자 보호적인데, 하느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고자 하는 자는 일상의 윤리와 이웃의 유익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을 보더라도 가장 상식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잘 지켜지지 않는 내용입니다. “9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10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11 도둑질하지 못한다. 사기하지 못한다. 서로 이웃을 속이지 못한다. 12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여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나는 주(야훼)다. 13 너는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네가 품꾼을 쓰면, 그가 받을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 네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14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주다. 15 재판할 때에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두둔하거나,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된다. 이웃을 재판할 때에는 오로지 공정하게 하여라. 16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남을 헐뜯는 말을 퍼뜨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너는 또 네 이웃의 생명(피)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다. 17 너는 동족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웃이 잘못을 하면, 너는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래야만 너는 그 잘못 때문에 질 책임을 벗을 수 있다. 18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공동체 구성원들 간에 공정하고 의롭게 살아야 할 근거가 무엇입니까? “나는 야훼다”입니다. 율법 조항들 사이에 반복하여 하는 말이 “나는 주다”입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야훼 이름을 모두 주라고 번역하였는데, 여호와냐 야훼냐 하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그냥 주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나는 야훼다” 내가 너희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사람들 사이에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며 살기 위한 율법의 근거가 됩니다. 야훼는 누구입니까? 떠돌아다니는 아람 사람들이 노예가 되어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 히브리를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서 평등공동체를 이루게 하신 분입니다. 야훼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에 “은혜”가 있습니다. 너무 자주 사용되다 보니, 그 의미가 무엇인지 불분명할 때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설교에 은혜 받았다”라는 말입니다. 보통은 “설교가 감동적이었다”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은혜를 감동적이었다는 의미로 사용할 때에는 그 뜻을 심각하게 왜곡 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은혜(καρις)는 주로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에 나오는데,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 즉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경험인 출애굽 해방이나 예수님이 십자가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여 구원의 문을 열어 놓은 사건에서 은혜는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 은혜는 도덕적 행동의 원천이 됩니다. 그리고 은혜로운 일이나 은혜로운 행동(고후 8:9; 9:8)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히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함께 사는 근거는 구원과 해방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선물로 주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삶이 하느님께 은혜를 갚는 삶입니다.

은혜하면 생각나는 산이 치악산입니다. 치악산에서 수도하던 어느 선비가 구렁이에게 잡혀 먹히려던 꿩을 구해주었습니다. 그날 밤 먹이를 놓친 구렁이가 대신 선비를 덮쳐 잡아먹으려고 하자 선비가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구렁이는 산위에 빈 절에 종이 있는데 새벽예불 때까지 3번 울리면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이젠 죽었구나하 고 있는데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낮에 살려준 꿩이 자신의 머리를 종에 부딪쳐 소리를 낸 것입니다. 그 종이 바로 치악산 상원사동종이라고 합니다. 치악산(雉嶽山)은 꿩이 죽음으로 보은했다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합니다.

은혜와 관련된 고사성어로는 ‘은혜를 뼈에 새겨 잊지 않겠다’는 각골난망(刻骨難忘), ‘죽어서도 은혜를 갚는다’는 결초보은(結草報恩), ‘자식이 자라서 늙은 부모를 정성으로 돌본다’는 반포지효(反哺之孝) 등이 있습니다. 반대로 ‘남에게 입은 은혜와 덕을 잊어버린다’는 뜻의 배은망덕(背恩忘德), ‘신의를 지키지 않고 자기 비위에 맞으면 갖고, 싫으면 내다 버림’을 의미하는 감탄고토(甘呑苦吐)도 있지요.
 <진(晉)나라의 大夫(대부) 魏武(위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妾(첩)이 한 명 있었습니다. 어느날 위무가 병으로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아직 제정신일 때 그는 아들 魏顆(위과)에게 일러 말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이 첩을 다른 사람에게 개가를 시켜라.” 하더니, 그 뒤 병이 심하여 죽게 되거늘 또 말하되 “내가 죽으면 저 여인은 순장을 시켜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죽음에 이르러 위과가 말하되 “차라리 정신이 있을 때의 명령(命令)을 좇아서 이를 개가를 시키리라.” 그리하여 서모(庶母)를 개가시켜 순사(殉死)를 면하게 했습니다. 후에 진(晉)나라와 진(秦)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서 위과(魏顆)가 전쟁에 나갔습니다. 진(秦)나라의 두회(杜回)와 싸우다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두회가 풀에 걸려 넘어져 위과가 두회를 사로잡아 뜻밖에도 큰 전공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날 밤, 위과의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말을 하는데 그는 서모의 아버지의 망혼이었습니다. “나는 그대가 출가시켜 준 여인의 아비요. 그대는 아버님이 옳은 정신일 때의 유언에 따라 내 딸을 출가시켜 주었소. 그 때 이후로 나는 그대에게 보답할 길을 찾았는데 이제야 그 은혜를 갚은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거나 신세를 지게 되었을 때에 그것을 그 당사자에게 되돌려주는 것을 갚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더 이상 부모님의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부모님이 아니라 다른 어르신들이나 자녀들에게 갚을 수 있습니다. 전도사와 준목으로 강남향린교회에 있을 때에 김경호 목사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같이 식사할 때가 많은데, 어떤 때에는 교회에서 김치볶음밥을 해서 먹거나 밖에서 사먹었습니다. 매식을 할 때에 꼭 김경호 목사님이 돈을 내었습니다. 계속 그러나 보니 저도 조금은 부담스러워서 제가 낸다고 하니까, ‘나중에 후배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즘에 저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전도사님들이 돈을 낸다고 할 때에 저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은혜는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 다른 생명에게도 갚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삶이죠.

제가 다시 강남향린교회에 왔을 때에 청년신도회 수련회에 함께 갔습니다. 그 때에 잘 나오지 않고 나올 마음도 별로 없다고 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 시기를 교회에서 아주 재미있고 의미있게 보냈던 청년인데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도 약간 회의가 들기도 했습니다. ‘네가 어린이-청소년이었을 때에 교회에서 함께 했던 선배들을 생각해 봐라. 지금은 네가 그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냐. 그 선배들이 없었다면 네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느냐.’ 물론 그 때와 지금은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의 청년들은 돈도 벌어야 하고 스펙도 쌓아야 하고 굳이 교회가 아니더라도 원하는 것을 어디서든 얻을 수 있을지라도 그 청년은 지금도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나오지 않는 청년들은 다른 곳에서 열심히 은혜를 갚으며 사고 있겠죠.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하느님께 갚는 것이 어떤 삶입니까? 하느님께 받은 것을 어떻게 하느님께 돌려드릴 수 있나요? <신부와 목사와 유대교 랍비, 세 사람이 모여 하느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신부가, “저는 먼저 땅에 줄을 긋고 제가 가진 돈의 전부를 공중에 던집니다. 줄 오른편에 떨어진 돈은 하느님께 바치고 왼편에 떨어진 돈은 제 주머니에 넣습니다.” “썩 좋은 방법은 못되는데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땅에 원을 그려 놓고 원 안에 떨어진 돈은 하느님께 바치고 원 밖에 떨어진 돈은 제가 갖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돌아서서 숨을 한 번 크게 쉬고는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하느님께 바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만 웃기시오. 모든 걸 다 바친다구요?” 랍비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나의 돈 전부를 하느님을 향하여 던지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립니다. 하느님께 올려 드리니 공중에 머무는 돈은 당신의 것이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제 것입니다.”> 하느님께 은혜를 갚는 다고 하는 것을 좁게 생각하면 세 부류의 성직자들처럼 위선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것을 챙기는 위선 말입니다.

하느님은 굳이 우리의 돈과 찬양과 예배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갚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느님이 만드신 사람과 생명들입니다. 하느님께 은혜를 갚는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사는 삶입니다. 특히 이 세상에 나보다 잘난 사람들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어렵고 힘들고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갚는 것이 하느님께 값없이 선물로 받은 은혜를 갚는 일입니다.

“꿀벌이 다른 곤충보다 존경받는 까닭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R.M. 크리소스톰)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꿀벌도 자기가 살기 위해 꿀을 찾아서 부지런히 꽃 속을 드나들며 다닙니다. 그러다보면 꽃가루를 묻혀 이 꽃 저 꽃으로 옮기게 되고, 그 덕분에 식물은 열매를 맺고 우리들은 탐스러운 과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일부러 벌들이 우리를 위해 꽃가루를 옮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양식인 꿀을 모으기 위해 꽃을 옮겨다니다보니 자연스레 그리 된 것이지요. 목숨 지닌 것치고 누구나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신을 위한 일을 하며 남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요. 특별하게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 없이 하는 일상이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 생각하는 것마다 남을 유익하게 하려고 하거나 하는 일마다 남에게 덕을 끼치는 사람의 삶이 가장 좋은 삶이겠지요.

부와 권력을 순전히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을 누가 존경하겠습니까? 우리가 마음으로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좀 손해 볼지라도, 사회적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 되지 않고 존경과 감동을 자아냅니다. 세상에 자기 힘만으로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자신의 활동 무대이자 자기를 키워 준 사회를 떠나 성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람 가운데 제일 덜된 사람은 혼자 잘나서 된 줄 알고 사는 사람, 은혜를 모르고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수히 많은 가깝고 먼 인연에 의해 생긴다는 공과 무아를 가르치며, 그리스도교 신앙은 범사에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종교의 궁극 목적은 결국 자기 자신에 갇혀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을 이웃과 사회, 세계와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열린 존재로 만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하느님의 은혜와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은혜의 작은 부분이라도 갚으려 애씁니다. 그러나 은혜를 갚을 때에 그 대상이 꼭 하느님이나 부모님이 아니어도 됩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 나보다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에게 하는 은혜로운 행동이 하느님께 은혜를 갚는 일입니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사람과 생명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도 은혜를 입으며 살고 있습니다. 내 삶의 주변에서 가까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은혜가 더욱 큰 것이겠지요. 따라서 지금 내가 먹고 입고 쓰면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하느님을 비롯하여 모든 존재들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갚으며 사는 삶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받은 은혜가 아니라 내가 못나고 부족할지라도 거저 주신 선물이기에 나보다 조금이라도 부족한 사람들에게 하는 일이 하느님께 은혜를 갚는 일입니다. 특히 날마다 그리고 자주 부딪히면서 살고 있는 공동체 속의 구성원들에게, 가까이에서 함께 숨 쉬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일이 내가 받은 많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으며 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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